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은비 너 사투리 억양이 전혀 없네? 공부도 꽤 잘한다고 했지? 반에서 몇 등이야?”
진영자는 돋보기를 위로 올리며 근엄한 자태로 그녀에게 물었다. 비록 연세가 70이 넘지만 전쟁터에서 피바다를 헤치고 살아남은 어르신인지라 목소리에 힘이 차 넘치고 눈빛도 매우 예리했다.
그녀 앞에서는 바로 본모습을 들켜버릴 것만 같은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원주인 소은비는 중학교 때 공부를 잘했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공부에 흥미를 잃고 성적도 일락 천장이 돼버렸다.
소은비가 한창 뭐라 대답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민준혁이 그녀의 전학 증명 서류를 건넸는데 그 위에는 소은비의 기말고사 각 과목 성적과 담임 선생님의 평가까지 적혀있었다.
진영자는 성적표를 건네받더니 혹여나 잘못 본 게 아닌지 제 눈을 의심하며 돋보기를 벗고 다시 한번 들여다봤다.
[수학:9, 화학:23, 국어:54, 영어:3.]
한편 평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소은비 학생은 학습에 대한 내면의식과 의욕이 부족하고 자기 통제력이 극도로 낮으며 시간관념이 없고 장난기가 심하여 집중력이 많이 떨어집니다. 지각 15번, 무단결석 5번이니 자퇴를 권고합니다.]
진영자는 다 본 후 민용수에게 성적표를 건넸다. 하늘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빡할 것 같지 않던 민용수는 성적표를 확인하더니 굳게 다문 입술이 살짝 떨렸다. 그는 곧장 성적표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됐어. 어차피 이리로 온 게 공부가 목적은 아니잖아. 성적은 그다지 중요치 않아. 나중에 고등학교를 순조롭게 졸업하기만 하면 돼.’
소은혜가 탁자 위에 놓인 성적표를 보더니 야유에 찬 표정으로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소은비가 아무리 집에 들어올 때부터 예를 지키고 인사를 공손하게 올렸어도 이 성적표 하나만으로 모든 게 수포가 될 것이다.
그녀는 가슴을 쭉 펴고 턱을 치키며 일부러 소은비를 위하는 척 입을 나불거렸다.
“할머니, 아저씨, 언니가 그때 몸이 불편해서 딱 한 번 수능을 망쳤어요. 평상시에는 나름 성적이 좋았거든요.”
소은혜의 말대로 원주인은 그때 확실히 몸이 불편했다. 실은 원주인이 맞선 상대를 뺏으려고 일부러 소은혜를 미친 소 발굽에 걷어차이게 한 바람에 어른들이 호되게 혼냈고 한바탕 두들겨 맞았더니 머리를 잘못 건드렸는지 줄곧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원주인 소은비는 가벼운 뇌진탕을 앓고 그날 기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하여 지금도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다. 소은비는 과연 어떻게 빨간 천을 소은혜의 등 뒤에 묶어뒀고 또 어떻게 소를 미치게 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고 본인이 호되게 맞은 기억만 파편처럼 남아있다.
진영자와 민용수는 상처를 입은 소은혜의 오른쪽 다리를 보더니 소은비가 몸이 불편한 이유를 바로 알아챘다. 그들은 자애로우면서도 안쓰러운 눈길로 소은혜를 쳐다봤다.
그야말로 착한 아이였다. 하마터면 언니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아직도 언니를 위해 선뜻 앞장서주다니.
“은혜 넌 네 언니랑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 것 같은데 왜 은비는 고등학교 2학년이고 넌 이제 막 중학교를 졸업했어?”
진영자의 엄숙한 눈빛이 조금은 부드럽게 변했다.
“집에 할 일도 많고 그때 아빠가 또 허리를 다치셔서 제가 2년 동안 휴학하고 집안 농사를 도왔어요.”
소은혜는 조신한 척, 철든 척을 하며 어르신께 답했다.
진영자와 민용수는 이 말을 듣더니 더욱 안쓰러운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옆에 있는 예쁘장하고 늘씬한 몸매의 소은비를 힐긋 바라봤다. 소은혜는 언니에 비해 까무잡잡하고 야윈 게 집에서 적잖게 고생한 티가 팍팍 났다.
정반대로 소은비는 집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집안일이고 뭐고 죄다 삐쩍 마른 소은혜에게 떠넘겼을 것이다.
순간 모두가 측은한 눈길로 소은혜를 쳐다봤다.
