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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이변섭의 진지한 얼굴을 보며 강수지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내가 거짓말하겠습니까?” 이변섭이 반문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당황한 강수지는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무리 몽유병이 있다고 해도 이변섭의 침대에 올라가다니, 이변섭이 그녀를 바닥에 내팽개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다만 이변섭은 간밤 아예 눈치를 못 챘던 것일까? “꾸물대지 말고 빨리 나가요.” 이변섭의 짜증 어린 말에 그녀는 생각을 멈추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두어 걸음을 옮기는데 머리가 지끈거리며 어질어질했다. 목도 바싹 마르고 아팠고. 어젯밤 물을 맞아서 감기에 걸린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우선 감옥에 다녀와야 했고 이변섭에게 반차를 내야 했다. 아니면 그는 그녀를 찾지 못하고 또 한바탕 화를 낼 테니까. 문제는... 무슨 이유를 지어내야 하지? 강수지가 골똘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이변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원에 가서 진찰해요. 괜히 나한테 옮기지 말고.” “네!” 강수지가 기쁘게 대답했다. 강수지는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마침 걸려버린 감기가 이토록 반갑기는 처음이었다. 제경채를 떠나 그녀는 먼저 감옥으로 향했다. 강호철은 전보다 많이 정신이 들어 보였지만 상처는 여전히 심각했다.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할 수 없었고 매일 약을 갈아줘야 했다. “수지야, 괜히 나 때문에 네가 힘들어지는구나...” 강호철이 말을 이었다. “만약 우리가 부녀관계를 끊는다면 이변섭이 너를 용서하지 않겠니?” “아빠, 아빠는 영원히 내 아빠야.” “죽을 생각도 했다. 그럼 우리에 대한 이변섭의 원한이 조금은 누그러들지 않을까 하고.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죽으면 너와 네 엄마를 더욱 힘들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강수지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이곳에 더 머무를 만큼 시간이 여유롭지 못했기에 2천만 원의 치료비를 지불한 뒤 나머지 2천만 원은 그들의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귀찮게 해서 미안해요.” 강수지가 말했다. “저희 아빠 잘 돌봐주세요.” 수수방관하면서 유미나가 나쁜 짓을 저지르도록 가만히 내버려 둔 자들이었지만 강수지는 이를 악물고서라도 이들을 그녀의 편에 끌어들여야 했다. 언젠가는, 그녀도 강해질 날이 있을 것이다! 감옥을 나온 그녀는 뒤늦게 병원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강수지 씨?” “네.” “어디가 불편하세요?” 의사가 기계처럼 물었다. “감기에 걸린 것 같아요. 목이 마르고 가렵고 또 아파요. 콧물도 좀 나고요.” “열은요?” “열은 없어요.” 강수지가 이마의 온도를 체크하며 대답했다. “최근 다른 증상은 없었어요?” 약을 처방하려던 의사가 무심코 물었다. 그녀는 잠시 기억을 되새기다가 대답했다. “어... 지난번 밤에 해삼 갈비탕을 마셨는데 너무 속이 울렁거려서 다 토한 적이 있어요.” “남자 친구 있어요?” “저...” 강수지가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대답했다. “저 결혼했어요.” 그러나 이변섭은 한 번도 그녀를 터치한 적이 없었다. 그날 밤이 전부였다... 의사는 말없이 한 무더기의 진단서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다음 환자분 들어오세요.” 진단서를 뒤적거리던 강수지는 혈액검사에, 산부인과에 관한 검사도 있는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사 선생님, 혹시 잘못 주신 거 아니에요?” “전 그저 감기일 뿐인데 왜 피를 뽑...” “의사 말 안 들을 거면 병원엔 왜 오신 겁니까?” “저 돈 없어요.” 강수지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변섭 씨가 이미 결제하셨어요.” 좋아. 정 그렇다면 안 하긴 아까우니까. 어차피 그는 돈이 너무 많아서 다 쓰지도 못할 텐데! 검사를 마치고 반 시간 정도 더 기다려야 결과가 나왔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때 인내심 거지 이변섭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간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온 겁니까? 병원에서 죽기라도 했어요?” 강수지는 감옥에 다녀오느라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을 알고 다급히 대답했다. “지금 가고 있어요.” “빨리 와요!” 그녀는 검사 결과를 기다릴 겨를도 없이 부랴부랴 이 씨 그룹으로 향했다. 