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한 달 후.
차수현은 병실 문 앞에 앉아 손에 쥔 병원 비를 확인하며 멍하니 넋 놓고 말았다.
그날 호텔에서 끔찍했던 일 때문에 다시는 출근하지 않았다. 그날 밤의 악몽이 그녀에겐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 일로 갑자기 수입이 끊기자 안 그래도 힘들었던 생활이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었다.
차수현은 잠시 넋 놓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지금 넋 놓을 시간이 없었다. 얼른 새로운 직장을 찾아야 한다.
병원 입구까지 걸어갔을 때 낯익은 실루엣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다름 아닌 그녀의 아빠 차한명이었다.
차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꽉 쥐었다. 엄마가 아플 때 차수현은 아빠를 찾아가 애원해봤지만 정작 아빠라는 사람은 그녀를 집에서 내쫓아버렸다.
그때 차한명의 매정한 모습이 아직도 차수현의 머릿속에 생생했다. 그는 오늘 절대 아내와 딸이 걱정되어 온 게 아니었다.
“여긴 어쩐 일이시죠, 차한명 씨?”
차수현은 앞으로 나서며 차한명을 가로막았다. 지금 엄마의 건강이 좋지 않아 불필요한 사람이 방해하는 걸 원치 않았다.
차수현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차한명은 낯빛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는 오늘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며 화를 꾹 참았다.
“수현아, 아빠가 좋은 소식 가져왔어. 네 선 자리를 하나 알아봤는데 상대는 온씨 집안의 아들이야. 그 집안 재벌 가문이잖아. 게다가 셋째 아들은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대…….”
차한명은 과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한편 차수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말을 아예 안 믿었다.
“과연 그렇게 좋은 혼사가 나한테 생길까요?”
그녀는 다른 건 몰라도 제 처지만큼은 너무 잘 알고 있다. 이런 혼사가 그녀에게 생길 리는 없었다.
차한명도 살짝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온씨 일가의 아들은 워낙 출중하여 많은 여자들의 로망이었다. 단지 이 모든 건 그가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의 일이었다.
보름 전 온은수는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하여 목숨을 겨우 건졌지만 식물인간이 돼버렸다.
의사는 그가 설사 깨어난다 해도 평생 시체처럼 침대에 누워있을 거라고 했다.
하여 온씨 일가에서는 아들의 액운을 뗄 겸 결혼식을 치러주기로 했다. 그들은 수 차례 알아보고 고른 끝에 결국 차씨 일가로 찾아왔다.
차한명은 늘 재벌가와의 결혼을 발판으로 삼아 가업을 키우려 했지만 막상 이뤄지니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
작은딸 차예진은 식물인간에게 시집가서 평생 과부처럼 살아야 한다니 대성통곡하며 식음을 전폐했다.
차한명은 작은딸 차예진을 애지중지 키웠는데 어찌 그 고생을 시키겠는가.
하여 그는 진작 집에서 내쫓은 차수현을 떠올리곤 쪼르르 달려왔다. 어차피 온씨 일가에서도 몇 번째 딸이라고 콕 집어 말하지 않았으니까.
차한명의 난감한 표정을 본 차수현은 그의 속내를 빤히 알아채곤 곧바로 자리를 떠나려 했다.
이에 차한명이 그녀를 덥석 잡아당겼다.
“그 집 아들에게, 조금 문제가 생긴 건 사실이야. 하지만 너 걔랑 결혼하면 절대 섭섭지 않게 해줄 거야. 네 엄마를 생각해봐. 계속 치료를 한다 해도 얼마 버티지 못할 거야. 네가 일단 결혼하겠다고 대답만 하면 지금 바로 모든 치료 비용을 지불해줄게. 결혼할지 말지 잘 생각해봐.”
치료비라는 말에 차수현은 걸음을 멈췄다.
그해 차한명이 내연녀를 집에 들이고 그녀와 엄마를 내쫓은 이후로 두 모녀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힘겹게 버텨왔다.
이 세상 모든 걸 잃을 수 있어도 엄마만은 꼭 지키고 싶었다.
차수현은 이를 악물고 차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말했다.
“온씨 일가의 아들이 대체 어떻게 됐는데요? 나한테 잠시 숨길 순 있어도 평생 숨길 순 없잖아요. 똑바로 말해봐요 그러니까.”
차수현은 결코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차한명도 계속 숨기다가 도리어 그녀가 도망갈까 봐 사실대로 말했다.
“그 집 아들 지금 식물인간이 됐대. 너 결혼하면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옆에서 잘 보살펴주기만 하면 돼.”
그의 말을 들은 차수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아빠가 같잖고 어처구니가 없어보였다. 그 말인 즉슨 애지중지 키운 딸 차예진을 식물인간에게 시집 보내기는 아까워 그녀를 찾아온 것이었다.
차수현에게 또 다른 선택지가 있을까…….
병상에서 날로 수척해지는 엄마를 생각하며 그녀는 한참을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할게요 그 결혼.”
며칠 뒤 차수현은 가족들과 함께 온씨 일가로 갔다.
갑작스럽게 정해진 혼사이기도 하고 또한 온은수가 이런 상황에 부닥쳤으니 결혼식을 너무 떠들썩하게 만들지 않았다.
밖에서 잠시 기다린 후 집사가 그녀를 데리고 거실로 들어갔다.
차수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백발의 어르신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연세가 많으시지만 매우 정정하고 위엄 있어보였다..
차수현은 얼른 온회장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이를 본 온씨 일가의 온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얘야, 내가 많이 무서워 보이니? 이래 보여도 널 잡아먹진 않아.”
온회장의 말장난에 차수현은 문득 오래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떠올라 마음이 조금은 안정되었다.
온회장은 긴장이 풀린 그녀를 데리고 온은수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커다란 침대에 누워있는 한 남자가 차수현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온회장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 남자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