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두 사람의 몸이 거의 맞붙으려던 순간 배민훈이 그녀를 밀어냈다. "시아야, 체면은 지켜야지."
"기사에게 집에 데려다주라고 할게."
말하고 난 뒤, 배민훈은 그녀를 무시한 채 외투를 침대에 던지고는 창문을 열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의 차가운 반응에 이시아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배민훈, 내가 이 정도까지 하는데 아직도 무슨 뜻인지 몰라?"
"내가 원해서 이 모든 것을 한 거야."
"게다가, 난 네 약혼녀야. 그러니 이런 일은 아주 당연하잖아?"
배민훈은 담뱃재를 가볍게 털더니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이시아가 옷을 벗어도 아무런 욕망이 없는 것 같았다. "시아야... 네가 말한 일이 불가능한 건 아니야. 하지만 난 지금 그럴 기분이 아니야."
"옷 입어. 가기 싫으면 하인에게 게스트 룸을 준비시키라고 할게."
"배민훈... 넌 왜 날 갖지 않는 거야!" 이시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재로 가는 그를 바라보았다.
서재 문을 닫는 순간, 이시아는 더 이상 상처받은 얼굴을 숨기지 않고 구슬비 같은 눈물을 흘렸다.
...
저녁이 되자
송민지는 편하게 잠들지 못한 채 꿈결에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잠꼬대를 했다. "안 돼... 오지 마!"
"악!" 송민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이마는 이미 땀에 젖어 있었고 볼에 머리카락이 붙은 채 큰 숨을 쉬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는 비가 오는 듯했고 방은 조금 더웠다. '다행이야... 그냥 꿈이었어.'
그녀는 급히 일어나 창문을 닫았다. 그동안 그녀는 매번 똑같은 꿈을 꾸고 있다. 그 남자에게 죽기보다 못한 고문을 당하고 더러운 쓰레기 더미에 버려져 숨이 막히는 기분이 아주 고통스러웠다.
송민지는 갑자기 목이 너무 말라 주방으로 가서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곧이어 심장 박동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시간을 보니 새벽 3시가 조금 넘었다.
내일 수업이 있으니 송민지는 불을 켠 채로 다시 누워 잠을 잤다.
어렴풋이 5시 30분의 알람 소리를 듣고, 송민지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세수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송민지는 새 교복을 입고 가방을 메고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갔다. 몇 초만 늦었다면 하마터면 버스를 놓칠 뻔했다.
이른 아침이라 버스에 승객이 많지 않았다. 송민지는 제일 뒷자리에 앉는 걸 좋아한다. 창문을 열면 바깥 풍경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다음 정거장에 도착하자 무슨 일인지 한 무리의 할머니들이 버스에 타 송민지는 곧바로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세 개 역이 지나니 버스 전체에 사람이 가득 찼다.
그때 버스기사가 소리 질렀다. "좀 뒤로 움직이세요."
뒷문에 서 있던 송민지는 어느새 구석으로 밀렸다. 가방을 꼭 잡고 있던 그녀는 갑작스러운 커브에 손잡이를 잡을 시간도 없이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고통은 없고 고개를 들어보니 단단한 가슴과 익숙한 숨결이 느껴졌다.
주익현!
송민지는 숨을 죽였다. 그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주익현은 검은색 교복을 입고 있었고 옷소매를 거둔 채 가방을 메고 있었다. 180cm에 달하는 키에 손잡이를 잡은 채 강인한 눈빛으로 창문 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송민지는 작은 체격에 머리를 묶고 있어 마치 뒤에 서 있는 소년에게 보호받고 있는 것 같았다. 주익현이 두 팔로 손잡이를 잡고 있으니 송민지는 그에게 안긴 것 같았으며 마치 두 사람뿐인 공간인 것 같았다.
버스는 흔들리고, 송민지는 기댈 공간이 없어 겨우 주익현이 잡고 있는 손잡이 밑부분을 잡았다. 자기도 모르게 주익현과 손이 조금씩 스쳤다.
송민지는 고개를 숙이자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그 익숙한 세제의 꽃향기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주익현은 전생에서 그녀가 아무리 나빠도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전생에 그녀는 수없는 악한 행동을 했지만 유일하게 주익현 만이 그런 말을 했다. "네가 어떻게 변하든 넌 내 보물이야."
전생에 주익현은 재벌이 된 뒤 그녀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수십억 가치의 돈을 썼다.
배민훈도 그녀를 위해서 그 정도까지 한 적이 없다.
과거를 회상하던 중에 어느새 차가 학교 입구에 도착했다. 송민지는 멍하니 버스에서 내려 아주 천천히 걸어갔다. 하지만 그녀의 뒤에 있는 주익현은 그녀를 지나쳐 앞서가지 않고 줄곧 뒤를 따랐다.
학교 문 앞에 다다를 때쯤, 송민지가 발걸음을 멈췄다. "주익현."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의 이름을 외쳤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자 주익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투명 인간 취급하는 듯 곁을 지나쳤다.
그의 발걸음이 너무 빨라 그녀는 따라잡을 수 없었다.
송민지가 교문 앞에 도착하고 보니 주익현은 이미 선도부 명찰을 착용한 채 학생들의 명찰을 검사하고 있었다.
주익현은 그녀를 상대할 마음조차 없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녀가 했던 말들이 너무 심했던 것 같다.
송민지는 실망한 모습으로 고개를 숙인 채 학교로 들어갔다.
학교에 들어간 뒤 송민지는 기회를 찾아 주익현에게 사과하려고 노력했지만
마땅한 기회가 없었다.
오전 수업은 그렇게 끝났다. 오후가 되자... 송민지는 제일 뒷자리에 앉아 마침 주익현이 체육 수업을 듣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시각, 그는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고 있었다.
이번 수업은 테스트를 본다. 25분 동안 한 페이지의 시험지를 완성해야 한다. 바로 수학 기초 지식을 테스트하는 시험이다.
그때 송민지의 짝꿍이 그녀에게 귀띔했다. "민지야, 뭘 보고 있어? 시험지를 빨리 완성해야 해. 곧 제출할 시간이야."
송민지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지만 시험지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는 다급히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이름을 썼다.
갑자기...
자신의 이름 대신...
주익현의 이름으로 쓰고 말았다!
그것을 발견한 하율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송민지, 너 미쳤어? 이 수업이 누구의 수업인지 몰라?"
"왜 주익현의 이름을 쓴 거야!"
송민지는 다급히 테이프로 위에 있는 이름을 벗겨내려고 했지만, 볼펜의 잉크 때문에 도무지 지울 수가 없었다.
하여 송민지는 할 수 없이 이름을 검은색으로 칠하고 남은 시간에 서둘러 문제를 풀었다.
그녀가 세 문제를 풀기도 전에 친구들이 이미 시험지를 제출하기 시작했다.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자 송민지의 머릿속에는 세 글자만 맴돌았다.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