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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호되게 질책을 당한 한이경은 헤벌쭉 웃다가 금세 입을 다물고 민준혁이 몰고 온 차 안을 힐끔 살펴보았는데 안에 예쁜 여자가 또 한 명 앉아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사람을 잘못 짚은 걸 알아채고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방금 내린 그분이 단장님 맞선 상대이신 줄 알았습니다.” “정신 똑바로 안 차려? 아무 여자나 함부로 호칭하지 마! 은비 씨 데리고 얼른 가봐.” 민준혁이 엄하게 경고했다. “네.” 한이경은 허리를 곧게 펴고 분부에 나섰다. 다만 씁쓸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천사처럼 예쁜 소은비 씨가 왜 단장님의 맞선 상대가 아닌 걸까? 방금 차 안에 앉아있던 그 여자도 예쁘고 조신해 보이지만 단장님과 전혀 안 어울리고 오히려 여동생 같은 느낌이었다. 두 여자가 나란히 앞에 서 있다고 해도 한이경은 여전히 소은비를 민준혁의 맞선 상대로 여길 것이다. 그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난감한 표정으로 소은비에게 다가왔다. “죄송해요, 은비 씨. 저랑 함께 화장실 가시죠.” “괜찮아요. 제 동생 은혜가 그쪽 단장님 맞선 상대에요. 저는 그저 진안시에 가서 학교 다닐 예정이고요.” 소은비는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이에 한이경은 되레 더 난처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 상황이 너무 이상했다. 대부분 집안에서 맞선을 주선할 때 나이순으로 할 텐데 왜 이 집안은 동생이 먼저 맞선을 보는 걸까? 유일한 경우라면 소은비가 이미 남자친구가 있으니 민준혁도 하는 수 없이 소은혜와 맞선을 보는 것이다. 한이경은 단장님이 내심 유감스러웠다. “오빠... 저도 화장실 다녀오고 싶어요.” 소은혜는 그들에게 누가 진짜 사모님인지 알려주려고 이런 말을 내뱉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기차 안에도 화장실 있으니 이따가 거기로 가.” 민준혁은 시계를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소은혜가 다리가 불편하니 다녀오려면 시간이 빠듯할 듯싶었다. “오빠, 저 혼자 다녀올 수 있어요.” 사실 그녀는 오른쪽 다리가 흉터만 조금 남았을 뿐 진작 나아서 정상적으로 걸어 다닐 수 있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나중에 진안시에 가서 의사에게 보일 때 조만간 들통나게 되어 있다. “그래. 그럼 주빈이랑 함께 가.” 민준혁은 중요한 전화가 한 통 있어 그녀와 함께 가주지 못했다. 준혁 오빠가 함께 가줄 거라고 굳게 믿었던 소은혜는 기대에 찬 얼굴이 순간 확 가라앉았다. 다만 이젠 스스로라도 꼭 가야만 했다. 소은혜는 하는 수 없이 채주빈과 함께 다리를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향했다. 소은비가 볼일을 보고 나올 때 소은혜가 마침 다른 군인과 함께 느릿느릿 이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소은비는 일부러 못 본 척 고개를 푹 숙이고 옆으로 빨리 스쳐 지나갔다. 한이경도 그녀를 보더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네? 왜 단장님이랑 함께 안 왔지? 다리도 불편한데 말이야...’ 사모님이라는 호칭은 섣불리 부르지 말아야 할 듯싶었다. 두 사람은 어쩌면 아직 연인 사이로 발전한 게 아닐 테니까. 우우웅... 기차가 역에 들어오는 소리가 저 멀리서 울려 퍼졌다. 빨리 기차에 타려는 사람들은 부랴부랴 승강장으로 달려갔다. 누군가는 무거운 짐보따리를 메고 또 누군가는 아이들의 손을 꼭 잡은 채 짐을 들고 기차에 올라탔다. 밀짚모자를 쓴 노인 한 분이 짐보따리를 들고 성급하게 소은비의 옆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돌아서는 바람에 5킬로가 넘는 짐보따리가 그녀의 등에 와르르 쏟아졌다. 갑작스럽게 등 떠밀린 소은비는 몸이 앞으로 쏠렸고 무심코 바로 앞에 있는 민준혁을 붙잡았다. 그녀는 두 손을 허우적대다가 그만 민준혁의 벨트를 잡아버렸는데... 186의 훤칠한 키에 넓은 등판을 지닌 민준혁은 인파들 속에서 두 자매를 찾다가 무언가가 느닷없이 등에 확 부딪히고 가녀린 두 손이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모든 게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수년간 군부대에 몸을 담근 민준혁은 적잖게 당황한 눈치였다. 