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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강수지는 이변섭과 말이 통하지 않는 것 같아 아예 고개를 돌렸다. 조각 같은 얼굴을 하고서 말을 이따위로 하다니. “따라와.” 이변섭이 말했다. 강수지는 내키지 않았지만 안방 앞까지 갔다. 이불을 펴려던 순간, 이변섭은 강수지의 허리를 감쌌다. 그는 강수지를 벽에 몰아세웠다. “4000만 내가 줄게. 그러니까 내 와이프 역할을 해.” 이변섭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 진심이에요?” “왜? 돈만 받고 일은 하기 싫어? 응?” 강수지는 긴장한 듯 손바닥을 문지르며 말했다. “변섭 씨는 제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 거잖아요.” “그렇게 생각해? 그럼 한번 해봐?” 이변섭의 손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이변섭 씨...... 나는 당신 원수의 딸이잖아요. 할 수 있겠어요?” 그 말에 분위기는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강수지는 이런 식으로라도 이변섭을 자극해서 신변의 안전을 지키고 싶었다. “그래, 생각나게 해줘서 고맙네.” 이변섭은 강수지의 뒤통수를 한 손으로 부여잡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이유로 그냥 넘어갈 생각은 하지 마!” “4000만 원은...... 제가 갚을 거예요.” “나를 즐겁게 해봐. 그러면 그 돈은 안 갚아도 돼.” 강수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너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네가 내 손아귀에 넘어온 그날부터 너는 선택권을 잃었어. 알겠어?” 이변섭이 말했다. 강수지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이변섭이 자기를 즐겁게 해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말이다. 여자가 남자를 즐겁게 해준다는 것. “왜? 얼른 안 하고 뭐 해?” 강수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유미나한테 가면 되잖아요.” “아까워서 아직은 그렇게 못 하지.” 이변섭은 강수지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콧날로 강수지의 콧등을 건드렸다. “당연히 미나 씨는 신혼 첫날밤으로 남겨둬야지....... 너는 그냥 함부로 해도 되는 존재야!” 이변섭의 사랑을 독차지한 유미나는 영원히 아무것도 겁낼 것이 없겠지만 강수지는 자존심마저 없었다. 이변섭은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강수지는 오늘 밤 절대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마음을 먹은 듯 눈을 질끈 감고 이변섭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강수지의 몸은 세게 튕겨 나갔다. 이변섭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울렸다. “역시 원하고 있었군. 정말 추하네, 강수지!” 강수지의 등은 침대 모서리에 세게 부딪혔다. 너무나도 아팠지만 강수지는 오히려 홀가분했다. ‘너무 좋아! 이변섭 씨가 드디어 나를 귀찮아하기 시작한 것 같네!’ 파르르 떨리는 강수지의 눈초리와 조금 붉게 물든 뺨을 보고 있으니 이변섭은 몸이 달아올랐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강수지를 괴롭히려다가 언젠간 자기가 말려들 것 같았다. 어쨌든 이변섭도 지극히 정상적인 남자였으니까. 스포츠카에 올라탄 이변섭은 윌리엄에게 연락했다. “선생님이 주셨던 약 말입니다. 혹시 부작용 같은 건 없습니까?” “조금 있긴 한데......” “똑바로 얘기해주세요.” “대표님, 약에는 최음제 성분이 조금 들어있습니다.” 이변섭은 정색하며 물었다. “그런 얘기는 왜 진작에 안 한 겁니까?” “정상적인 현상입니다. 대표님은 젊으시니 한창 혈기 왕성할 때이기도 하니까요.” 윌리엄은 말을 이어갔다. “시간 내서 검진 한번 받아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아무래도 약했던 정자 활성이 전보다 많이 좋아진 것 같네요.” 이변섭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세게 엑셀을 밟자 스포츠카는 거대한 굉음을 내며 제경채를 벗어났다. 펍. VIP 테이블에서 이진섭은 술을 쉴새없이 마시고 있었다. 최지호는 하품하며 말했다. “아니, 결혼도 한 사람이 야밤에 술 마시러 다녀? 와이프가 뭐라 안 해? 겁도 없네.” “닥쳐.”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잖아.” 이변섭은 냉랭하게 말했다. “나와 걔 사이엔 감정이 없어.” “홧김에 얘기하지 마. 난 다 알아. 네 눈빛은 거짓말을 안 하거든. 변섭아, 이 세상엔 말이야. 사랑과 기침은 숨길 수 없다잖냐.” ‘사랑? 내가 강수지를 사랑한다고? 당황스럽네.’ “너 지금 미친 소리 하는 것 같아.” 