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그녀는 더 이상 치열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이런 절호의 기회에 몇 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찾고 나중에 진안시로 호구도 옮겨서 집 살 때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동안 그녀는 열심히 돈을 모아 집을 몇 채 더 사놓고 나중에 집값이 대폭 상승할 때 거액의 퇴직금과 함께 집세까지 두둑하게 거둬들여 세계 일주를 하고 싶었다. 이것 참 생각만 해도 짜릿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평생 결혼하고 애 낳을 필요가 없다. 병들거나 죽어도 든든한 직장이 뒷받침해주고 있으니까.
민준혁은 차갑고 예리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가 방금 한 말을 전혀 안 믿는 눈치였다.
소은비가 다시 그와 만나가려 할 때부터 이 여자가 매우 위선적이고 권세를 따지는 인간이라는 걸 알아챘다.
이어서 친동생에게 저질렀던 악행과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 들은 일련의 극악무도한 짓까지 알게 되니 그녀에게 남은 건 혐오감뿐이었다.
“정말 진안에 가서 고등학교 다니고 싶은 거라면 내가 대신 전학 신청해 줄 수 있지만...”
그는 싸늘한 눈길로 소은비에게 경고장을 날렸다.
“다른 수작은 부릴 생각 마.”
“준혁아, 그게 대체 무슨 말이니? 너희 애초에 결혼할 사이였어. 너도 이젠 자그마치 장교인데 이렇게 무책임할 순 없지...”
김민숙이 분노 조로 쏘아붙였다.
“그래요 엄마, 준혁 씨 장교예요. 내가 이미 은혜 다리를 부러뜨렸으니 준혁 씨가 나랑 결혼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고요.”
소은비는 김민숙을 잡아당기며 더는 말하지 못 하게 말렸다.
김민숙의 성격상 여자는 글을 읽는 것보다 시집을 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만약 민준혁이 끝까지 소은비와 결혼하지 않으면 김민숙은 무조건 온 동네를 발칵 뒤집어놓을 것이다.
다만 소은비도 이 점은 너무 이상했다. 그 당시 원주인은 고의로 소은혜를 다치게 했는데 대체 왜 아무런 처벌도 안 받은 걸까?
김민숙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고 민준혁마저 의외라는 눈빛으로 소은비를 쳐다봤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가 제대하거나 직업을 바꾸지 않는 한 확실히 결혼 신청을 할 수가 없다.
“전당 마을을 떠나 진안시에 가서 고등학교 다니고 싶어요. 그렇게 되면 아무도 이 일을 모를 거잖아요. 나중에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붙으면 좋은 직장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소은비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어갔고 김민숙이 더 소란을 피울까 봐 거짓말까지 지어냈다.
“그때 되면 진안에서 훌륭한 남자친구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김민숙은 앞서 한 얘기는 전혀 듣는 척도 않았지만 이 말 만큼은 똑똑히 들었다. 소은비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는 분명 민준혁보다 훨씬 나은 결혼 상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김민숙은 그렇게 여기고 있다.
그녀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소성주에게도 얼른 허락하라고 부추겼다.
다만 민준혁은 눈치가 빨라 소은비의 말 속에 담긴 뜻을 바로 알아챘다.
‘역시 더 높은 데로 기어 올라가려는 거였어. 그럼 그렇지.’
이런 불순한 생각과 나쁜 품행을 지닌 여자를 진안에 데려가 학교를 보낸다면 다른 전도유망한 정직한 학생들까지 해칠 게 뻔했다.
“그럼 저는 이만 부대에 돌아가서 아빠랑 통화해볼게요. 일단 내일 소개서를 작성하거든 은비 데리고 진안시로 갈 수 있어요.”
말을 마친 민준혁이 자리를 떠나려 했다.
다만 마침 밥때라 손님인 그를 이대로 보낼 순 없었다. 김민숙은 기어코 남아서 저녁을 먹고 가라고 했다.
밥 먹을 때 그녀는 여전히 소은혜를 주방에 가둬두고 못 나오게 했고 소은비도 밥상 가까이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다.
소은혜는 문틈 사이로 민준혁의 훤칠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심장이 마구 쿵쾅대고 작은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이때 한 마을 친구 유지영이 소은혜를 걱정하며 부엌을 에돌아서 뒷방 창문 가까이 다가갔다.
“은혜야, 네 맞선남 키도 크고 잘생겼는데 설마 또 은비 언니가 뺏어가는 건 아니겠지? 그 언니 진짜 못됐어.”
“아니. 준혁 오빠는 우리 언니랑 결혼할 마음 없어.”
