제17장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서 떠날 권리가 있다
“나희정이요? 그런 학생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곰곰이 생각하던 진봉태는 한참 동안 기억을 더듬고 나서야 확신에 찬 대답을 해주었다.
“나희정은 조기졸업하고 해외로 연수를 떠났어요. 귀국해서는 성수 제일 병원에서 일한다고 들었는데, 아주 훌륭한 학생이죠!”
“알았어요.”
수지는 기분을 알 수 없는 덤덤한 어조로 대꾸했다.
“나희정 학생이 닥터 제니라고 주장하는데 알고 있어요?”
“네?”
진봉태는 어리둥절했다.
“나희정이 닥터 제니이면 그럼 저와 통화하고 있는 제니는 대체 누구예요? 나희정 학생도 확실히 훌륭하긴 하지만 제니와 같은 수준에 도달하려면 한참 멀었죠. 다른 사람을 사칭하는 거라면 몰라도 하필이면 제니를 사칭해요? 뻔뻔함이 하늘을 찌르네요. 우리 성수 의대에서는 학생들에게 의술을 가르치지 거짓말을 가르치지 않아요! 나희정의 담당 교수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당장 연락해야겠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감히 제니를 사칭하다니, 자기 주제를 모르네요!”
수지가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던 중이라 병실에 있던 사람들은 진봉태의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박서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희정을 쳐다보다 천천히 시선을 주옥분에게로 옮겼다.
“사모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확신에 차 있던 주옥분은 순간 낯색이 어두워졌지만 곧이어 다시 결연한 얼굴을 했다.
“미리 연기자를 섭외해서 전화를 한 건지도 모르잖아요. 적어도 나희정 씨는 성수 의대의 훌륭한 학생이고 해외 연수까지 마치고 돌아와 제일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잖아요.”
주옥분은 말을 할수록 자신감이 생기는 것인지 나희정을 앞으로 밀었다. 그에 힘입어 나희정은 떠밀리듯 박서진의 옆자리에 앉았다.
“박서진 씨, 제가 진짜 닥터 제니예요. 저 할머니는 눈도 침침해 보이는데 메스나 제대로 들 수 있겠어요? 단지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서 전화 통화하는 걸로 스스로를 추켜세우고 절 비하한다고 해서 어르신의 수술을 잘 해줄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나희정은 박서진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이야기했지만 마음속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방금 전 들은 목소리는 확실히 성수 의대 학장인 진봉태의 목소리였고 그가 했던 말은 조사하면 금방 밝혀질 사실이었다.
나희정은 성수 의대를 조기졸업해 해외로 연수를 떠난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엔 닥터 제니가 아니다. 이번에 간 크게 이곳을 찾아온 것도 박서진의 고모인 박시연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미 날린 화살은 회수할 수 없다. 수지가 진봉태에게 연락했다고 해도 나희정은 자신이 닥터 제니라고 잡아떼야 했다.
“박서진 씨, 믿어주세요. 제가 진짜 닥터 제니예요.”
나희정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단호한 태도로 말하며 수지를 향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절 사칭하는 걸 보면 저에 대한 조사도 미리 해놨을 거예요. 제 신분과 뒷배경을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에요.”
수지는 돋보기안경을 밀어 올렸다. 그녀는 나희정과 쓸데없는 언쟁을 벌이는 것도 귀찮아 뒤돌아 이다은을 쳐다보았다.
“최 원장은 돌아왔어?”
이다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했는데 지금 오고 있는 중이에요.”
“최 원장한테 전해. 지금부터 최 원장은 청주 사립병원의 병원장이 아니라고. 돌아오는 즉시 청주 사립 병원에서 나가라고 해. 그리고 젊고 유능한 남자 의사를 뽑아서 병원장 자리에 앉혀.”
“네.”
공손하게 대꾸한 이다은은 수지의 뒤를 따랐다.
“사부님, 지금 돌아가는 거예요?”
“그래, 돌아가자. 이번 성수 박씨 가문의 환자는 진료를 취소하는 걸로 해. 원하는 의사를 찾은 것 같으니까 우리도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겠지.”
