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입금
우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체결했다. 배진욱이 필요한 건 나고, 내가 필요한 건 돈이니까.
나는 매달 4000만 원의 용돈을 받기로 했다. 만약 모자라면 언제든지 더 달라고 할 수 있었다.
배진욱은 나를 돈에 미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과 헤어지고 재벌 2세를 따라 스턴국에 갔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재벌 2세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나를 된장녀라고 단정 지었다.
결혼한 다음 나는 돈을 달라는 말을 별로 하지 않았다. 물론 4000만 원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암을 재발하지 않게 하려면 비싼 약을 매일 같이 써야 하기 때문이다. 정기 검진도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었다.
오늘은 두 번째로 돈 달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었다. 그때의 배진욱은 두말없이 2억 원을 입금해 줬다.
하지만 이번에 그는 말없이 유시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기만 했다. 그는 세상 다정한 말들로 그녀를 위로해 주느라, 나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유시은은 드디어 진정하고 울음을 멈췄다. 그제야 배진욱도 비로소 머리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돈 받고 싶으면 무릎 꿇고 사과해. 너 때문에 시은이가 다쳤어. 사과 없이 넘어갈 생각하지 마.”
유시은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러고는 배진욱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니에요. 저 별로 안 다쳤어요. 사모님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닐 거예요.”
“그래도 사과해야 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뿐이야. 시은아, 무서워하지 마.”
배진욱은 유시은을 안아서 소파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수표를 꺼내 숫자를 적었다.
“무릎 꿇고 사과하면 10억을 줄게.”
나는 그 수표를 묵묵히 바라봤다.
배진욱은 셀 수 없이 많은 여자를 집에 데려와서 나를 모욕했다. 하지만 그건 다 집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집에서 무슨 일이 있든 남들이 보기에 난 항상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무실이다. 그는 사무실 한복판, 모든 직원이 보는 앞에서 돈으로 나를 모욕했다. 내가 급한 일이 아니면 절대 돈 달라고 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말이다.
그는 나의 자존심을 철저히 짓밟았다. 내가 모든 사람이 보는 데서 개처럼 벌벌 기어야 만족할 모습이었다.
나는 한동안 제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직원들은 나를 바라보며 자기들끼리 수군댔다. 무시도 있고 동정도 있었다.
유시은은 도발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머릿속에는 사랑받지 못하는 쪽이 내연녀라는 말이 떠올랐다.
나는 가슴을 꾹 눌렀다. 심하게 아팠다. 암도 이처럼 아프지는 않았다.
“됐어.”
나는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않고 사무실에서 나왔다. 배진욱은 나를 미워하다 못해 증오한다. 나를 괴롭히는 것도 당연했다.
그는 인격적인 모욕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내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주지 않았다. 내가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게 퍽 즐거워 보였다.
집에 돌아갔을 때 난 탈진하기 직전에 놓였다. 피곤한데도 통증 때문에 잠들기는 어려웠다.
뼈에 사무치는 통증이 나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그 와중에 어머니가 얼마나 험하게 돌아가셨는지 기억나서 어쩔 수 없이 수면제 두 알을 먹었다.
이때 의사가 보낸 메시지에 핸드폰이 울렸다.
[강희주 씨, 다음 주 월요일로 수술 일정 잡을 수 있어요. 시간 되실 때 수술비 납부 부탁드릴게요.]
나는 짧은 메시지를 반복해서 확인했다. 입금이 되었다는 은행 알림은 없었다. 아무래도 배진욱은 돈을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답장이 없자, 의사는 또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먼저 예약금만 내셔도 돼요. 그래야 수술 시간을 확정할 수 있어서요.]
나는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아무 말도 보내지 못했다.
돈이 없는데 어떻게 수술을 받는단 말인가?
나는 침대에 누워서 생각을 비웠다. 정 안되면 내일 드레스룸 유리를 깨부숴서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가방이라도 팔 생각으로 말이다.
지금은 일단 휴식이 필요했다. 안 그러면 수술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난 꿈을 꾸었다. 우리 집안이 망하기 전, 나는 재벌가 딸이고 배진욱은 한낱 고아이던 시절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배진욱의 후원자였다. 그렇게 나도 배진욱과 만나게 되었다. 그가 장학금을 받을 자격이 없을 때는 내가 아버지를 설득해서 받게 했다.
나중에 먼저 좋아하게 된 사람도 역시 나였다. 배진욱은 수도 없이 나를 거절했고 한결같이 차가운 태도로 대했다.
내가 배진욱이 아르바이트하는 술집에서 양아치들한테 둘러싸였을 때, 그는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러줬다.
“강희주, 나 여기 있어!”
그날 배진욱은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맞았다. 그런데도 나를 지켜주려고 했다.
병원에서 나는 그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누가 와도 손을 놓지 않고 그의 몸에 매달려 있었다. 혹시라도 그가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까 봐서 말이다.
“나 오늘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네가 책임져!”
배진욱은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우리는 정식으로 만나게 되었다.
사람들은 우리의 만남을 좋게 보지 않았다. 학교에는 이상한 소문도 많이 돌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3년이나 함께 했다.
대학 졸업 직전, 배진욱은 직접 개발한 자식 같은 프로그램을 팔았다. 오직 나의 생일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서 말이다.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받은 순간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6개월이나 걸려서 만든 프로그램을 왜 팔았냐고 한참 아쉬워했다. 그때도 배진욱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너한테 최고의 선물을 주고 싶었어.”
띠링.
나는 핸드폰 알림을 듣고 눈을 번쩍 떴다. 2000만 원이 입금되었다는 알림이었다.
시름을 놓은 나는 일단 의사에게 연락했다.
[네, 내일 병원에 가서 납부할게요.]
나에게도 드디어 돈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