그녀는 주얼리 부서에 금방 들어온 직원이었기에 할 일이 엄청 많았고 밤늦게까지 야근해서야 일을 다 완성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 나와 걷고 있는데 길가에 버려진 빈 페트병이 눈에 띄었다. 강수지는 빠르게 걸어가 페트병을 허리를 굽혀 주웠다. 그때 반질반질한 구두 한 켤레가 그녀의 손 가까이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수지야, 네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난 감히 상상도 안 돼...” 박태오가 가슴 아픈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 “너를 구원해 줄 영웅이 될 수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너를 갖고 논 쓰레기가 되어있더라.” “비켜요.” 강수지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박태오 씨, 길 막지 말고 비켜요.” 옛날 같았으면 이런 말에 가슴 깊이 감동을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이천만 원 앞에 힘없이 무너지는 그녀에게 사랑은 사치였다. “네 과거를 조사했어. 두 페이지밖에 안 되는 자료를 얼마나 오래 봤는지 몰라...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 마음이 아프더라.” 박태오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이미 지난 일이에요. 이제 와서 가식 떨 필요 없어요.” 강수지는 여전히 차가웠다. “아니야. 만회할 수 있어!” “하. 만회?” “이변섭 씨랑 맞설 수 있어요? 아버지한테도 감히 반항도 못하면서!” 그녀의 말에 박태오가 흥분하여 앞으로 다가오자 강수지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내 몸에 손 대지 말아요!” 그녀는 다시 한번 욕실에서 살갗이 찢기는 듯한 고통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어렵다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내가 노력할게.” 박태오가 말했다. “수지야, 나 믿어줄래?” “믿어요. 하지만 이제 필요 없어요.” 강수지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녀는 박태오의 말을 진심으로 믿었다. 그의 출국은 그의 아버지의 뜻이었다. 비겁하게 도망친 것이 아니라 그 역시 아무것도 모른 채 속은 것이었다. 자고로 모르는 자는 죄가 없으니. 강수지가 제경채에 돌아오니 식탁엔 국이 한 그릇 차려져 있었다. “사모님, 대표님께서 이 탕을 다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집사의 말에 강수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장하늘은 대체 얼마나 한가하기에 이렇게 매일 이리로 보내는 것인지! 오늘의 메뉴는 보기만 해도 식욕이 뚝 떨어지는 오골계탕이었다. 그녀는 한약을 마시듯 코를 틀어막고 단숨에 마셔 버렸다. 하지만 강수지는 뒤늦게 그녀가 자신을 과대평가했음을 깨달았다. 비린내가 입안에 남아 없어지지 않았고 느끼한 식감에 절로 구역질이 났다. “우웩!” 그녀는 또 화장실로 달려가 마셨던 것을 전부 게워냈다. 토하고 나서 강수지는 거울 속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위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그게 아니면... 임신...? 그때 거울 속에 갑자기 다른 한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이변섭은 블랙 실크 잠옷을 입고 나른하게 문에 기대어 물었다. “또 토했어요?” “네.” 강수지가 입가를 닦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마시기 힘들어요?” “좀 힘드네요.” “탕 마시기 싫어요. 느끼하고 영양가도 없고.” 이에 이변섭이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장하늘 씨는 최상급 식재료만 씁니다. 약한 불로 반나절을 끓여도 겨우 한 그릇밖에 나오지 않는다고요.” “그럼 다른 사람한테 가져다줘요. 그 정성에 전 몸 둘 바를 모르겠으니까.” 수도꼭지를 틀어 얼굴을 씻자 그녀는 그제야 좀 정신이 들었다. “왜 이렇게 늦게 들어온 겁니까?” 이변섭이 그녀를 보며 물었다. “야근했어요.” 강수지가 그를 뒤돌아보며 대답했다. “최 이사님이랑 오후 내내 회의했어요.” “강수지 씨, 혹시 앞으로도 번마다 최지호를 내세워 방패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정말 야근했다고요. 끝나고 걸어오다 보니까 이 시간인 거고요.” “빨리 걸을 수 없어요?” 이변섭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 “하루 종일 일해서 피곤해 죽겠다고요. 야근 끝나고 10키로메터를 걸어서 오는데 길에서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잘한 거죠. 내가 뭐 로켓처럼 빠른 줄 알아요?” 강수지가 반박했다. “강수지 씨, 강수지 씨는 내 손에서만 죽을 수 있습니다.” 이변섭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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