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이 영상은 온서우 생일 며칠 전에 찍힌 영상이다. 당시 이정호는 송연아에게 운성에서 프러포즈하기 가장 좋은 곳이 어딘지 물었고 송연아는 당연히 그 주인공이 본인인 줄 알았다.
그녀는 선샤인 호텔의 스카이라운지 야외 카페를 매우 좋아했다. 이곳에서는 각종 연회와 축하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송연아는 카페를 이정호에게 보여주기 위해 퇴근 후 곧장 선샤인 호텔로 향했고 우연히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온서우와 친구를 마주치게 되었다.
“호텔 매니저한테 이곳에서 프러포즈할 수 있는지 물어봤다면서요?”
“설마 정호가 프러포즈 한대요?”
“본인만의 착각은 아니고?”
“며칠 뒤에 제 생일이거든요. 이정호가 연아 씨한테 프러포즈할지, 나한테 프러포즈할지 내기할래요?”
송연아는 온서우의 도발이 그저 우습기만 했다.
‘여자 친구인 나한테 직접 물어봤는데 당연히 프러포즈하겠지. 설마 그 상대가 너겠냐? 모욕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너무 기분이 나쁘네?’
송연아는 온서우를 무시한 채 야외 카페의 풍경을 영상에 담았다.
무수한 별이 보이는 하늘과 도시를 반짝이는 불빛 아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프러포즈를 받는다면 얼마나 로맨틱할까.
이때 온서우가 그녀의 영상에 끼어들었고 의미심장한 그 말을 남긴 것이다.
지금 보니 온서우의 자신감은 틀리지 않았고 웃음거리가 된 건 송연아였다.
그녀는 핸드폰을 거두고 이정호를 바라봤다. 그러나 이정호는 마치 영상이 아직도 재생되는 듯 원망 가득한 눈길로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온서우에게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는 차에 불과하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듯하다.
“두 사람 체면 생각해서 영상은 안 올렸어. 그러니까 내가 배려해 줄 때 정신 차려.”
송연아는 싸늘하게 말했다.
이정호가 멍하니 앉아 있자, 보다 못한 임지헌이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연아 씨를 위해서 해명하자. 금방 끝날 일이야.”
이때 이정호가 고개를 들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송연아를 바라봤다. 그 후 소파에 등을 기대고선 한참을 지켜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너한테 프러포즈 할 줄 알았어?”
송연아는 조롱 가득한 그의 표정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지?”
“현실적인 사람인 줄 알았는데 상황 파악이 잘 안되나 보네? 설마 나랑 결혼하려고 했어? 우리 집안 며느리가 될 거라는 망상을 갖고 있었구나?”
“뭐?”
송연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혼하고 싶었던 건 널 사랑했기 때문이야.”
“그 말을 믿는 사람이 있을까?”
“너는 믿어줄 거라고 생각했어.”
이정호는 와인 한 병을 까더니 벌컥벌컥 여러 모금을 들이켰다. 복잡한 감정이 솟아올랐지만 송연아의 차분한 모습에 그 감정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영상 지워.”
송연아는 숨을 들이마시고 소파에 앉았다.
“지울게. 대신 조건이 있어. 지금 당장 내 결백을 입증하고 휴직 처리 제안한 것도 취소해.”
“휴직 취소는 가능한데 결백을 입증하는 건 안돼.”
“그럼 더 이상 할 말이 없네. 영상은 바로 퍼뜨릴게. 계정이 정지된 건 맞지만 다른 걸 하나 파든지 친구한테 부탁해도 돼. 아참, 아니면 그냥 기자들한테 보내줄까?”
이정호는 술병을 집어 들고는 또 한 모금 세게 들이켰다.
“나랑 협상할 생각은 없어?”
“필요 없거든?”
“네 부모님 집은 포기한 거야?”
그 말을 들은 송연아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부모님의 집이 이정호의 손에 있는 건 사실이니까.
당시 이정호는 가족들과 다툼이 있어 송연아의 집에 신세를 져야만 했다. 그럼에도 사업을 시작하고 싶다며 얘기했고 송연아는 어쩔 수 없이 부모님의 집을 팔아 2억을 마련해 이정호에게 건넸다.
“사실 내가 오래전에 그 집을 샀어. 원래는 너한테 선물주려고 했어.”
“그럼 왜 지금까지 나한테 숨긴 거야?”
“왜냐고?”
이정호는 생각에 잠겼다.