소은혜는 방금 문 뒤에 숨어서 민준혁이 했던 말을 들으며 마음이 너무 흐뭇했다.
혹여나 민준혁이 허락할까 봐, 또 혹은 소은비가 소란을 피울까 봐 은근 걱정했으니 말이다...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다친 다리를 어루만졌다. 만약 정말 이 결혼이 성사되면 그녀가 소 발굽에 치여서 상처를 입은 오른쪽 다리는 수포가 될 것이다.
“다행이다. 은비 언니는 이젠 시집가기 글렀네. 설사 간다고 해도 집이랑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야겠어.”
유지영은 소은혜 대신 너무 기뻐했다.
“이 일 아무한테도 알리지 마. 우리 가족들이 절대 딴 사람들한테 말하지 말랬어.”
소은혜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걱정 마. 입 꼭 닫고 있을게.”
유지영은 가슴팍을 두드리며 맹세하더니 곧바로 옆 마을 사촌오빠에게 알려줬다.
유지영의 사촌오빠 허강훈은 소은비의 중학교 동창인데 집안 인맥을 동원해 공장에 출근하게 되었고 마을에서 가장 먼저 자전거를 사게 된 사람이다. 그는 소은비를 무척 좋아했지만 키가 작은 탓에 소은비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와중에 이런 소식을 얻게 되니 다시 기회가 생긴 것만 같았다.
다음날 허강훈은 자전거를 반짝반짝 빛나게 닦아놓고 엄마와 함께 소씨 가문에 찾아왔다.
소은비와 정식으로 교제할 생각에 찾아왔지만 몇 마디 얘기도 채 나누지 못한 채 김민숙에게 가차 없이 쫓겨났다.
“엄마, 그냥 예물값 좀 주면 안 돼요? 나 진짜 은비랑 결혼하고 싶단 말이에요.”
허강훈이 가라앉은 기분으로 엄마에게 말했다.
“헌신짝 따위가 무슨 예물값을 바라고 있어? 잘 들어. 은비는 절대 시집 못 가. 그때 되면 소씨 가문에서 우리 집에 애원하러 올 거야. 결혼식 비용까지 전부 그 집에서 부담하겠다고 할걸.”
허강훈의 엄마는 마을에서 소문난 구두쇠라 일전 한 푼 내놓을 리가 없다. 오늘 여기까지 찾아온 것도 예물값을 무르기 위해서였다.
두 마을의 교차로에 도착했을 때 카키색 지프 한 대가 이리로 오고 있었는데 마침 진안시에서 온 그 장교였다. 김민숙은 소은비가 진안에 가서 고등학교에 다닐 거라고 했는데... 여기까지 생각한 허강훈 엄마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이건 절대 진안에 가서 고등학교에 다닐 기세가 아니었다. 민준혁 장교와 소성주가 이미 상의를 마치고 소은비를 진안에 데려가 다시 결혼 상대를 찾아줄 게 뻔했다.
허강훈 엄마는 재빨리 머리를 굴리더니 자전거를 끌고 민준혁 앞으로 다가갔다. 소은비를 호락호락하게 보내줄 그녀가 아니지. 한편 이제 막 차에서 내린 민준혁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기요, 혹시 장교님이 바로 은혜랑 선 본 사람이에요? 지금 은비랑 은혜를 데리고 진안시로 가는 건가요?”
민준혁은 차분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차 문을 닫았다.
“네, 그런데요?”
“어쩐지 오늘 소씨 가문에 찾아갔는데 은비가 한사코 결혼을 허락하지 않더라니. 진안에 가서 더 좋은 결혼 상대를 만나기 위해서였네요.”
허강훈 엄마는 일부러 눈물을 훔치는 척했다.
“장교님은 아마 모르실 거예요. 은비가 전에 우리 집 가정형편이 좋아서 몰래 우리 아들이랑 만났거든요. 우리 강훈이한테서 맛있는 것도 얻어먹고 돈도 엄청 많이 썼어요. 나중에 장교님을 만나더니 우리 강훈이는 나 몰라라 하는 거 있죠.”
“어제 은비한테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강훈이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아침 일찍 집까지 찾아와 결혼 얘기를 꺼내려 했는데 아예 문전박대를 당했지 뭐예요. 은비가 진안에 가서 고등학교 다니고 나중에 더 나은 결혼 상대를 만날 거라면서 우리 강훈이더러 그만 꿈 깨라네요.”
허강훈 엄마는 소은비를 헐뜯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녀가 명성을 잃고 더는 진안시에 갈 수 없게 만들려는 작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거액의 예물값을 아낄 수 있고 어쩌면 소씨 가문에서 되레 혼수를 더 푸짐하게 해올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