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내숭
나는 일을 시작한 이후로 기운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가장 중요한 건 드디어 월급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제 재무팀에서 이례적으로 한 달 치 기본 월급을 지급해 줬다. 400만 원도 나에게는 큰돈이었다.
왜 일 한지 3일 만에 한 달 치 월급을 받았는지는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어차피 배진욱에게 이 정도 돈은 별거 아니니까.
나는 그중 200만 원을 고채영에게 이체했다. 매일 두 사람의 영양식을 준비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고채영의 월급은 적지 않았다. 그래도 외할머니에 이어 친구까지 보살필 의무는 없었기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돈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병실에 와서 나를 혼내기까지 했다.
“내 도시락을 고작 200만 원에 먹겠다고? 어림도 없지! 주겠으면 최소 천만 원은 있어야 해! 그 돈으로는 어림도 없어!”
나는 도시락을 안고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채영아, 나 다시 일하기 시작했어. 월급도 받았고.”
“멍청하게 웃지 말고 밥이나 먹어. 먹어야 힘을 낼 거 아니야. 너 진짜 답답해 죽겠어.”
그녀는 화난 표정으로 해삼 두 조각을 내 밥그릇에 넣어주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리며 몰래 눈물을 닦았다.
나는 해삼을 크게 한 입 먹으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그래도 슬퍼진 이유 중 10%는 밥이 맛없는 이유가 아닐까? 해삼이 아까울 솜씨였다.
배부르게 먹고 나서, 우리는 다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내가 다시 디자인 작업을 하는 것을 발견한 그녀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너 스트레스 받으면 안 된다면서? 그냥 푹 쉬는 게 어때? 배진욱 걔는 신경 쓰지 말자.”
배진욱의 이름이 나오자 우리는 동시에 침묵에 잠겼다. 그는 내 인생의 금기이자 피할 수 없는 존재였다.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손을 흔들며 말했다.
“일해야 마음이 편해. 마침 돈도 필요하던 참이고. 뭘 하든 가만히 누워 있는 것보다는 낫지. 너도 알잖아. 내가 할 수 있는 게 디자인밖에 없다는 거. 언젠가 내가 죽더라도 내가 디자인한 건물은 남아 있을 거로 생각하니 자랑스러운데?”
“그딴소리 하지 마!”
고채영은 미신을 믿었다. 병실에서 죽는다는 말이 나오면 그녀가 나보다 더 불안해했다.
“너 좀 더 많이 먹여야겠어. 살이 쪄야 면역력도 좋아지니까. 내일도 해삼 만들어줄게. 집에 가서도 꼭 챙겨 먹어. 나 없다고 대충 먹으면 혼나!”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돈 계산을 하고 있었다.
해삼은 너무 비싸다. 단백질 보충이라면 계란과 우유가 더 저렴하고 실속 있는 선택일 것이다.
다행히도 이제 월급을 받았으니 먹고사는 걱정은 덜었다.
아마도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나는 꽤 빨리 회복했다. 퇴원하기 전에 디자인 수정도 무사히 마쳤다.
조윤지는 병원으로 달려와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팀장님 정말 대단해요! 수정한 버전 한 번에 통과했어요! 팀장님은 모를 거예요. 저희는 한참 고생했는데도 통과 안 됐거든요. 다들 팀장님이 돌아와서 리드해주길 기다리고 있어요. 꼭 빨리 나으셔야 해요.”
그녀는 재잘거리며 모두가 나를 그리워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게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직원들에게 나는 재앙과도 같은 존재다. 공과 사를 구별하지 않는 배진욱이 나를 괴롭히는 것처럼 내 직원들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나는 직원들을 위해 떠난 것도 있었다. 애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우선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하다.
“다행이네요. 큰 프로젝트라 걱정했는데.”
나는 마지막 보너스를 계산해 보기 시작했다. 아마 반년 약값으로는 충분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나는 기분이 더 좋아졌다. 내 생명이 반년은 더 연장된 것 같았다.
“근데 그쪽에서 자꾸 회의하자고 해요. 팀장님이랑 만나서 얘기하고 싶대요.”
조윤지는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가 왜 퇴근 후 바로 병원에 달려왔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는 나였고, 당연히 내가 나서서 대화를 주도해야 했다. 다른 직원은 프로젝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나는 시간을 계산해 보고 3일 후 미팅을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3일이라는 시간이 회사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겠지만, 나에게는 매우 중요한 시간이었다.
나는 퇴원을 해야 하고, 집에서 잠시 휴식도 취해야 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마루도 보고 싶었다. 한참 떨어져 있자 그리운 마음이 들었다.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간호사가 내게 검사 결과를 보여주었다. 잘 회복하는 중이라고 설명해 주면서 말이다.
그러나 새벽녘, 배진욱의 전화가 내 잠을 방해했다. 아무리 진동 모드라고 해도 잠이 깨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서둘러 병실에서 나와 복도 끝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너 미팅 3일 후로 잡았더라?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몰라? 바로 미팅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왜 자꾸 미련하게 구는 거야, 강희주! 네가 하는 일 없이 노는 거 내가 모르는 줄 알지? 바쁜 척은 당장 그만둬!”
배진욱의 비난을 들으며 내 마음속에는 비웃음만 가득했다. 그는 이 프로젝트가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협력사의 전화를 무시했다.
나는 전화를 창턱에 내려놓고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병원 주변은 참 싸늘했다. 가로등이 비치고 있었지만 여전히 쓸쓸하게 느껴졌다.
1분이 지나서야 그는 내가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을 눈치챘다.
“강희주, 너 듣고 있어?”
“넌 아직도 인하에서 놀고 있어?”
나는 핸드폰을 들고 감정 없이 물었다.
전화 건너편에서는 배진욱의 대답 대신 유시은의 해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욱 씨, 이거 봐요, 저 게를 잡았어요!”
두 사람은 이 새벽에 바닷가로 놀러 간 모양이었다. 참 역겹게도 낭만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