“이유는 없어. 그냥 기억이 안 났거나 말할 기분이 없었나 보지.”
“이정호.”
“우리 이제 헤어졌어. 집이라도 갖고 싶으면 뭔가 대가를 치러야지. 영상 지우고 여론이 잠잠해 질때까지 쥐 죽은 듯이 지내면 집은 그대로 돌려줄게. 무리한 부탁은 아니잖아?”
송연아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부모님의 집까지 팔아가며 뒷바라지를 해줬는데 돌아오는 건 그걸 이용한 이정호의 파렴치함뿐 이었다.
8년을 함께해서인지 이정호는 송연아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송연아는 핸드폰을 꺼내 이정호가 보는 앞에서 영상을 지웠다. 그러고선 온서우가 건네줬던 2억짜리 수표를 꺼내 이정호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이정호는 다시 수표를 돌려줬다.
“집은 아직 못 줘.”
“방금 약속했잖아...”
“약속한 건 맞는데 네가 또 인터넷에 헛소리를 지껄일지 누가 알아.”
“그럼 언제 줄 건데?”
“나랑 서우 결혼하는 날에 선물로 줄게.”
송연아는 어이가 없었다.
“참 통이 큰 선물이네.”
“그래?”
“언제 결혼해? 날짜는 정했어?”
이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서 너무 재촉해서 다음 달 12일로 정했어. 길일이래.”
송연아는 와인 한 병을 따고 허리를 굽히더니 이정호 손에 든 술병에 부딪혔다.
“축하해.”
그녀는 술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병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송연아의 상태가 안 좋은 것을 본 임지헌은 서둘러 쫓아갔다. 송연아는 주점을 나서는 게 아닌 바 앞에 앉았다.
“기태야, 들어가서 정호랑 얘기해. 난 연아 씨랑 잠깐 있을게.”
임지헌은 허기태를 보며 말했다.
어쩔 수 없이 허기태는 바쁜 와중에도 이정호의 룸으로 향했다.
임지헌은 송연아 옆에 앉아 바텐더에게 잔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연아 씨, 저도 한 잔 주세요.”
임지헌은 자신의 잔을 송연아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송연아는 고개를 돌려 임지헌을 바라보며 웃었다.
“오늘 밤 취하고 싶어요.”
“네?”
“가슴이 너무 아파요. 너무...”
그녀는 지난날의 사랑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임지헌은 입술을 오므리고 잔을 다시 가져오며 바텐더에게 화이트 와인 한 병을 더 달라고 부탁했다.
“저랑 같이 마셔요.”
임지헌은 술이 담긴 술잔을 송연아에게 건넸다.
“연아 씨, 헤어질 걸 축하해요.”
“고마워요. 행복해지고 싶어요.”
허기태가 만취한 이정호를 부축하고 룸에서 나왔을 때 송연아도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허기태는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고 고개를 돌려보니 술에 취한 임지헌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허기태는 혼자서 만취한 세 사람을 집까지 데려다줘야만 했다.
“연아 씨, 어디 살아요?”
“별빛 정원이요.”
“아직 정호랑 같이 살아요?”
송연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허기태를 밀어내더니 홀로 밖으로 걸어갔다.
“연아 씨 지금 취했어요. 제가 데려다줄게요.”
허기태는 급히 쫓아갔다.
“괜찮아요. 데리러 오는 사람이 있거든요.”
찬바람이 불자 송연아도 점차 정신이 들었다. 얼마 후 김성진이 차에서 내려 그녀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송연아가 차에 오르려고 하자 허기태가 다급하게 말렸다.
“모르는 사람의 차를 타면 안 되죠.”
“아는 사람이에요. 우리 김 기사님.”
김성진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30분 전 송연아가 그에게 보낸 메시지를 보여줬다.
송연아가 보낸 걸 확인한 허기태는 더 이상 막지 않았다.
‘택시를 부른 줄 알았는데 벤틀리였어?’
그 시각 차에 올라탄 송연아는 속이 안 좋은 듯 배를 문질렀다.
그러자 김성진이 따뜻한 죽을 건넸다.
“술 마시고 속이 안 좋을 때 직방이라고 합니다.”
죽을 먹자 확실히 속이 편해졌다.
술기운이 가라앉은 송연아는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
30분 전, 그녀는 김성진에게 데리러 오라는 문자를 보냈을 뿐만 아니라 서강호에게도 문자를 보냈다.
[우리 10월 12일에 결혼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