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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제9장

방문이 열리자 박 사모님이 문어구에 서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방안에는 진아연이 무릎을 두 손으로 꼭 껴안은채 고개를 숙이고 벽에 기대어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녀는 망연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문쪽으로 돌렸다. "아, 아연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니?!" 박 사모님은 진아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아연아... 상태가 왜 이러니? 설마... 시준이가... 이렇게 만들었니?" 박 사모님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진아연은 며칠 전보다 많이 말라있었다. 얼굴에는 핏기가 조금도 없었고 입술은 수분 부족으로 메말라 있었다. 오랜만에 사람의 온기가 느껴져서 그런지 가슴속으로부터 뭔가 벅차올랐지만 소리를 낼 힘이 없었다. 이모님이 바로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가지고 와서 건넸다. "사모님... 어서 마시세요... 이제 박 사모님께서 오셨으니 다 괜찮으실 거예요. 얼른 음식을 가져다드릴게요..." 박 사모님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이게 다 무슨 일이니? 시준이가... 설마 아연이에게 밥을 주지 말라고 한 거야? 어쩐지... 아연이가 갑자기 너무 말랐다고 했어! ... 아연이를 굶겨 죽일 셈인 거야?!" 진아연의 모습은 박 사모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녀는 재빨리 거실로 나가 아들에게 말했다. "시준아. 아연이는 내가 어렵게 데려온 네 아내야. 근데... 네가 이렇게 아연이를 괴롭히면 엄마 마음은 어떻겠니?" "잘못을 했다면 벌을 받아야죠.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제가... 그녀를 제 집에 두지 않았을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함 그 자체였다. "이틀 굶은건 저 여자가 한 짓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 여자가 마음대로 집안을 돌아다녔고. 선까지 넘었는데 어떻게 그냥 둡니까?" "뭐라고? 아연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박 사모님이 알고 있는 진아연은 착하고 눈치빠른 아이여서 절대 어리석은 행동으로 박시준을 화나게 만들고 그럴 사람이 아니였다. 박시준은 어머니의 말에 아무 대답 없이 가만히 있었다. "... 시준아. 그래. 결혼도 그렇고 아이도 그렇고 낳고 싶지 않다는 거 안다... 하지만 엄마로서 그런 널 그냥 둘 수 없어... 아연이는 착한 아이야. 네가 아연이를 좋아하라는 말은 아니야. 그저 너희 둘... 명의상 부부라도 좋으니 그냥 함께 있어주면 좋겠어!" 박 사모님은 이 말을 마치며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흘렸다. 말을 하면 할수록 숨이 가빠져 왔다. 박시준은 어머니에게 변명을 하려 했지만 어머니의 상태가 다시 안 좋아진 것을 느끼고 바로 경호원에게 어머니를 부축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 시준아,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한... 아연이를 내보낼 생각은 하지 말거라! 이혼을 하지 말라는 건 아니야... 아니면 네가 좋아하는 여자를 내앞에 데려오든가...엄마는 네가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꼴을 두고 볼수 없어! " 박 사모님은 부축을 받고 소파에 앉았지만 머리는 점점 더 어지러워졌다. 이 말을 끝으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30초 후, 박 사모님의 고개는 천천히 한쪽으로 기울어졌고 끝내는 소파에 털썩하고 쓰러졌다. 오늘 아침에 퇴원한 박 사모님은 다시 급하게 병원에 실려갔다. 박시준은 어머니의 태도가 이렇게 강경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화를 낼 줄은 예상도 못 했다. 진아연과의 이혼 문제는 빨리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진아연이라서 싫은 게 아니라 다른 여자라도 똑같이 대했을 것이다. 그래서 진아연과 이혼을 하기 위해 굳이 다른 여자를 찾을 필요는 없었다. ...... 방 안에서 진아연은 우유를 마신 뒤,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거실에서 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다 들었다. 박시준은 별말을 하진 않았지만 사모님은 그때문에 열받아서 쓰러지셨다. 이모님은 그녀에게 얼른 죽을 만들어 가져왔고 빗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빗겨주었다. "사모님, 들으셨죠? 대표님께서도 사모님을 바로 내쫓으실 수는 없으실 거예요." 이모님은 그녀를 위로했다. 진아연은 이틀 동안 방 안에 갇혀있으면서 생각들을 정리했다. "전... 이혼할...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이제는... 그가 싫다고 하더라도. 제가... 반드시 이혼할 거예요." 