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그녀는 초롱초롱한 두 눈을 깜빡인 후 얌전히 눈을 감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창밖의 햇살이 얼굴을 뜨겁게 내리쬐어 앵두 같은 촉촉한 입술만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녀는 그렇게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잠들었다.
처음 차에 타본 소은혜는 몹시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두 다리를 모으고 반듯하게 앉아 차 안을 살펴보았다. 모든 게 궁금했지만 흥분된 마음을 꾹 참고 얌전하게 뒷좌석에 앉아있기만 했다.
가끔 운전하는 민준혁을 힐긋 살피면서 심장이 저도 몰래 쿵쾅댔다.
민준혁처럼 키크고 잘생긴 남자가 언니에게 거절을 당하고 이제 곧 그녀의 맞선 상대가 될 걸 생각하니 입꼬리가 저도 몰래 위로 올라갔다.
소은비는 지금 이 오점을 남겨두고 있는 한 절대 그녀한테서 민준혁을 뺏어갈 수 없다.
차가 평온하게 흙길을 달렸다. 한 제빵점 앞을 지나갈 때 민준혁이 차를 세우고 가게로 들어갔다.
나올 때 그의 손에는 빨간색 봉투로 포장한 옛날식 생크림 케이크가 쥐어져 있었다.
“이게 바로 내가 편지에서 말했던 꽃무늬 크림 케이크야. 한번 먹어봐.”
민준혁은 작은 케이크를 뒷좌석에 앉은 소은혜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오빠.”
소은혜는 아직 케이크를 먹어보지 못했던 지라 잔뜩 흥분하며 대답했다.
곧이어 옆에 있는 소은비를 쳐다봤는데 깊이 잠든 것 같았다.
돼지도 아니고, 종일 잠만 자는 그녀였다.
“그럼 언니는...”
“너 먹이려고 샀어.”
민준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차에 시동을 걸고 기차역으로 출발했다.
소은혜는 신이 나서 또 한 번 야유에 찬 눈길로 소은비를 흘겨봤다. 원래 소은비가 깨나거든 먹으려 했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끝내 조심스럽게 투명 포장을 열고 플라스틱 포크로 생크림을 한술 떠먹었다. 이토록 달콤한 케이크는 난생처음 먹어보는 그녀였다.
“고마워요, 오빠. 케이크 너무 맛있어요.”
민준혁은 아무 말 없이 백미러로 맛있게 케이크를 먹는 소은혜와 그 옆에 여전히 수건을 두른 채 촉촉하고 빨간 입술을 앙다물고 있는 소은비를 쳐다봤다.
두 손은 줄곧 달걀을 담은 파란색 가방을 감싸고 있었는데 행여나 소은혜가 달걀을 뺏어갈까 꼭 잡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시선을 거두었다.
울퉁불퉁한 흙길을 지날 때 소은비의 얼굴을 가린 손수건이 떨어지고 그녀도 몸을 휘청거렸다.
눈을 뜨고 이제 막 허리 숙여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을 주우려 했는데 소은혜가 재빨리 두려운 표정으로 채 못 먹은 생크림 케이크를 건넸다.
이어서 소은비가 때리기라도 하듯 머리를 움츠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언니, 먹어. 화내지 말고.”
민준혁은 다시 시선을 올리고 백미러로 뒷좌석을 보더니 눈가에 싸늘한 한기가 감돌았다.
순간 차 안에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정적이 흐르고 무언의 압박감도 전해졌다.
만약 소은비가 이 인기 게시물에 타임슬립하지 않았다면 그녀조차 소은혜가 가엽고 안쓰러운 캐릭터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실체는 그 누구보다 가여운 척을 하고 은근 나쁜 수작을 부리는 여자였다.
주특기는 본인을 처참한 척, 연약한 척 연기하는 것이다.
원주인 소은비는 경쟁할 뜻도 없는데 소은혜가 항상 사람들 앞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두려움에 휩싸인 척 연기하고 있다. 그녀가 원하는 건 사람들이 원주인을 오해하고 그 속에서 동정을 유발하는 것이다.
한편 원주인은 또 직설적인 성격인지라 말로 해명이 안 되면 무력으로 소은혜를 제지하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원주인만 이기적이고 일방적이며 동생만 괴롭히는 악덕 언니 이미지로 낙인되었다.