이변섭은 잔을 세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혼 서류에 도장까지 찍었어. 때가 되면 법원에 다녀오기만 하면 돼.” 최지호는 호의적으로 이변섭에게 말했다. “지금 찢어버려도 돼. 안 늦었어.” “너를 찢어버리고 싶은데?” 최지호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계속해서 마셔라. 난 춤이나 추러 갈 거야.” 말을 마친 최지호는 사람들 틈에 섞여 환상적인 몸매의 여자들과 몸을 밀착하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변섭은 짜증 난다는 듯 타이를 풀어헤쳤다. 이곳에 있을지언정 유미나에게 찾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변섭은 유미나와 그날 밤의 여자가 다르다고 느껴졌다. 이튿날, 강수지는 병원의 연락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서울대병원입니다. 지난번 검진 결과가 나왔으니 한번 들리세요.” “알겠습니다.” 간호사가 강수지의 이름을 불렀고 강수지는 검진 결과서를 받을 수 있었다. 결과서를 펼쳐 결과서에 적힌 내용을 확인한 강수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녀는 결과서를 여러 번 반복해서 확인했다. 하지만 자기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임신 4주.” 강수지는 임신했다. 강수지는 그날 밤, 낯선 남자랑 하룻밤을 보낸 일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 남자의 아이라는 말이야?’ 하지만 강수지는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어떡하지?’ 강수지는 당황스러워 정신이 없었다. 만약 이변섭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강수지는 이변섭이 얼마나 분노할지 상상조차 들지 않았다. ‘그럼 아이를 지워야 하나?’ 하지만 임신중절 수술은 몸에도 해롭고 돈도 들뿐만 아니라 몸조리 기간이 필요했다. 지금의 강수지에겐 그럴 만한 여건이 없었다. 게다가 살아있는 생명을 차마 함부로 대할 순 없었다. 아이가 태어난다면 이 세상엔 강수지와 이어진 핏줄이 하나 더 생기는 셈이었다. ‘아이를 지킬까?’ 강수지는 자기 목숨도 제대로 지키기 어려웠다. 아이를 키울 수나 있을까? “아가야, 타이밍이 좋지 않을 때 찾아왔구나......” 강수지는 미간을 찌푸리고 슬픔에 잠긴 채 아랫배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엄마는 어떡하면 좋을까?” 강수지는 무너질 것 같았고 머릿속도 복잡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걷다가 사람들과 부딪치기까지 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녀는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유미나는 강수지를 발견했다. “어머, 저 사람 강수지 아니야?” 유미나는 어딘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카운터로 다가가 물었다. “저 강수지라는 분, 어디 아파요?” “죄송하지만 환자 개인 정보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간호사가 답했다. 유미나는 웃으며 말했다. “걱정돼서 그래요, 좀 부탁해요.” 그녀는 말을 이어가며 슬쩍 돈을 찔러넣어 줬다. 간호사는 소곤거렸다. “임신하셨어요, 4 주 되셨고요.” 유미나는 사색이 되었다. 강수지가 임신한 아이는 이변섭의 아이라는 것을 유미나는 알고 있었다. 병원을 나서자마자 강수지는 이변섭의 연락을 받게 되었다. “어디야? 지금 당장 튀어와!” “네.” 지금까지 술을 마시다 집에 간 이변섭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성질부렸다. 한순간 강수지 때문에 술을 진창 마셨다는 생각에 기분이 언짢아졌다. ‘내가 강수지를 건드리든 말든, 뭐가 됐든 다 상관없잖아!’ 이변섭은 기분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거실에 들어선 강수지는 짙은 술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아, 어젯밤에 술 마시러 갔던 거였어요?” 이변섭은 손가락을 까닥하면서 강수지를 불렀다. “이리 와.” 강수지는 고분고분 이변섭에게로 다갔다. 이변섭은 강수지를 와락 안았다. “그래, 나 취했어. 아직 술도 안 깼고!” “그럼 해장국 끓여줄게요.” 이변섭은 강수지 위에 올라탔다. “내가 왜 너 때문에 술을 마셔야 해? 왜 너를 위해 남자의 본능까지 억눌러야 해? 네가 그럴 자격이나 돼? 강수지, 나 지금 당장 너를 가질 거야. 그러면 불면증도 나아지겠지!” 이변섭의 힘은 어마어마했다. 강수지는 애써 반항했다. 임신 초반이었기에 그녀는 이변섭이 뜻대로 하도록 둘 수 없었다. “이변섭 씨, 술 먹고 이게 무슨 난리에요......” “덜 고통스럽고 싶으면 가만히 있어!” 버둥거리는 와중에 강수지의 가방에 있던 임신 소견서가 떨어져나왔다. 강수지는 깜짝 놀랐다. ‘망했다! 찢어버리는 걸 깜빡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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