마음 같아서는 일분일초라도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박시준! 악마 같은 사람!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이모님은 당황해하며 "사모님, 우선 먼저 뭐라도 먹고 이야기해요. 제가 나가서 상황을 보고 올게요." 이모님이 방을 나가려던 찰나, 거실쪽에서 경호원과 함께 이쪽으로 오고있는 박시준의 모습이 보였다. "대, 대표님. 사모님께서 지금... 상태가 좋지 않으세요." 박시준은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보는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모님이 자리를 비키자, 경호원들이 휄체어에 앉은 그를 모시고 방문어구까지 갔다. 진아연은 고개를 들어 올리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둘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불꽃이 타닥-하고 튀었다. "좋아요! 이혼해요! 박시준씨!" 진아연은 죽 그릇을 내려놓고 자신의 캐리어를 끌고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이미 그녀는 언제든 떠날수 있도록 만단의 준비를 했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여자랑 결혼하세요!" 그녀는 흥분하며 말했다. 박시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이 태도는 지금 네가 잘못한 게 없다?" "아니요! 있죠! 잘못한 거라고는 제가 당신 컴퓨터를 사용해도 괜찮다고 생각한 거죠!"진아연은 거친 숨을 고르며 "그래서 지금 이렇게 벌받았잖아요! 그럼 된 거 아닌가요?! 이혼 합의서는 준비되어 있겠죠? 없다면 제가 당장 가서..." 갑자기 자신에게 함부로 말하는 그녀를 보면서 박시준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내가 언제 벌이 끝났다고 했지?" 진아연은 마치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느낌이었다. "이렇게 내 곁에 있는 게 고통스럽다면. 그래. 계속 박 사모님 소리 듣고 살게 해주지!" 박시준은 그녀와 상의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명령조로 이야기했다. "아, 물론 이혼은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는 이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진아연은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가 이혼하자고 하면 하는 거고, 안한다면 아닌 게 되는 거야? 설마 그녀 혼자 이혼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러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면서 땅이 거꾸로 움직이는 거 같았다. 그녀는 바로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오랜만에 침대에 누워서 그런지 흥분된 감정은 점차 진정이 되었다. 아무리 박시준이라 할지라도 지금은 자신과 이혼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의 어머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녀 역시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준 사모님을 위해서조금 기다려 주는것도 괜찮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다. 일주일 후. 그녀의 몸이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 아침 식사 후, 재검사를 하기 위해 혼자 병원으로 향했다. 어떤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녀의 아이가... 사라졌을 거란 예감 말이다. 박시준 때문에 이틀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스트레스 역시 엄청나게 받았다. 분명... 아이 역시 극심한 스트레스와 영양 부족으로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의사는 그녀에게 다시 초음파 검사를 하자고 했다. 검사를 받는 진아연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 아기는... 잘못된 거죠...?" 의사: "왜 그렇게 말씀하시죠?" "사실... 요즘 극심한 스트레스에...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질 못 했거든요... 그래서 아기도..." 의사: "아, 이틀 정도 안 먹는다고 해서 큰 문제될건 없습니다. 사실 입덧이 심한 경우에는 한 달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할 수도 있거든요." 진아연은 긴장했다. "그럼 아기는..." 의사: "축하드려요! 자궁에 아기집 두 개가 보이네요. 쌍둥이입니다." 제9장 이전 검사에서 아기집이 두 개까지 보이진 않았다. 불과 일주일 만에 다른 한 아이까지 세상에 나오고자 한다. 진아연은 초음파 사진을 들고 병원 복도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의사는 그녀에게 쌍둥이를 임신할 확률은 매우 낮다고 말했다. 그리고 만약 낙태를 할 경우에는 앞으로 절대 쌍둥이를 가지긴 힘들 거라 말했다. 진아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모든 것이 박 씨 가문 주치의의 걸작이다. 