“은혜야, 준혁 씨가 네 맞선 상대로서 맛있는 거 사주는 건 정상 아니야? 내가 왜 화내야 하는데?”
소은비가 맑은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의아한 듯 물었다.
이에 소은혜는 가슴이 움찔거렸다. 소은비가 이토록 차분하고 태연할 줄은 예상치 못했으니까.
‘이건 내 계획이랑 어긋나잖아. 네가 내 케이크 뺏어 먹었다고 오빠를 오해하게 해야 하는 건데...’
“그게... 난 그런 뜻이 아니라. 내가 이미 절반 먹었으니 남은 절반은 언니가 먹어.”
소은혜는 또다시 얌전한 척하며 그녀에게 케이크를 건넸다.
‘이러니까 최종 승자가 되는 거지. 연기 한 번 끝내주네!’
“이건 준혁 씨가 일부러 너 먹이려고 제빵점에 들러서 사 온 거잖아. 준혁 씨 마음을 저버리면 안 되지. 난 케이크 안 좋아하니까 너 먹어.”
소은비가 눈웃음을 짓자 두 볼에 보조개가 옴폭 파였다. 나긋나긋한 말투에선 그 어떤 적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허리를 숙이고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을 주워서 다시 얼굴을 덮을 때 백미러로 한창 자신을 쳐다보는 민준혁의 싸늘한 시선과 마주쳤다.
‘진안에 가면 더는 별 볼 일 없을 거야. 괜찮아.’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민준혁을 못 본 척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다. 창밖의 뜨거운 햇살을 가려야 하니까.
한편 그녀의 말을 들은 소은혜는 그제야 알아챘다. 소은비는 줄곧 안 자고 둘의 얘기를 엿듣고 있었다.
결국 소은혜는 더는 뭐라 말하지 못한 채 살짝 빨개진 얼굴로 생크림 케이크를 다시 가져갔다.
‘젠장, 강에 한 번 빠지더니 왜 갑자기 확 달라진 건데?’
소은혜는 이를 악물고 몰래 구시렁댔다.
곧이어 차가 기차역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이미 두 명의 군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은 군부대까지 병력 차량을 몰고 돌아가기 위해 온 현지 군인 채주빈이고, 다른 한 명은 민준혁을 따라 임무를 수행하러 온 수행원 한이경이었다.
소은비가 차에서 내리자 군인 두 명은 저도 몰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어쩐지 단장님이 그 먼 진안시에서 이 작은 마을까지 직접 임무를 수행하러 온다더라니, 온 김에 소개팅하기 위해서였다.
어제 오전에 임무를 수행하고 오후에 소개팅하러 가셨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돌아왔다고 하던데 군사기지로 돌아오자마자 부모님과 15분이나 통화를 했다고 들었다. 아마도 진안에 돌아가 결혼 신청을 하려고 그랬나 보다.
아니, 어쩌면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예식을 올릴 기세였다. 적어도 두 군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소은비는 검은색 생머리에 빨간 입술, 새하얀 피부와 날씬한 몸매를 지녔다. 청순하면서도 빼어난 미모가 화보 속의 여배우들보다 더 눈부시고 아름다웠다.
두 명의 군인은 앞으로 다가가 민준혁에게 경례하고 곧장 트렁크에서 소은비의 짐을 내렸다.
“저기 실례지만 혹시 화장실 어떻게 가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소은비가 차 앞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화장실 표시판이 좀처럼 안 보였다. 그녀는 마중 오는 군인에게 깍듯하게 물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수행원 한이경은 귀가 너무 간지러워 저도 몰래 귀를 긁적거렸다. 소은비의 목소리가 감미로워도 너무 감미로웠다.
이런 분이 민준혁 단장님과 결혼하면 나중에 단장님도 그들을 훈육할 때 조금 덜 사나워질 수 있으려나...
‘두 분이 어젯밤에 금방 만났으니 이런 좋은 기회를 당연히 단장님께 드려야지.’
한이경은 소은비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뒤 재빨리 다른 차량 앞으로 달려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단장님, 사모님께서 화장실 찾으시는데 함께 가주시는 거죠?”
순간 민준혁은 미간을 찌푸리고 반감에 쌓인 표정을 지으며 정색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누가 사모님이야? 대체 어떤 여자가 너더러 이렇게 부르라고 시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