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송연아는 자신의 주량을 잘 알고 있었기에 심하게 취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술집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12시가 넘은 상태였고 거리에는 차도, 사람도 아주 드물었다.
술집에서 집까지는 꽤 멀었고 그곳에서는 택시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는 난간을 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검은색 벤틀리 한 대가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송연아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서둘러 술집 쪽으로 물러섰다.
이때 50대로 보이는, 백발이 듬성듬성한 남자 한 명이 차에서 내렸다.
“송연아 씨 맞으시죠?”
그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물었다.
송연아는 입술을 달싹였다.
“네.”
남자는 곧바로 웃었다.
“송연아 씨, 저는 서 대표님의 운전기사 김성진입니다. 서 대표님께서 송연아 씨를 집까지 모셔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서 대표가 누구일까?
송연아는 서둘러 휴대전화를 꺼냈고 서강호가 보낸 문자를 보았다.
[김성진 기사님께 연아 씨를 집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어요.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푹 쉬어요.]
그 문자를 본 송연아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러면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성진은 좀 뚱뚱한 편이었고 인상이 좋았다.
“네, 타시죠.”
차에 탄 송연아는 의문이 가득했다.
서강호는 그냥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그 지역에서 가장 비싼 별장을 샀으며 개인 운전기사까지 두고 있는 걸까? 조금 뜻밖이었다.
“서 대표님께서 그러셨습니다. 송연아 씨라면 외출할 때 언제든 절 불러도 된다고요.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면 꼭 얘기하라고 하셨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비록 의문이 많았지만 그렇게 궁금하지는 않았다.
별장으로 돌아간 뒤 송연아는 서강호에게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가 답장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는 잘 자라고 답장을 보냈다.
송연아도 잘 자라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온 송연아는 침실 바깥쪽 조명이 켜진 걸 발견했다. 대화를 나누는 소리도 이따금 들려왔다.
그녀는 침실과 연결된 테라스로 나갔고 대각선 맞은편에 차 한 대가 세워져 있는 걸 보았다.
임지헌과 이정호는 별장 문 앞에서 뭔가를 연구하는 듯했다.
“이정호, 여기 너희 집 아니었어? 왜 자기 집 비밀번호를 모르는 거야?”
임지헌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정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정호는 짜증 난 얼굴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평소 송연아가 집에 있다고 확신할 때만 여기에 왔어. 그래서 문만 두드리면 송연아가 열어줬었어.”
“지문은?”
“내 지문은 등록한 적이 없어.”
임지헌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연아 씨에게 연락할 수밖에 없겠네. 연락해 봐.”
이정호는 문을 걷어찼다.
“나 차단당했어.”
“그러면 어쩔 수 없네.”
“네가 연락해.”
“내가?”
임지헌은 입을 비죽였다.
“연아 씨가 나한테 다시 네 일로 연락하면 절교할 거라고 했어.”
이정호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면 그냥 절교해.”
“절교는 안 되지. 넌 연아 씨랑 헤어지면 그만이지만 난 연아 씨랑 절교할 수 없다고.”
“임지헌, 맞고 싶어?”
임지헌은 히죽 웃었다.
“잘 생각해 봐. 아마도 둘 중 한 명의 생일을 비밀번호로 설정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중요한 기념일이라든가.”
이정호는 굳은 표정으로 고민하다가 뭔가를 떠올렸다.
“우리 사귄 날.”
임지헌은 손가락을 튕겼다.
“생각났다니 다행이네. 얼른 문 열어.”
이정호는 코웃음을 쳤다.
“그게 언제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몰라?”
“모르는 게 뭐가 이상해? 중요한 날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내가 어떻게 기억해.”
“그래도 사귄 날은 좀 다르지.”
“다를 거 없어.”
“휴. 160805.”
이정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날은 연아 씨 생일이기도 하거든? 너 연아 씨 생일에 연아 씨에게 고백했고 연아 씨가 승낙해서 사귀게 된 거야. 그때 나랑 기태도 현장에 있었고. 우리 그때 감동했었는데.”
“연아 생일이라고?”
“어. 8년이나 사귀었으면서 한 번도 생일 챙긴 적 없지?”
“생일이 뭐 그렇게 중요한 날이라고.”
“하지만 넌 매년 서우를 위해 직접 생일 파티를 준비했잖아. 그것도 엄청 성대하게.”
이정호는 임지헌을 째려보았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문이 열렸다.
“비밀번호 바꿔. 서우 씨 생일이나 둘 결혼기념일로. 그러면 절대 안 잊어버릴 테니까.”
“꺼져!”
임지헌은 송연아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송연아는 비록 이정호와 헤어졌지만 임지헌이라는 친구는 잃지 않았다.