평상시에 여자와 대화를 나눌 기회도 적은데 언제 이토록 애틋한 스킨쉽을 해봤을까. 탄탄한 근육이 순식간에 튀어 오르고 온몸이 경직되어버린 민준혁이었다. 재빨리 머리를 돌려보니 소은비가 상큼한 얼굴로 그의 등에 꼭 달라붙어 있었다. 핑크빛 입술은 말랑말랑하기 그지없고 소녀 특유의 상쾌한 꽃향기가 그의 코를 찔렀다. 그 순간 민준혁은 호흡이 가빠지고 얼굴이 한없이 짙어졌다. 그는 섬뜩하리만큼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이 손 놔.” ‘이 여자가 벌써 나를 노릴 생각이었어? 아직 진안에 가지도 못했는데 사람들로 붐비는 차 안에서 대체 뭐 하는 짓이야?’ 하긴, 이 시대에 인파로 붐비는 곳에서 남녀가 꼭 붙어 있으면 품행에 심한 타격을 입기 마련이다. 그녀는 정말 망나니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소은비도 상대가 민준혁일 줄은 상상치도 못했다. 이 남자의 다리가 너무 길어서 처음엔 그만 허리인 줄 착각해버렸다. 그녀는 황급히 자세를 다잡았다. 한편 민준혁은 온몸이 경직된 채 뒤로 물러서며 그녀가 제대로 서 있는지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매정하게 손을 뿌리쳤다. “소은비, 자중해! 몹쓸 생각 따위 당장 집어치우라고!” 민준혁은 한없이 예리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쏘아붙였다. 소은비는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고 이때 한이경이 부축하러 오려고 했으나 갑자기 뛰어든 어린애에게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단장님은 여자분들한테도 예외 없이 훈계하는구나. 이러니까 부대에서 다들 검은 악마라고 부르는 거지.” “죄송해요, 준혁 씨. 절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소은비는 아픈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속절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게 고의가 아니라고?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남자 품에 덮치는 게 고의가 아니야? 뻔뻔스러워 정말.’ 소씨 가문에서는 대체 그녀를 어떻게 교육한 걸까? 분명 예쁘고 단아한 외모를 지녔는데 왜 꼭 이런 짓을 벌이는 걸까? 그는 문득 소은비를 진안시로 전학시킨 게 후회스러웠다. 이제 진안에 도착하거든 또 얼마나 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를지 짐작이 안 됐다. “닥쳐. 지금부터 나랑 안전거리 유지해. 감히 선 넘으면 그 즉시 전당 마을로 보내버릴 줄 알아.” 민준혁이 매섭게 경고했다. 싸늘한 표정에서 인간미라곤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소성주가 그의 아빠를 구해준 은혜만 아니었다면 지금 바로 소은비를 경찰서에 보내버렸을 것이다. “오빠, 화내지 말아요. 언니도 오빠가 너무 좋아서 그런 걸 거예요. 여기 사람 많으니 언니 그만 혼내고 이번 한 번만 용서해줘요. 네?” 그 시각 소은혜는 기차가 역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재빨리 돌아왔는데 마침 민준혁이 소은비를 밀치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곧이어 상처를 입은 오른쪽 다리를 질질 끌고 소은비 앞에 다가와 쪼그리고 앉더니 아주 착한 척, 소은비를 위하는 척하며 입을 나불거렸다. “언니, 내가 준혁 오빠랑 선 안 보면 될 거 아니야. 이렇게까지 스스로 누명을 씌울 필요가 있어? 언니가 준혁 오빠 만나. 내가 허락해줄게.” 민준혁이 비록 엄하게 혼내긴 했지만 일부러 목소리를 낮췄고 또한 주변의 떠들썩한 환경에 대부분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다. 그저 한 젊은 여자가 갑자기 군인을 와락 끌어안았고 그 군인이 곧바로 뿌리쳤다는 것만 알고 있다. 하지만 소은혜가 일부러 목청을 높이고 말하자 어리둥절하던 주위 사람들은 언니가 동생의 맞선 상대를 눈여겨보고 일부러 이런 저속한 방식으로 품에 안기며 결혼을 강요하는 줄로 여기게 되었다. 특히 상대는 군인이라 그녀가 다짜고짜 밀어붙이면 딱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쯧쯧, 예쁘장하게 생긴 처자가 어쩜 이렇게 뻔뻔스러워? 어떻게 제 동생 남자친구를 뺏을 생각을 다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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