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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온서우는 열차 승무원의 부축을 받아 당직 휴게실로 향했다. 승무원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밖에서 지키고 있을 테니까 여기서 푹 쉬고 계세요. 은성에 도착하려면 아직 한나절이 걸려요.” “감사합니다.” 온서우는 의식을 회복했지만 아직 몸이 나른했다. 하지만 감히 잠을 잘 엄두는 못 내고 단지 누워서 쉬기만 했다. 머릿속으로 화장실에 있었던 장면을 떠올리자 수치스러운 마음에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다. 안경 남이 약을 먹일 거라 생각지도 못했고, 더욱이 낯선 남자에게 그런 짓을 했다는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마치 이성에 굶주린 망나니 같았다. 그나마 의식을 되찾을 때 남자가 이미 사려져서 다행이었다. 아니면 생명의 은인을 무슨 낯짝으로 대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온서우가 해코지당한 사건은 꼬리 칸에서 발생했다. 앞쪽 객실에 탄 양대주는 나중에 소문을 전해 듣고 식겁한 나머지 식은땀이 났다. 이내 서둘러 열차 승무원을 찾아가 수소문했다. 그가 군복을 입은 것을 보자 승무원은 안심하고 휴게실로 안내해주었다. “소대장님!” 양대주를 발견한 온서우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본 양대주는 초조하면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서우야, 괜찮아? 어디 아픈 곳은 없어?” 온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양대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손에 든 도시락을 건네주었다. “얼른 배라도 채워. 여기서 쉬고 있으면 예슬한테 얘기하고 금방 다시 보러 올게.” 그녀가 거절하기도 전에 양대주는 서둘러 떠나갔다. 마침 배가 고픈 온서우도 테이블에 놓인 도시락을 힐긋 쳐다보더니 뚜껑을 열고 먹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대주는 지예슬과 함께 다시 찾아왔다. 열차 승무원의 도움을 받아 세 사람은 같은 객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 나서 순조로운 여정이 이어졌고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편, 철도 경찰서. 심문을 통해 안경 남 일당은 장기간 열차에 떠돌아다니며 부녀자를 유괴하는 인신매매범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얼굴이 예쁜 여자는 비싼 가격에 거래되기에 그들이 가장 선호는 타깃이었다. 목표물을 물색한 다음 군악대 채용이라는 명목으로 여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상대방이 덫에 걸려들면 신체검사 또는 면접한다고 핑계를 대며 중도 하차하게 하고 약으로 기절시키고 나서 거래처에 팔아넘겼다. 만약 기차에서 음모를 눈치챈 사람이 있다면 오늘 온서우가 당했던 것처럼 부부 싸움으로 가장해 한 명은 시어머니, 다른 한 명은 시동생인 것처럼 연기했다. 결국 상대방이 입이 열 개라도 해명할 방법이 없게 만들어 억지로 열차에서 끌고 내렸다. 정서준과 손민재는 철도 경찰서에서 걸어 나왔다. 방금 탔던 열차는 출발한 지 오래되었지만 근처에 비행대 주둔지가 있어 다행이었다. 두 사람은 주둔지 훈련기를 타고 은성으로 돌아갔기에 온서우 일행보다 한나절 먼저 도착했다. 기지에 도착하고 나서야 정서준은 소위 긴급 임무라는 게 고작 군 병원에 가서 신체 검사받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건강검진을 마치고 숙소로 복귀해 이번 비밀 시험비행 임무에 대한 결과 보고서를 열심히 작성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이고 술술 써 내려가던 와중에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서준아, 바빠?” 카키색 군복 차림의 장호군이 뒷짐을 지고 걸어 들어왔다. “네, 보고서 작성 중입니다.” 정서준은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겼다. “앉으세요.” 