그날 밤 송연아는 잠을 깊이 잤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집은 꼭 살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시기가 되지 않았다. 이정호는 분명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 것이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이정호가 온서우와 결혼하게 된다면 더는 그녀를 난처하게 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오전에 송연아는 환자들을 진료했다.
잠깐 틈이 생겼을 때 조슬기가 그녀에게 기사를 하나 보여줬다.
“온서우 씨 소속사에서 입장을 밝혔어요. 현민수 씨와는 아무 사이 아니라고, 루머를 퍼뜨린 사람을 고소하겠다고 말이에요. 그러면서 온서우 씨와 이정호 씨는 대학교 때부터 연애하기 시작했고 그동안 두 사람은 항상 서로에게 충실했으며 바람을 피웠다는 건 루머라고 했어요.”
송연아는 그 말을 듣고 비웃었다.
대학교 때부터 연인이었다고? 늘 서로에게 충실했다고?
“그러나 온서우 씨가 자살 시도를 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았어요. 그저 최근 힘든 일이 있었고, 그래도 약혼자인 이정호 씨를 믿는다고 했어요.”
뭔가 이상한데...
“이상한 게 당연하죠. 온서우 씨 소속사에서는 온서우 씨와 현민수 씨 사이만 해명했고 선생님을 위해서는 해명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선생님이 이정호 씨를 꼬셔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고 해서 온서우 씨가 자살 시도를 한 거라고 암시하고 있잖아요.”
역시 댓글을 보니 전부 그녀를 욕하는 말들뿐이었다.
[이제 확실해졌네요. 그 여자는 온서우의 주치의라는 점을 이용해서 이정호에게 접근했고 이정호를 꼬시려고 했다가 거절당한 뒤 계속 두 사람을 괴롭힌 거예요. 그래서 온서우가 자살 시도를 한 거죠.]
[정말 역겹네요. 이런 사람은 의사를 할 자격도 없어요.]
[의사보다는 잘생긴 남자를 만나는 게 더 돈이 돼서 그랬겠죠. 힘들지도 않잖아요.]
조슬기는 댓글 몇 개를 읽다가 도저히 더 볼 수가 없어서 포기했다. 그녀는 욕지거리를 하면서 화면을 껐다.
“선생님, 이것 좀 보세요. 선생님이 가만히 있는다고 해도 이 사람들이 선생님을 가만히 두지 않을 거예요.”
송연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연예인이 아니었고 이런 스캔들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조슬기의 말처럼 루머가 계속 퍼진다면 그녀의 일상생활에도, 일에도 영향이 미칠 것이다.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선글라스를 낀 여자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여기 앉으세요.”
송연아는 감정을 추슬렀다. 그녀는 퇴근한 뒤 다시 그 일을 처리하려고 했다. 마우스를 몇 번 움직여서 컴퓨터 화면을 켠 뒤 송연아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여자는 자리에 앉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그...”
그녀가 묻기도 전에 여자는 갑자기 뚜껑을 따놓은 잉크를 꺼내 송연아에게 뿌렸다.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피할 겨를조차 없었다.
어두운 색깔에 퀴퀴한 냄새가 나는 싸구려 잉크가 그녀의 얼굴과 몸과 그녀가 입고 있는 흰 가운을 까맣게 물들였다.
조슬기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경비원 아저씨! 경비원 아저씨, 얼른 여기로 오세요!”
여자는 우쭐한 표정으로 웃었다.
“남자가 얼마나 고프길래 다른 사람의 약혼자를 꼬셔요? 그렇게 남자가 좋으면 거리에 나가서 아무 남자가 붙잡고 모텔 가요. 상대가 거절하지만 않는다면 마음대로 놀라고요. 그리고 평소에 거울 좀 보고 다녀요. 당신 얼굴 보면 사람들이 놀라서 기절하겠어요. 당신이 우리 서우랑 비교가 된다고 생각해요?”
여자는 실컷 욕한 뒤 황급히 도망쳤다.
잉크를 뒤집어쓴 송연아는 설명할 틈조차 없었다.
밖에는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고 휴대전화로 영상을 찍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다들 할 일 없으면 얼른 진료나 봐요.”
조슬기는 서둘러 문을 닫았다. 비참한 송연아의 모습을 본 그녀는 화가 나서 발을 굴렀다.
조슬기는 물에 씻은 타올로 송연아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몇 번이나 닦아서야 겨우 깨끗해졌고 입고 있는 옷도 버려야 할 듯싶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송연아는 조금 전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잉크 있어요?”
“네?”
송연아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조슬기 씨, 잉크 좀 가져다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