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정씨 가문의 본가 건물 앞.
양대주는 온서우와 지예슬과 함께 입구에 서서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어머, 오셨어요?”
문을 열어준 사람은 정씨 가문에서 십여 년 동안 일한 도우미 아주머니 장정희다. 그녀는 양대주 뒤에 서 있는 예쁜 아가씨 두 명을 보고선 활짝 웃으며 반갑게 맞이했다.
“서우랑 예슬이구나? 얼른 안으로 들어와.”
양대주는 두 사람에게 장정희를 소개했다.
온서우는 신발을 갈아 신고 가방을 뒤로 넘기며 장정희를 향해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맑고 낭랑한 목소리는 듣는 이의 귀를 즐겁게 했다. 장정희는 삶은 계란처럼 부드럽고 하얀 온서우의 얼굴을 보고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예쁘게 생겼구나.”
“예슬이 맞지?”
장정희는 온서우 옆에 서 있는 지예슬을 바라봤다.
“선도동은 풍수가 좋은가 봐. 어쩜 애들이 하나같이 이렇게 예쁠까.”
지예슬은 멋쩍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인기척 소리를 들은 정상철과 진미숙도 부랴부랴 거실에서 나왔다.
진미숙은 군병원의 의사로 40대 초반의 나이에 늘씬한 몸매를 소유했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깔끔하게 뒤로 넘긴 머리, 체크무늬 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입은 평범한 옷차림이었지만 남다른 포스가 뿜어져 나왔다.
정상철은 진미숙보다 연상인데도 전혀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 탄탄한 체격을 가졌다.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지만 군복 차림에 짙고 강렬한 인상까지 더해지자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그들의 시선은 온서우와 지예슬에게 쏠렸다.
지예슬은 마음속의 긴장을 억누르고 먼저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삼촌, 이모. 안녕하세요. 지예슬이라고 합니다.”
“이모님은 제가 포스터에서 본 영화배우처럼 아름다우세요. 삼촌도 너무 동안이세요.”
지예슬은 존경과 흠모의 눈빛으로 뚫어져라 두 사람을 바라봤다.
칭찬받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진미숙의 얼굴엔 미소가 활짝 폈다.
온서우의 뇌리에는 원작의 줄거리가 스쳐 지나갔다. 지예슬에게 잔인하게 짓밟힌 여주의 그림자가 그녀의 몸에 남아 있었다.
온서우도 재빨리 입을 열었다.
“삼촌, 이모. 안녕하세요. 온서우라고 합니다.”
정상철은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떡였다.
“이제부터 이곳이 너희 집이니까 편하게 있어. 내가 너희들 아버지를 대신해서 잘 돌봐줄게.”
평소 진지하고 말수가 적은 정상철은 최대한 털털한 모습을 보였지만 몸에 밴 위엄은 여전했기에 두 사람은 압박감을 느꼈다.
진미숙은 행여나 그들이 겁을 먹을까 봐 재빨리 웃으며 말했다.
“여기 서 있지 말고 소파에 앉아서 얘기하자. 이제부터 너희 집이니까 편하게 있어.”
온서우와 지예슬이 소파에 앉자 장정희가 물 두 잔을 가져왔다.
온서우를 컵을 들고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눈치 보지 않고 집안 곳곳을 살펴봤다.
거실은 정사각형의 구조라 밝고 넓었다.
가운데는 갈색 가죽 소파가 놓였고 소파 등받이에는 흰색 꽃무늬 타월이 둘러져 있다.
맞은편에는 목제 캐비닛이 놓여져 있다. 옆에는 TV도 있었는데 모서리가 둥글었고 왼쪽에는 스크린, 오른쪽에는 채널을 돌릴 수 있는 손잡이가 있어 레트로 느낌이 가득했다.
바닥에는 원목마루가 깔려있고 거실을 흰 벽으로 둘러싸였다. 한쪽 벽에는 서예와 그림이 걸려 있고 다른 한쪽 벽에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네 식구가 함께 찍은 가족사진처럼 보였다. 모두 이목구비가 뚜렷했고 그중에서도 특히 오른쪽 하단의 동갑처럼 보이는 두 젊은 남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 명은 날렵한 턱선과 조각 같은 외모를 가졌는데 신이 만든 걸작인 게 틀림없다.
