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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여준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재빠르게 책상 위에서 차 키를 집어 들고는 성큼성큼 호텔을 향해 나섰다. ‘만약 은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은지 털끝이라도 다치게 한다면... 고하준, 내가 너 반드시 죽여버릴 거야.’ 한편, 정은지는 방을 나선 후 화장실로 가지 않고 복도 모퉁이에 몸을 숨겼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정은지는 고하준이 뒤따라 나와 두리번거리다가 곧바로 여자 화장실 쪽으로 향하는 것을 목격했다. ‘역시 예상대로네.’ 한아진의 계략은 이미 전생에 겪어본 바 있다. 먼저 술에 취한 정은지를 고하준에게 넘긴 뒤, 방을 준비하고 마지막으로 여준수를 불러들여 상황을 목격하게 하는 것. ‘준수 씨는 아마 이미 오고 있는 중일 거야.’ 조금 후, 한아진도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모습을 보며 정은지는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지난 생에 한아진을 가장 친한 친구로 여겼던 자신이 참으로 어리석고 불쌍했다. ‘좋아. 네가 이렇게 고심해 마련한 판이라면 아쉽게 깰 수는 없지.’ 이렇게 생각한 정은지는 계획을 반대로 이용하기로 마음먹고 고하준에게 의도적으로 문자를 보냈다. [하준 씨, 나 술 취해서 너무 힘들어요. 6318호로 와줄 수 있어요?] ‘6318호?’ 문자를 받은 고하준은 한아진이 준 룸키를 꺼내 보았고 두 사람이 준 방 번호가 똑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역시 틀림없었어. 오늘 예쁘게 차려입고 날 무시하는 것 같아서 내가 눈에 차지 않나 싶었는데... 인제 보니 여전히 날 잊지 못하는 거였구나?’ 이 사실에 만족감을 느낀 고하준은 즉시 그 방으로 출발했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한아진과 정은지의 목표는 하나였다. 바로 여준수가 도착할 순간을 기다리는 것. 15분 후. 번쩍이는 고급 세단이 호텔 앞에서 급히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여준수는 강력한 아우라를 풍기며 호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표정에는 초조와 불쾌감이 가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과 같은 타고난 위엄과 카리스마는 그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이미 그를 기다리고 있던 한아진은 이번 일이 완벽하게 준비되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준수를 보자마자 자연스럽게 그를 맞이하며 다가갔다. “준수 씨, 드디어 오셨네요. 방금 그 두 사람이 있는 방문을 두드려 봤는데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더라고요. 남녀가 같이 한방에 있는데 혹시...” 안 그래도 어두웠던 얼굴은 더욱 험악해졌고 여준수는 곧바로 호텔 매니저를 불렀다. 매니저는 여준수를 보자마자 숨 막히는 긴장감을 느꼈다. “길 안내해요.” 짧은 말이었지만 그 말 속에 담긴 차가움은 누구라도 오싹하게 만들었다. 호텔 매니저는 당연히 그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 호텔은 여씨 가문 소유의 것이었기에 매니저로서는 이 젊고 유능한 대표에게 조금도 무례를 범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잠시 후, 세 사람은 방 앞에 도착했다. “삑.” 문이 열리자마자 한아진은 속으로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머릿속으로는 이미 불쾌한 장면들을 상상하고 있었다. ‘두 사람 분명히 침대에서 뒹굴고 있겠지? 이번에는 어떻게 나오는지 한번 두고 보자고.’ 그러나 문이 열리자마자 그들이 마주한 것은 의외의 장면이었다. “누구야.” 그곳에 있던 사람은 고하준이었다. 그는 목욕 가운을 입고 한 손에는 와인 잔을 들고 홀로 와인을 마시고 있다가 갑자기 문이 열리자 깜짝 놀라 소리쳤다. 정은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한아진은 고하준을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내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두 사람은 하고도 남아야 했는데...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은지는요?” 정은지를 보지 못한 여준수는 고개를 돌려 한아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 속에는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어 누구라도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한아진은 이를 악물고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정은지가 왜 여기에 없지? 