의자에 앉은 장호군은 책상을 힐끔 쳐다보더니 흡족한 눈빛으로 말했다. “보고서는 천천히 써도 돼. 일주일 휴가를 줄 테니까 집에서 푹 쉬어. 나중에 다시 돌아와서 제출해도 충분하니까.” 역시 진취적인 사람이라 그런지 기지에 복귀하자마자 업무에 몰두했다. 정서준은 머리도 똑똑하고 성격도 부지런해서 부하 중에서도 유난히 특출난 편이다. 장호군이 내심 탄복하며 말을 이어갔다. “아버님께서 여동생 두 명을 입양했다고 하던데 곧 공군 관사에서 생활할 거라며? 마침 휴가도 받았겠다 집에 가서 얼굴이나 보고 와.” 정상철이 옛 전우의 딸 두 명을 입양했다는 소문은 관사에 자자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정서준은 저도 모르게 보건소에서 들었던 온씨 모녀의 대화가 떠올랐다. 곧이어 눈빛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어쨌거나 상대방에게 목적을 이루게 할 기회는 절대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가짜 여동생 온서우와 잘 지내기에는 무리였다. 호불호가 분명한 만큼 싫어하는 사람을 상대로 얼굴에 티가 나기 마련이며 연기조차 불가능했다.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집에 적게 드나들어 서로 마주치는 횟수를 줄여 애초에 기회를 차단할 셈이다. 생각을 마치고 정서준은 단호하게 말했다. “소장님, 제 몸은 아무런 문제 없으니까 즉시 훈련에 돌입 가능합니다. 휴가는 안 주셔도 돼요. 일단 미뤄두고 나중에 쉴게요.” 정서준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한 장호군은 그가 항상 심사숙고를 거치고 말을 내뱉는 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 너만 괜찮다면 뭐. 참, 이번 달 말에 공군 군악대와 친목회를 개최할 예정이라 너도 꼭 참석해. 벌써 25살인데 얼른 여자 친구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 말을 마치고 나서 정서준이 거절이라도 할까 봐 뒷짐 지고 얼른 자리를 피했다. ‘친목회라...’ 정서준은 저도 모르게 기차에서 구해준 여자가 떠올랐다. 자신의 품에 뛰어들어 여보라고 부르며 키스까지 하는 발칙한 짓을 벌이다니. 이내 눈살을 살짝 찌푸렸고, 엉뚱한 생각을 지운 다음 다시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몰두했다. 거의 마무리할 때 전화실 교환수가 다가와서 문을 두드렸다. “대대장님, 전화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금방 갈게요.” 그리고 공책을 서랍에 넣고 자물쇠를 잠그더니 긴 다리를 움직여 전화실로 향했다. “정서준입니다.” 그는 꼿꼿이 서서 손을 뻗어 책상에 놓인 수화기를 들었다. 쌀쌀맞은 성격답게 목소리도 차갑고 딱딱했다. 수화기 너머로 정재욱은 이미 형의 말투에 적응된 지 오래되었다. “형, 우리 여동생이 생긴 건 알고 있죠? 엄마 아빠는 일찍이 집에 오셔서 여동생을 맞이한다고 하던데 형은 언제 와요?” 정서준의 말투는 한결같았다. “이번 주부터 훈련이 있어서 바빠. 집에는 못 갈 것 같아.” “네? 안 올 거예요? 엄마가 이참에 가족끼리 식사나 하자고 했는데. 만약 정 돌아오기 힘들다면 여동생들에게 줄 선물이라도 준비해야 하지 않겠어요? 전 크림 두 개를 사서 주려고 해요. 여자들이 좋아하는 화장품이라던데 나중에 만나면 한 개씩 나눠줄 생각이에요.” 그래도 기본적인 처세는 할 줄 아는 정서준이다. 이내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선물은 나도 준비했으니까 대신 전해줘. 내 방 책상 아래 서랍의 세 번째 칸에 있어. 만년필은 지예슬한테 주고, 책은 나머지 한 명 주면 돼.” 쿠엔쿡에 훈련하러 갔을 때 부대에서 기념품으로 나눠준 만년필인데 그동안 국내에서 표창을 자주 받으며 제일 흔한 상품이 바로 만년필이기에 이미 수두룩했다. 결국 당시 귀국한 다음 책상 서랍에 처박아두고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다. 반면, 마음 씀씀이가 바르지 못한 여동생에게 책이라는 선물은 안성맞춤이었다. “알겠어요. 형, 혹시 할 말이 더 있어요? 없으면 이만 끊을게요.” 형도 선물을 준비했다는 소리를 듣자 정재욱은 한시름 놓았다. 기지의 전화 통화는 공개적으로 진행되기에 누가 연락와서 무슨 말을 했는지 본부의 전화 교환수는 모두 알고 있다. 따라서 자세히 설명하기 곤란한지라 남동생에게 넌지시 귀띔만 해주었다. “재욱아, 너도 이제 18살이 되었으니 남녀 사이 관계를 처리하면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해. 