“2년이나 휴학했는데도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했어? 정말 대단해. 너무 똑똑한 거 아니야?”
진영자의 얼굴에 보기 드문 미소가 어렸다.
“그럼 졸업 성적은 전교에서 몇 등 했어?”
그 시대는 지금보다 공부가 훨씬 어려운 시절이었으니 전교에서 상위권에 드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고 웬만한 성적으론 실업 공고에 가도 공부가 따라가지 못했다.
“과찬이세요, 할머니. 그다지 잘하진 못했고 전교 3등으로 졸업했어요.”
소은혜는 입술을 앙다물고 있다가 일부러 겸손한 척하면서 대답했다. 허리는 어느샌가 빳빳하게 펴고 있었고 방금 들어왔을 때의 긴장감과 불안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되레 거만하고 거들먹거리는 눈빛으로 옆에 앉은 소은비를 흘겨볼 뿐이었다.
“2년을 휴학하고도 전교 3등으로 졸업했어? 너무 대단한데.”
민용수도 연신 칭찬을 남발했다.
두 자매 모두 훌륭했다. 한 명은 착하고 똑똑했고 다른 한 명은 대범하면서도 차분하게 대처하는 자세를 보였다. 어쨌거나 아직 소은비의 표현을 봐선 아들 준혁이가 전화상으로 말한 것과 너무 달랐고 거의 정반대라고 할 수도 있었다.
모든 게 소은비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그녀는 묵묵히 옆에 앉아 수건으로 얼굴과 목에 묻은 빗물을 닦으며 소은혜를 칭찬하는 할머니와 아저씨를 바라봤다. 더없이 맑은 눈동자를 깜빡이면서 두 분의 칭찬을 듣고 있는 그녀였다.
머리 위에 드리운 눈 부신 불빛이 이제 막 깨끗이 닦은 매끄러운 얼굴에 드리우니 은은한 빛이 감돌았고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청순함과 단아함을 내뿜었다.
그녀는 하얗고 나른한 두 손으로 수건을 반듯하게 접었다. 귀여우면서도 늘씬한 섬섬옥수를 쳐다보는 순간 민준혁은 곧바로 시선을 홱 돌렸다.
“할머니, 아빠, 저는 이만 부대에 돌아가 봐야 해요. 내일 은혜 데리고 병원 가서 다리 상처를 치료해야겠어요.”
말을 마친 민준혁은 늘씬한 다리로 위층에 올라가 물건을 챙겼다.
“은혜야, 이 캐리어는 네 개학 선물이야.”
다시 내려온 민준혁이 브랜드 로고가 박힌 딥 브라운 색상의 가죽 캐리어를 건넸는데 새것이라 포장도 정갈하게 되어있고 그 위에는 정교한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보통 시내에서 학교 다니는 학생들만 이런 고급 브랜드를 사용할 수 있다.
화들짝 놀란 소은혜는 입이 쩍 벌어지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모든 게 꿈만 같은 그녀였다.
“오빠, 아니에요. 이건 너무 값비싼 물건이라 받을 수 없어요.”
“너 나중에 학교 기숙사에서 지낼 텐데 그 짐보따리는 너무 불편해. 캐리어에 자물쇠도 있으니 귀중 물품은 안에 잠그고 써.”
민준혁은 소은비를 스쳐지나 소은혜에게 캐리어를 건넸다.
소은혜는 너무 귀한 선물인지라 몸 둘 바를 몰랐고 살짝 빨개진 얼굴로 민준혁을 쳐다볼 따름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소녀의 쑥스러움과 희열의 기색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은혜야, 부담 갖지 말고 얼른 받아. 이제 실업 공고에 다닐 테니 너희 오빠가 고생한 보람으로 선물 주는 거야. 이젠 여길 집이라고 생각하고 주말마다 돌아와서 지내.”
민용수는 아들 준혁이가 소은혜를 동생으로만 대하는 걸 너무 잘 알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 전혀 호감 가는 이성을 향한 애틋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호감이 갔더라면 캐리어만 선물한 게 아니라 아마 하나가 더 있었겠지...
또한 민용수도 이 두 사람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소씨 가문 두 자매가 집안에 들어온 후 소은비의 지적이면서도 참한 모습을 보게 되니 아들 준혁에게 꼭 지적인 집안의 딸아이를 소개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명은 차갑고 다른 한 명은 참하고 자상해야 환상의 조화를 이룰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