그들은 수정관 임신 시, 쌍둥이를 가질 수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었다. 아마도... 그들에게 있어서, 그녀는 단순히 가문의 혈통을 이어줄 도구에 불과했을 것이다. 지난주에 출혈이 있었고 그녀는 생리가 왔다고 주치의에게 말했었다. 아마 주치의는 임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박시준이 깨어난 뒤, 이혼까지 말이 나왔으니 주치의가 그녀를 찾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이제 아이의 생사는 그녀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병원에 1시간 정도 앉아 있었고... 어느 순간, 가방 속의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자리에 일어나 병원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가며 전화를 받았다. "아연아...! 네 아버지가...! 어서 빨리 아버지 집으로 오렴!" 수화기 건너편의 어머니의 목소리는 많이 갈라져 있었다. 진아연은 순간 멈칫했다. 아빠가... 위독하시다고? 이렇게 갑자기? 그녀의 아버지는 회사 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시는 바람에 그녀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근데... 아버지 상태가 이렇게 심각할 줄은 전혀 몰랐다. 안 그래도 복잡해진 진아연의 마음은 더욱더 혼란스러워 졌다. 그녀와 아버지의 관계는 좋지 못했다. 다른 여자와 불륜을 저지른 아버지를 영원히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아버지가 쓰러져 많이 위중한 상태라고 하니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 아버지의 집에 도착했고, 거실은 난장판이었다. 장희원이 그녀를 데리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녀의 아버지 진준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딸 진아연이 들어오자 그는 힘겹게 눈을 뜨며 천천히 그녀를 향해 팔을 뻗었다. "아빠... 이렇게 아프면서 왜 병원에 안 가는 거야?" 진아연은 힘겹게 뻗어있는 아버지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의 두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왕은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말은 쉽지! 우리가 지금 병원에 입원시킬 돈이 어딨니?!" 진아연은 그런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 당신. 날 박 씨 집안에 팔아넘기면서 돈 많이 받았잖아? 왜 아빠를 치료하지 않는 건데?!" 왕은지는 입꼬리를 올리며 "그 돈은 빚 갚는 데 사용해야지! 네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 아니? 진아연. 넌 내가 그 돈을 꿀꺽했다고 생각하나 본데! 네 아버지 병은 이미 가망이 없어! 그러니깐 그냥 보내드리는 게 맞아!" 왕은지는 그 말을 끝으로 침실을 나가버렸다. 그래도 여동생 진희연은 자리에 그대로 남았다. 과거가 어떻게 되었든 그녀는 진준의 피가 흐르는 친딸이었고, 아버지로서 그는 그녀를 항상 아끼고 사랑해 준 것은 사실이였다. 이렇게 아버지를 잃고 싶지 않은건 진희연도 마찬가지였다. "아빠... 엄마 말은 너무 개의치 마세요. 치료를 안 하는 게 아니라... 돈이 없어서 잠시 못하는 거니깐." 진희연 역시 침대 옆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아빠... 빨리 일어나야지..." 진준은 자신의 딸 진희연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하였다. 눈물을 머금은 두 눈은 진아연을 바라보며 힘겹게 입을 열어 말했다. "아연... 우리 예쁜 딸... 아빠가 미안... 하다... 네 엄마한테도... 미... 안해. 다음 생에... 다 갚으... 마..."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있던 아버지의 큰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그리고 흐느낌 소리가 온 집안을 울려퍼졌다. 진아연은 심장이 뜯겨져 나가는 듯했다. 그녀의 세계는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달라졌다. 결혼을 했고, 아이를 가지게 되었으며...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분명 아직 그녀는 어린데,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아기에 불과한데, 세상은 그녀를 벼랑끝까지 몰고가 숨통을 조여오고 있다. 장례식 날. 하늘이 마치 그녀의 마음을 아는 듯 계속 비를 내렸다. 파산 위기의 집안이라 장례식장에 찾아오는 조문객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장례식이 끝난 뒤, 계모인 왕은지는 자신의 친구들을 불러 호텔로 가버렸다. 순식간에 조문객들은 빠져나갔다. 묘지에는 장희원과 진아연 두 사람만 남았다. 회색빛 하늘처럼 둘의 마음은 무거웠다. "엄마. 아직도 아빠를 용서 못 하겠어?" 진아연은 씁쓸한 눈빛으로 아버지의 묘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장희원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당연히 용서 못 하지. 