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황인호는 서명훈이 임지연한테 반한 건 줄로 알고 있지만 아부를 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동의를 하고 있었다.
“그것 참 좋은 제안이네요.”
임건국은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방금 황인호가 공손한 태도로 보이는 모습을 보아 이 남자의 신분이 만만치 않을 텐데 만일 이 남자가 임지연을 마음에 들어한다면 임씨 가문의 고비를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서명훈은 이제서야 육진우가 왜 어젯밤 그더라 황인호를 찾으러 오라고 했던 건지 이해가 되었다.
여자 때문이었네...
그는 은근 궁금해졌다.
도성시에서 육진우한테 들러붙은 여자들만 해도 수천 명에 달했었는데 그때는 멍텅구리처럼 여자한테 전혀 관심이 없더니 지금은 이 여자를 위해서 그를 나서게 한 거잖아...
몇몇 사람들이 방에 들어오고 나자 황인호가 공손하게 말을 건넸다.
“서 대표님, 육신 그룹에서는 언제쯤 연회를 주최하나요? 저희도 들어갈 수 있어요?”
서명훈은 뜸을 들이고 있었다.
이번에 육신 그룹의 이름을 내걸고 나타나긴 했어도 솔직히 육신 그룹이 해성시에서 프로젝트를 시작해야 하는 건 사실이라 합작사를 찾아야 한다.
“아마 2주 뒤에 주최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요며칠 기사가 나올 거예요. 황 대표님은 해성시에서 유명 인사이신데 당연히 초청장을 보내드려야죠.”
황인호는 싱글벙글하며 답했다.
“육신 그룹하고 같이 일할 수 있게만 된다면 그건 제 복인 거죠. 서 대표님도 저를 많이 도와주시기 바래요. 혹여나 뭐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마음껏 저한테 얘기하셔도 돼요.”
육신 그룹!
도성시 최고의 재벌 가문!
육신 그룹하고 관계만 맺을 수 있다면 앞으로 기업의 길은 점점 더 넓어져 출세 걱정도 없다!
사실 육씨네가 해성시로 온다는 소문은 진작에 퍼졌었으나 책임자가 나타나지 않았으니 다들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던 상황이다.
그런데 서명훈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나자 행성시 각 기업의 대표님들은 서명훈하고의 만남을 성사시키기 위해 다들 경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에 육신 그룹의 집권자가 직접 해성시로 왔으니까 추후의 결책은 그분이 결정하실 거예요.”
느릿느릿 말을 내뱉고 있는 서명훈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임지연을 힐끗하고는 냉큼 시선을 거두었다.
“똑똑히 기억하세요. 저희 육 대표님이 신혼이라 자신의 아내를 끔찍이 사랑하고 있어요. 대표님한테 잘 보이고 싶다면 그분의 아내분한테부터 아부를 떨어보는 게 좋을 거예요.”
황인호는 조금 뜻밖이었다.
육씨네 집권자가 결혼을 했다는 건 성대한 일인데 소식 하나 들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언제 결혼하신 거예요?”
“며칠 전에요. 전해 들은 적 없어요? 대표님은 옆에 여자분을 둔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속전속결로 결혼을 한 걸 보면 그 여자한테 사랑이 깊다는 걸 의미하겠죠. 사모님한테 잘 보이게 되면 일이 술술 잘 풀릴 거예요.”
서명훈은 미소를 보였다.
“그럼 혹시 서 대표님은 사모님의 성함을 알고 있나요?”
황인호가 즉시 물었다.
“그거야 저는 모르죠. 여러분들의 눈치껏 잘 행동하시기 바래요.”
서명훈은 화제를 돌렸다.
“그 얘긴 그만하고 밥이나 먹죠. 정아 호텔의 주방장이 요리를 그렇게 잘한다면서요.”
임지연은 구석에 앉아 머리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식사가 시작되자 임건국은 그녀를 잡아당기며 재촉하고 있었다.
“얼른 가서 황 대표한테 술 따라야지.”
임지연이 꿈쩍도 하지 않자 임건국은 재차 협박을 했다.
“임지연! 할아버지 생각해!”