다른 한 명은 짙은 눈썹과 큰 눈망울에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맑은 소년이었다.
둘의 분위기는 정반대다. 한 명은 싸늘함을 내뿜는 반면 다른 한명은 매우 따뜻해 보였다.
온서우는 사진 속 차가운 얼굴을 보며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사람... 기차에서 봤던 그 남자잖아?’
‘설마 정씨 가문의 아들인 건가?’
온서우가 뚫어져라 사진을 쳐다보자 진미숙은 웃으며 소개했다.
“여기는 내 큰아들 정서준. 올해 스물다섯이고 조종사야. 부대에 훈련이 잡혀있어서 직접 인사하러 오지는 못할 것 같아.”
“옆에 있는 건 작은 아들 정재욱. 올해 열여덟이야. 지금 2층에서 뭘 찾고 있어서 이따가 내려올 거야.”
진미숙의 답은 온서우의 추측을 현실로 만들어버렸다. 만감이 교차하는 느낌에 기분이 착잡하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원작에서 여주는 두 남자를 가지려고 발악했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불러일으키는 불씨가 되었다.
특히 정서준은 여주가 정씨 가문에 도착한 첫날부터 이유 없이 적대적이었다. 그 이후로 줄곧 비행 기지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늘 싸늘한 모습이었다.
다른 여동생인 지예슬에게도 싸늘했지만 적어도 우호적인 태도였기에 오빠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다했다.
나중에 여주는 죽음을 무릅쓰고 정서준을 정복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오빠를 남편으로 만들려는 욕심은 끝이 없었고 결과적으로 정씨 가문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사실 온서우는 여주의 마음이 이해되기도 했다.
이렇게 잘생긴 남자 두 명이랑 같이 사는데 어떻게 욕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있겠냐는 말이다.
하지만 마음을 이해한다고 해서 여주의 행동이 맞다는 건 아니다. 어장칠 능력도 없으면서 욕심만 많아 생각 없이 행동했으니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모든 줄거리를 알고 있는 만큼 온서우는 정씨 가문의 두 형제 중 누구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정씨 가문이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으니 오로지 성공하려는 마음뿐이다. 대학교에 진학하여 공부하다가 복지 좋은 회사에 취직해 여유로운 생활을 보내며 노후 준비를 한다면 아주 완벽하다. 결혼이고 뭐고 편안하게 살다 가는 게 유일한 바람이다.
그렇다. 온서우는 꿈이 없는 사람이다.
현실 세계의 온서우는 급속한 경제 성장을 경험한 세대였다. 불과 얼마 후 모든 게 정체기에 접어들면서 출산율이 급락하고 실업률이 폭증한 탓에 널리고 널린 게 대학생인 처지가 되었다.
하여 공무원이 철밥통이라는 인식이 강해졌고 졸업하기 전 온서우의 룸메들도 모두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에 진학한들 나중에는 전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텐데 그럴 바엔 차라리 70년대에 철밥통 직장을 구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지 않을까?
수십 년 뒤 경제 침체기에 접어들때면 고액의 퇴직 급여를 받으면서 매일 놀기만 하면 된다.
출세 욕망은커녕 편하게 사는 게 온서우의 바람이다.
사실 기차에서 정서준을 만났을 때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기에 호감이 생긴 건 맞다.
목숨을 구해줬으니 생명의 은인이라는 필터가 자동으로 씌워졌고 마음속에서는 작은 불꽃이 튀어 오르기 시작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정서준이 제일 싫어하는 동생이 되었다. 정씨 가문이라는 버팀목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튀어 오른 불씨를 눌러 죽여야만 한다.
현재로서는 최대한 정서준을 멀리하고 그와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이다.
한참을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정리되어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손에 컵을 쥔 채 뚫어져라 가족사진을 쳐다보는 지예슬이 보였다.
보통 여주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어도 솔선해서 추태를 부리는 조연 덕에 빛을 보기 마련이다.
온서우와 지예슬을 바라보던 진미숙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