분명히 여기 있을 텐데...’ “저 알았어요. 틀림없이 욕실에 있을 거예요.” 한아진은 말이 끝나자마자 욕실로 달려갔지만 그곳은 텅 비어 있었고 아직 가시지 않은 수증기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거지? 어떻게 사라질 수 있지? 정은지, 너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당황한 한아진은 곧바로 고하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준 씨, 은지 어디 있어요? 하준 씨가 은지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잖아요?” 한아진은 따지듯 물었다. “애초에 은지 씨랑 들어온 적 없는데요?” 고하준은 무언가 일이 벌어지길 기대하고 왔지만 결국 정은지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여준수는 이 말을 듣고 한아진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 어두운 눈빛은 한아진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방을 나섰다. 한아진의 마음은 무거워졌고 급히 여준수를 따라가며 해명하려고 했다. “준수 씨, 화내지 말아요. 제가 정말로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요. 제 말 믿어줘요...” 그러나 여준수는 그녀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그 순간, 두 사람이 그토록 신경 쓰던 정은지가 마침 복도에서 나타났다. 여준수를 보자마자 정은지는 매우 기뻐하며 그에게 달려들었고 곰처럼 여준수를 꼭 안고 그의 몸에 매달렸다. “여보, 여보, 여기서 뭐하고 있어? 나 데리러 온 거야?”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목소리와 귀여운 얼굴은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여준수는 그런 정은지의 행동에 멍해지며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내가 알던 정은지가 맞나? 그리고 방금 뭐라고 했지? 여보? 내가 잘못 들었나?’ 과거의 정은지는 여준수와의 그 어떤 스킨십도 꺼려했고 걸을 때도 거리를 두었으며 호칭마저 항상 이름 석 자를 꼭 불렀었다. 한아진 역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너 술 취한 거 아니야?” 여준수는 잠시 정은지를 자신의 몸에서 떼어내며 물었다. 그러자 정은지는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 술 안 취했어. 누가 취했다고 그래? 술을 조금 마셨지만 취하진 않았어. 못 믿겠으면 물어봐. 1 더하기 1이 얼마인지. 절대 안 틀릴걸? 헤헤.” 말을 마치며 정은지는 장난스럽고 귀여운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는 천사처럼 맑고 환했다. 정은지의 그런 모습에 여준수는 그녀가 술에 취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안심할 수 있었다. 그때, 한아진도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정은지, 너 아까 어디 갔었어? 너무 걱정했잖아. 너... 너 혹시...” ‘한아진, 위선 떨고 있네.’ 정은지는 속으로 냉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화장실 간다고 너한테 말했었잖아. 왜?” 그러자 한아진의 얼굴이 갑자기 붉으락푸르락하며 매우 나빠졌다. 정은지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한아진은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가 그녀의 통제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특히 정은지와 여준수의 관계는 분명히 크게 변했다. 과거의 정은지가 고하준 때문에 여준수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길 바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제 정은지는 여준수를 ‘여보’라고 부르며 기꺼이 그에게 다가가고 있다. ‘아무리 봐도 이건 정상이 아닌데?’ 만약 눈빛이 칼과도 같은 위력을 지녔다면 지금 한아진의 눈빛은 정은지를 단칼에 베고도 남았을 것이다. 한아진은 여준수를 사랑했지만 그에게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정은지 네가 뭔데 준수 씨랑 스킨십을 해? 이 모든 건 다 내 것이었어야 했어. 네가 뭔데 이런 행운을 누리는 거야 대체?’ 정은지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한아진의 얼굴에서 드러나는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 사악한 얼굴은 마치 신데렐라에게 독사과를 건네는 마녀와 다를 바 없었다. ‘이 모든 걸 전에는 몰랐다니... 나 정말 눈이 멀어도 한참 멀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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