임지연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뭇사람들은 그녀한테 시선을 쏠리고 있었고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말을 건넸다.
“저... 저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요.”
말을 마치고 난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룸을 나왔다.
임건국은 화가 잔뜩 나 있었으나 다들 권력이 높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이다 보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임지연은 룸을 나오고 나서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방금 압박감만 맴도는 그 분위기로 인해 그녀는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고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었다.
임건국은 마치 그녀를 거래품으로 여기며 언제든 내놓을 수 있는 거래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세수를 하고 나서 창백해진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할아버지가 아직 병원에 있다...
다른 사람한테 연락을 해놓은 건 맞지만 할아버지를 옮기려면 가장 빨라도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 그 기간 동안은 임씨네 저택에서 임건국의 마음을 안정시켜야만 한다.
“안색이 왜 이렇게 나빠요? 무슨 일 있어요?”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본 임지연은 어리둥절해졌다.
육진우가 여긴 무슨 일이지?
임지연은 의아함을 거두고 궁금함을 물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정아 호텔은 해성시 가장 비싼 호텔인데다 VIP들만 들어올 수 있는 장소였다.
여기에 오는 사람들이라 하면 재벌이거나 유명 인사들인데 육진우는 어떻게 들어온 걸까?
육진우는 입꼬리를 올리고 되물었다.
“제가 어떻게 들어온 것 같은데요?”
임지연은 육진우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오늘은 검정색 긴팔에 검정색 바지를 맞춘 보통의 차림이긴 하나 귀티는 여전히 물씬 풍겨났다.
게다가 그의 직종을 떠올리고 나니 임지연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듯했다.
“혹시... 어느 재벌 사모님하고... 콜록콜록! 고객님하고 같이 들어온 거예요?”
임지연의 답에 얼굴의 웃음이 한층 더 짙어진 육진우는 해명하지 않고 되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동행까지 해야 되는 거였네요. 힘들겠어요.”
임지연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육진우는 무심하게 말을 건넸다.
“네, 이번 고객님은 200근이 넘는 사모님이에요.”
“콜록콜록!”
임지연은 그 말에 순간적으로 목이 메었다.
사레가 걸려 눈밑에 눈물이 고인 그녀는 잠시 후 숨을 고르고 나서 말을 이었다.
“돈벌이하느라... 고생이 많네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임지연의 모습에 우울했던 기분이 한결 나아진 육진우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요. 이제는 한 집안 가장이니 당연히 열심히 돈을 벌어야죠.”
임지연은 어색한 듯 코를 만지작거렸다.
육진우가 그녀를 위해 고생을 무릅쓰고 돈을 버는 줄로 여긴 것이다.
그녀는 진지하게 말을 내뱉었다.
“제가... 제가 육진우 씨가 하는 일들에 대해서 요해하는 게 별로 없어요. 하지만 건강에 주의하시고 과로하면 안 돼요. 그리고 우리 집안일들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미리 다른 병원에 다 연락을 해놨거든요. 다만 그 사람들이 이리로 오려면 시간이 좀 걸려요. 늦어도 일주일 내에는 해결이 될 거예요.”
“저 걱정하는 거예요?”
훤칠한 키를 구부리자 육진우의 자성을 띤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임지연은 놀란 토끼처럼 뒤로 물러섰다.
“네. 아무리 그래도 법적으로 제 남편인데 육진우 씨한테 무사했으면 좋겠어요.”
육진우는 몸을 곧게 펴고 장난을 멈추었다.
“모레 할머니가 해성시로 오는데 한번 만나줄 수 있어요? 시간 돼요?”
“몇 시에 가면 돼요?”
임지연은 침착해졌다.
그녀와 육진우는 각자 원하는 게 있어서 결혼한 터라 선을 넘는 일만 아니면 그녀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모레 저녁이요. 우리 집에서 할머니하고 같이 식사해요.”
육진우가 답했다.
“네, 시간 내서 가도록 할게요.”
임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선물은 제가 다 준비했으니까 임지연 씨는 오기만 하면 돼요.”
임지연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육진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곧장 룸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