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속죄

일을 다시 맡기로 한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빨리 돈을 벌어야 하니까. 비록 수술 후 몸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머리는 멀쩡했다. 상황이나 물을 겸 조윤지에게 전화를 걸자, 그녀는 울먹이며 말했다. “팀장님, 왜 이제야 전화했어요. 팀장님이 저를 버린 줄 알았다고요.” 조윤지는 작년에 채용한 인턴이다. 후에 정직원이 된 그녀는 나의 비서가 되었다. 성격이 조금 튀기는 했지만,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지루한 직장 생활을 잘 견뎌냈다. 디자인 작업은 종종 혼자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 일이 그녀의 적성에 딱 맞다는 말이다. 회사를 떠날 때, 나는 누군가에게 그녀를 맡겼다. 하지만 지금 보니 상황이 그다지 좋은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전에 진행했던 강성 그룹과의 협력 계획서와 설계도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조윤지는 약간 망설이며 말했다. “팀장님 이 프로젝트에서 손 뗀 거 아니에요? 내부 서류는 제가 달라고 해도 안 줄 것 같은데요.” “배 대표님 지시라고 해요. 그리고 인사팀에는 제가 자택 근무 중이라고 전해줘요. 윤지 씨는 제 비서로 복귀하고요.” 일을 다시 시작하면 비서가 필요했다. 전처럼 혼자서 일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나는 계속 일해야 했다. 그래야 생명을 연장할 돈이 생기니 말이다. 잠시 후 병실에 도착한 조윤지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팀장님... 암 때문에... 입원한 거 사실이에요?” 나는 약간 힘이 빠진 채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서류 이리 줘요. 그리고 수술은 잘 끝났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 당분간은 죽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당분간일 뿐이었다. 나는 내 상태가 언제든 나빠질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벌어야 했다. 조윤지는 눈물을 머금은 채 서류를 건네줬다. 동시에 노트북도 함께 내밀었다. “노트북 없을까 봐 제 걸 가져왔어요. 근데 이 상태로 어떻게 일하려고 그래요? 대표님 진짜 너무하네요.” 그녀는 울먹이며 배진욱을 비난했다. 배진욱은 모든 일을 제쳐 두고 유시은과 데이트하고 있었다. 유시은의 SNS에는 매일 두 사람이 놀면서 찍은 사진이 올라왔다. “와이프가 병원에 있는데 애인이랑 여행 중이라니요. 남자는 정말 믿을 게 못 돼요!”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펜으로 그녀의 머리를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모든 남자가 다 그런 건 아니야. 난 배진욱만 나쁜 놈이라고 생각해.” 조윤지는 잠깐 울먹이다가 과일 사러 나갔다. 다시 돌아왔을 때는 얼굴에 미소가 띠어 있었다. 그러나 나를 바라볼 때는 항상 주저하는 표정을 지었다. “윤지 씨, 사과 그만 깎아요. 그러다가 씨만 남겠어요.” 조윤지는 이제야 사과를 힐끗 보더니 부끄러운 듯 웃으며 한입 베어 물었다. “이건 연습용이에요. 다시 깎아드릴게요. 근데... 팀장님은 화 안 나세요? 대표님이랑 이혼하려는 거죠?” 나는 펜을 멈췄다. 조윤지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이성적으로는 나도 이혼을 원했다. 이혼하면 위자료도 많이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난 그렇게 많이 바라지는 않고 병원비만 낼 수 있으면 되었다. 하지만 감정적으로는 이혼하고 싶지 않았다. 배진욱이 아무리 못된 짓을 해도 나는 그를 좋아했다. 나의 마음속에는 오직 배진욱 한 사람뿐이었다. 비록 그는 몰라주지만 말이다. 그 와중에 지금 내 상태가 떠오르자 쓴웃음이 나왔다. 이런 몸으로 그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한다고 해도 그는 듣지 않을 것이다. 나는 수정한 서류를 조윤지에게 건네줬다. 그리고 돌아가서 반드시 이대로 디자인을 수정하라고 당부했다. “강성 그룹의 프로젝트는 윗선에서 문제를 발견한 것 같아요. 우리도 대충하면 안 돼요. 제가 지금은 디자인 작업을 할 수 없는 상태라, 윤지 씨한테 부탁해야 할 것 같네요. 제 사무실 아직 비어 있죠? 그곳으로 가서 조용히 일해요. 대신 제가 입원했다는 사실은 아무한테도 알리지 마요.” 조윤지는 서류를 꽉 쥐며 말했다. “대표님한테도 말하지 말까요? 대표님은 아직 모르는 거죠?” “알아요. 그러니까 굳이 말할 필요 없어요.” 나는 무표정하게 노트북을 닫았다. 내가 암으로 입원했다고 말한들, 그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더 이상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 조윤지는 이대로 떠나기 싫은지 병실에 반 시간이나 넘게 머물렀다. 간호사가 와서야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떠났다. 하지만 떠나기 전, 그녀는 다시 돌아와서 핸드폰을 내밀었다. “팀장님은 신경 안 쓰시겠지만, 저는 답답해서 못 살겠어요. 팀장님은 이러고 있는데, 어떻게 유시은 씨한테 아파트를 사줄 수가 있어요? 이거 최소 400억은 할 거예요.” 그녀의 핸드폰에는 유시은이 올린 사진이 보였다. 정말 아늑한 복층 오피스텔이었다. 인테리어의 상태로 봐서 최근 구매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사진 위에는 ‘우리의 아늑한 보금자리’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사진의 구석에는 배진욱의 옆모습도 찍혀 있었다. “빨리 돌아가요. 지금은 일이 더 중요해요.” 나는 무기력하게 누웠다. 가슴은 또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400억이라... 배진욱 통도 크네. 그 정도로 사랑한다는 말인가?’ 나는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월세방에서 살았다. 그 생각에 나는 눈물이 났다. 한때 부귀영화를 누리던 강씨 가문의 사모님은 결국 초라한 모습으로 작은 아파트에서 쓸쓸히 죽어갔다. 그 방에 있는 것이라고는 침대밖에 없었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이전에 살던 저택을 다시 한번 보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돈이 없었다. 그때 나는 배진욱에게 부탁했다. 부부의 정을 봐서 돈 좀 빌려 달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너랑 네 어머니는 내 돈을 쓸 자격이 없어. 멀쩡히 살아 있는 것으로도 고마운 줄 알아. 넌 네가 저지른 죗값을 치러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