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장 네가 자리를 지켜야 해

사실 지금 당장 아이를 가지려는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가족을 잃고 나니 배진욱이 그때 느꼈던 감정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배진욱에게는 그래도 자신을 친자식처럼 여기는 할머니가 있었지만 나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나만의 아이가 생긴다면 그곳이 곧 내 집이 될 것이다. 해외에서 시험관 시술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과 정자은행이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다시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남자가 없다고 아이를 가질 수 없는가? 난 원하면 가질 것이고 원하지 않으면 가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배진욱을 잘 도와주며 내 건강을 잘 챙기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조사하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배진욱은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직접 요리를 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일찍 돌아왔어?” “서류 가지러 왔어. 네가 집에 없길래 또 아프다고 했던 것도 생각나서 밥 해주려고 했지.” 문 앞에 놓인 배진욱의 운동화를 보고 나는 아침에 그가 장을 보러 간 것임을 알아챘다. 나는 병원에 가는 것에만 신경을 썼기 때문에 이런 세세한 부분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디 갔었어? 몸 안 좋다면서.” 그는 내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제 이미 할 말을 다 했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 뭔가 더 묻고 싶어 하는 듯한 배진욱의 표정에 나는 급히 화제를 돌렸다. “네가 회사에 없으면 배진수 씨가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할아버지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건지 모르겠어. 너희 두 사람을 서로 경쟁하게 만들고 싶으신 건가?’ “그리고 신현 그룹 프로젝트도 배진수 씨가 끼어들려고 했어. 내가 막아내긴 했지만 언제 또 시도할지 몰라.” 유시은이 회사에 있으면 나에게 불편함을 주겠지만 배진수는 다르다. 배성후가 그를 회사에 보낸 것은 마치 전쟁 선포나 다름없었다. 그들 사이에 어떤 거래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배진수의 의도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은 확실했다. 업무 이야기가 나오자 배진욱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