수지는 서늘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온기가 사라진 눈빛으로 박서진을 바라봤다. 그녀는 성수 박씨 가문의 진료 요청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상대방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수지는 단순히 박선재가 유정숙의 수양 오빠이고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주는 사람이라 진료를 맡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박서진이 자신을 믿지 못한다면 수지도 굳이 박선재의 병을 치료해 주겠다고 끈질기게 매달리지 않을 것이다.
다만, 박선재는 박선재이고 박서진은 박서진일 뿐이니 수지는 박선재에게 화풀이할 생각이 없었다. 수지는 박선재가 자신을 박씨 가문에서 머물도록 해주고 유정숙을 안심시켜준 은혜를 생각해 남들 몰래 그의 병을 치료해 줄 계획이었다.
“다은아, 가자.”
수지가 뒤돌아 발걸음을 옮기자 이다은은 황급히 뒤따라갔다. 병실 침대 위에 앉아 있던 박선재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임수빈에게 손짓했다.
“임 비서, 와서 나 대신 짐 정리 좀 해줘. 나 치료 안 받고 오성시로 돌아갈 거야.”
“어르신, 더는 치료를 미뤄서는 안 돼요.”
박선재의 말에 나희정은 급히 몸을 일으키며 그의 호감을 사려고 했다. 박시연은 박서진의 눈에 들려면 먼저 박선재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희정의 만류에 박선재는 머리를 들어 나희정을 쳐다보았다.
“나희정 씨가 다니는 병원의 의사들은 다들 높은 하이힐을 신고 다니나 봐요. 다리가 아주 튼튼하네. 나는 나보다 키 크고 젊고 마른 여자는 싫어해서, 나희정 씨의 치료는 거절할게요.”
나희정은 할 말을 잃었다.
박선재의 말은 전에 백발 할머니 의사가 더 좋다는 의미였다.
나희정은 서러운 얼굴을 했다.
“어르신,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시면 안 돼요. 제가 젊긴 하지만 정말 실력 있는 의사거든요.”
“알았어요. 그런데...”
박선재는 나희정을 힐끗 쳐다보았다.
“환자는 나예요. 나는 주치의를 선택할 권리가 있어요. 난 나희정 씨가 마음에 안 들어요.”
나희정은 말문이 막혔다.
“임 비서, 우리는 아까 그 할머니 찾으러 가자고.”
박선재는 임수빈의 부축을 받으며 소파에 앉아있는 박서진을 바라보았다.
“어떤 손자는 말이야, 일을 성사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일을 망쳐. 내 목숨은 내가 알아서 구해야지.”
“큰일 났어요.”
이때 박선재를 부축하고 있던 임수빈이 핸드폰을 꺼내 방금 받은 메시지를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제니 선생님의 비서가 메일을 보내왔는데 저희 진료를 취소했어요. 계약금과 위약금도 함께 보내왔어요.”
임수빈의 말에 박서진의 안색이 돌변하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말해봐.”
“제니 선생님이 진료를 취소했고 계약금과 위약금을 보내왔어요.”
임수빈은 굳어진 표정으로 핸드폰을 박서진에게 보여주었다.
“대표님, 전 지금까지 제니 선생님의 비서와 연락을 해왔고 제가 찾은 사람이 가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임수빈의 말에 박서진의 시선이 나희정에게 닿았다.
“그러니까 사칭범은 당신이네요.”
깜짝 놀란 나희정은 표정관리를 할 겨를도 없이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니에요.”
“그럼 설명해 봐요. 나희정 씨는 이 자리에 있었고 누구와 연락을 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제니 선생님의 비서가 취소 메일을 보내온 거죠?”
박서진은 어둡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사납게 나희정을 노려보았다.
“임 비서, 할아버지 잘 챙기고 있어. 내가 가서 제니 선생님을 찾아올게.”
말을 마친 박서진은 뒤돌아 성큼성큼 VIP 병실을 나섰다. 닥터 제니가 이다은과 함께 병실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수빈은 취소 메일을 받았다. 자신이 닥터 제니에게 스스로를 증명하라고 요구한 탓에 그녀가 단단히 화가 난 것이 분명하다고 박서진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