이렇게... 죽어도 용서 못 해." 그런 엄마를 보며 진아연은 말했다. "근데... 왜 그렇게 울어?" 장희원은 깊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사랑했으니깐 . 아연아. 사람의 감정은 매우 복잡한 거란다. 사랑도 미움이고, 미움도 사랑이란다. 참 모순적이지." 그날 저녁. 진아연은 지친 몸을 이끌고 박시준이 있는 별장으로 들어갔다.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고 날짜를 보니 3일이나 지나 있었다. 지난 3일 동안 그녀는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에게 따로 연락이 오진 않았다. 그녀 역시 일부러 따로 말하지는 않았다. 박시준과 그녀의 관계는 얼음장보다 더 차가운 관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정원 문을 열고 들어서자 별장 불이 밝게 빛나고 있었고 거실에 사람들이 많이 와있었다. 모두 고급스러운 옷차림에 한 손에는 다들 와인잔을 들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신과 너무 다른 즐거운 모습에 그녀는 잠시 주춤했다. "사모님!" 이모님이 머뭇거리는 그녀를 보고 바로 반겼다. 며칠 사이 그녀의 표정은 너무나도 메말라있었다. 거실의 분위기와 너무나도 다른 그녀의 초췌한 모습에 이모님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다가왔다. "비가 와요. 어서 들어오세요!" 이모님은 그녀의 팔을 붙잡고 거실로 들어왔다. 진아연은 검은색 트렌치코트에 가냘픈 발목에는 검은색 플렛 슈즈를 신고 있었다. 그녀 역시 평소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으며 어딘가 모르게 차가워 보였다. 이모님은 그녀를 위해 분홍색 슬리퍼 한 컬레를 가져왔다. 무심코 슬리퍼로 갈아 신은 그녀는 거실을 쳐다보았다. 박시준의 손님들은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는 것처럼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눈빛은 대담하다 못해 무례했다. 진아연은 거실 중간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있는 박시준을 당당하게 쳐다봤다.. 그의 손가락에는 담배 한 개비가 들려 있었고, 담배 연기 사이로 보이는 그의 차가운 얼굴 역시 연기처럼 사라질듯 위험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옆으로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여자는 긴 흑발에 몸매가 드러나는 타이트한 흰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으며, 화려한 화장이 잘 어울리는 미인이었다. 여자의 상반신은 거의 박시준에게 기대다 싶이 있었고, 그녀의 손에도 얇은 담배 한 개비가 들려있었다. 한눈에 봐도 그녀와 박시준은 특별한 관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진아연은 그 여자에게 시선이 잠깐 머물렀지만 바로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거뒀다. "당신이 진아연?" 같은 여자가 봐도 너무 아름다운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 황홀하게 진아연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음, 사모님의 안목은 역시 다르네. 생긴 것도 나쁘진 않고. 다만... 어려. 아, 내 말은 나이가 아니라... 몸매가..." 진아연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네. 그쪽은 참 아름다우세요. 몸매도 얼굴도 저보다 다 나으세요... 그래서 언제 박시준 씨와 결혼하실 건가요?" 아무 감정 없이 내뱉은 그녀의 한 마디가 상대방을 오히려 자극했다. "진아연! 너무 어려서 그런가? 상대를 봐가면서 덤벼야지! 내가 시준 씨랑 몇 년을 함께한 사이인지 알아? 지금 뭔가 착각하나 본데! 네가 시준 씨의 아내라고 하더라도 나한테 안돼! 지금 내가 네 뺨을 때리더라도 그는 눈 하나 깜빡 안 할걸!" 그러면서 여자는 팔을 들었다. 그때 '쨍그랑!' 하며 술병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진아연이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고급 와인 한 병을 집어 들고 테이블로 내리쳐 버린 것이다. 새빨간 액체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빨간 와인이 카펫 위로 흘러내렸다. 진아연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한 손에는 깨진 술병을 들고 그 여자에게 겨누었다. "한대 치겠다? 그래! 해봐! 내 몸에 손대기만 해봐! 가만있지 않을 테니깐!" 그리고 술병을 들고있는 자세로 여자를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충격에 빠져버렸다. 소문에는 소심하고 내성적이라고 했는데... 이 정도면 미친 여자가 아닌가! 박시준은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보며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독기가 한껏 올라와 있는 진아연의 작은 얼굴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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