매사에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남한테 이용당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끊어.” 그리고 전화를 뚝 끊었다. 한편, 정씨 가문. 정재욱은 얼떨떨한 얼굴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한참이 지나서도 형이 했던 마지막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전화기 옆에 있던 진미숙이 진지한 표정의 아들을 보고 물었다. “뭐래? 형도 온대?” 정재욱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훈련이 남아서 못 올 것 같대요. 하지만 여동생들을 위한 선물은 준비했다고 하네요.” “그래? 그럼 네가 대신 전해줘.” 진미숙은 일을 우선시하는 큰아들에 대해 딱히 불만은 없다. 어땠거나 정상철도 똑같은 성격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들은 용서해도 남편에게 적용되는 건 아니었다. 양딸이 곧 일가족에 합류하는 대목에서 정상철은 아직도 부대에서 회의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결국 모든 잡일은 그녀가 담당했다. 안 그래도 병원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왜 그녀만 집안일까지 걱정해야 하는가? “나 왔어.” 속으로 투덜거리는 와중에 아래층에서 묵직하면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다름 아닌 정상철이다. 진미숙은 불만을 접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정상철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리 다 했어?” 그나마 남편이 일찍 돌아와서 진미숙은 기분이 다소 풀렸다. “2층 복도 끝방을 치웠어요. 나중에 아이들이 도착하고 나서 필요한 게 있나 물어보고 사주면 될 것 같아요.” 정상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동안 고생 많았어.” 진미숙은 소파에 앉아 목을 축이기 위해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지예슬을 입양하는 건 나도 동의해요. 부모님을 여의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돌아가시는 바람에 의지할 사람도 없이 참으로 가엽죠. 하지만 온서우는 친엄마와 새아빠가 있는데 우리 집으로 데려오는 게 말이 돼요?” 탁자 위에 장정희가 막 우려낸 따끈한 차가 놓여 있었다. 정상철은 아내의 곁에 앉아 힐긋 쳐다보더니 찻잔을 들고 호호 불었다. “녀석들이 어렸을 때부터 말을 안 듣는다고 항상 딸이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잖아? 한 번에 두 명이나 생겼으니 일거양득이지 않나?” 진미숙은 발끈하며 옆으로 돌아앉아 남편을 노려보았다. “그래도 한 명이면 충분하지 갑자기 두 명이 웬 말이에요? 당신은 명성을 챙긴다지만 힘든 건 저예요. 그리고 온서우의 엄마가 무슨 속셈일 줄 모를 것 같아요? 딸을 공군 관사에 보내 빌붙게 할 작정이잖아요. 시골에서 썩히기 아까운 외모의 소유자는 무슨! 대체 얼마나 예쁜지 두고 볼 거예요.” 물론 그녀가 심술이 나서 괜히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군악대에 예쁜 여자는 널렸고, 고작 시골 출신 계집애가 관사에서 경쟁력이 있을 리 만무했다. 즉, 남한테 빌붙고 싶어도 기회가 없을 가능성이 컸다. 정상철은 아내가 말은 거칠어도 마음은 여리다는 것을 알기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 내보냈다. “됐어, 그만 화 풀어. 온서우의 아버지는 내 부하였잖아. 무려 국가를 위해 희생했는데 상관으로서 당연히 챙겨줘야 하지 않겠어?” 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는 와중에 마당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을 데리러 갔던 양대주가 드디어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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