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안이서는 연준호가 준 집 열쇠와 혼인신고서를 함께 잘 보관해서 가방에 넣어뒀다. 이때 가게 인테리어 기사한테 전화가 왔는데 그녀더러 장식 재료를 사 오라고 했다.
“준호 씨, 저는 그럼 가게 일 봐야 해서 먼저 가볼게요.”
통화를 마친 후 그녀는 연준호에게 인사하고 곧장 지하철역으로 달려갔다.
연준호는 그녀를 실어다 주겠다고 말하려 했으나 너무 빨리 뛰어간 바람에 미처 입을 열 기회조차 없었다. 보아하니 그녀는 평상시에도 비교적 독립적인 성격이고 다른 사람에게 신세 지기 싫어하는 사람인 듯싶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 바쁜 하루를 보냈다. 안이서는 가게 장식 때문에 종일 바삐 돌아치다가 밤 열 시가 다 돼서야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늘 그랬듯 월세방 아래에 있는 쌀국수집에 들러 대충 끼니를 때우고 자신이 결혼한 사실을 까마득히 잊은 그녀였다.
한창 쌀국수를 먹고 있을 때 연준호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준호 씨...”
그녀는 전화를 받고 나서야 오전에 혼인신고한 사실이 떠올랐다.
‘어머! 내가 이렇게 큰일을 잊고 있었어?!’
안이서는 왠지 모르게 당혹감에 휩싸였다.
“어디야 지금?”
전화기 너머로 연준호의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그녀와 혼인신고한 날이기에 연준호는 어쩌다 야근을 포기하고 일찍 집에 돌아갔다.
그녀 홀로 집에 있을까 봐 뭐라도 좀 도와주려고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심지어 밤 열 시가 다 돼가도 이 여자가 도통 집에 돌아오질 않았다.
‘설마 결혼한 일 까먹은 건 아니겠지?’
연애도 못 해보고 바로 결혼한 안이서는 지금 자신에게 남편이 생겼다는 사실이 적응되지 않았다. 그래서 가게 문을 닫고 습관처럼 월세방에 돌아왔을 뿐 혼인신고를 까마득이 잊은 것이다.
“죄송해요, 제가...이제 막 가게 문 닫았어요. 지금 바로 돌아갈게요.”
그녀는 하마터면 말실수할 뻔했다. 괜히 연준호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재빨리 말을 바꿨다.
연준호도 바보가 아닌지라 그녀의 말투에 섞인 당황한 기색을 바로 눈치챘다. 아직 기혼자의 신분에 적응하지 못했고 남편인 그를 새까맣게 잊은 게 분명했다.
‘괜찮아, 아직 나이도 어리고 또 종일 바빴다잖아. 이해할 만 하지 뭐.’
연준호는 더 따져 묻지 않고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어디야 그래서?”
“월세방 근처에 있어요. 스쿠터 타고 반 시간이면 용인 하우스 도착할 거예요.”
안이서는 얼른 입을 닦고 남은 반 그릇의 쌀국수도 더 먹을 기분이 안 났다.
“일단 위치 보내고 짐 정리 다 해서 집 아래에서 기다려. 금방 갈게.”
연준호는 짤막한 한 마디에 세 가지 명령을 내리고 전화를 끊었다.
이토록 신속하고 결단력 있는 처사 방식을 보아하니 회사 상사로서 명령을 내리는 데 익숙해진 듯싶었다.
안이서는 속으로 몰래 짐작하고는 고분고분 위치를 보내주고는 부랴부랴 집에 가서 얼마 안 되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캐리어를 들고 내려온 지 얼마 안 돼 연준호의 차가 도착했다.
그가 SUV를 몰고 오니 차 트렁크에 공간이 넉넉하여 안이서의 귀여운 스쿠터까지 함께 실었다.
용인 하우스로 돌아가는 길에서 조수석에 앉은 그녀가 살짝 초조한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데리러 와줘서 고마워요. 제가 괜히 번거롭게 굴었네요.”
연준호는 전방 도로를 주시하며 열심히 운전하면서도 결국 예를 갖추어 대답했다.
“우린 부부이고 이건 당연한 일이야. 번거로울 거 없으니 너도 굳이 고맙다는 말로 서먹서먹하게 굴 필요 없어.”
연준호가 볼 때 이는 더없이 평범한 일이다. 연씨 가문이 비록 은성시 갑부 집안이긴 하나 이 집안 남자들은 결혼하면 집사람한테 일편단심이고 한없이 자상한 모습으로 바뀐다. 여태껏 그 누구도 가정을 배신하는 남자는 없었다.
다만 안이서의 생존 환경은 확연히 달랐다. 그녀의 엄마는 그녀를 출산한 뒤 의외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바로 이 때문에 아빠가 이전에 엄마한테 어떻게 대했는지 도통 알 길이 없다.
한편 안재원과 소현정은 하루가 멀다 하게 싸웠고 심지어 손찌검까지 해댔다. 안이서는 어릴 때 이 광경들을 고스란히 지켜봐 왔다.
이런 가정환경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안이서는 결혼에 대한 로망을 품어본 적이 없고 연준호와의 혼인신고도 마지못해 한 셈이다. 그쪽 사정만 해결되면 그녀는 언제든 이 남자와 이혼할 준비가 되어있다.
곧이어 연준호는 그녀를 싣고 용인 하우스에 도착했다. 그는 며칠 전에 이곳에서 아파트를 한 채 구입했는데 일부러 출퇴근 시간을 단축하려고 회사와 가까운 곳으로 정했다.
차고에서 안이서의 귀여운 스쿠터에 충전까지 해둔 후 두 사람은 곧장 고급 아파트 구역의 8동 맨 위층인 6층으로 올라갔다.
이곳은 한 층 한 세대의 아파트였다. 문 앞에서 연준호는 자상하게 먼저 안이서를 위해 지문을 입력해주었다.
“이러면 나중에 열쇠를 까먹고 못 챙겨도 들어올 수 있고 훨씬 편할 거야.”
“고마워요.”
안이서는 문득 이 남자가 보이는 것처럼 차가운 이미지가 아니라 꽤 다정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집 안에 들어선 후 연준호는 슬리퍼를 갈아신고 들어갔고 안이서는 문 앞에 서서 어쩔 바를 몰랐다.
그는 불편해하는 안이서를 보더니 선뜻 다가와 위로해주었다.
“여긴 이젠 네 집이기도 해.”
말을 마친 후 그녀의 캐리어를 들고 거실로 향했다. 괜히 제 자리에 서 있으면 그녀가 더 뻘쭘해 할까 봐.
그의 말을 들은 안이서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의도가 뭐든 간에 두 사람은 이미 결혼했고 이 결혼이 얼마나 유지될지는 몰라도 일단 지금 이곳은 그녀의 집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