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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이 시각은 이미 새벽 1시였고 밖은 고요하고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이런 시간에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면 보통 사람이라면 등골이 서늘해지며 무슨 영적인 사건이라도 벌어진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방우혁은 알고 있었다. 그 울음소리는 아래층의 황희숙, 유슬기의 어머니였다. 저녁 식사 때 이미 그녀의 눈빛에 깊은 걱정이 담겨 있다는 걸 방우혁은 눈치채고 있었다. 아마 슬기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이렇게 모두가 잠든 시간에야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것일 터였다. 분명히 황희숙은 지금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황희숙은 좋은 사람이었다. 방우혁이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때 혼자 지내는 그가 안쓰러웠는지 자주 식사에 초대해 주었고 가끔은 과일이나 간식을 슬기를 통해 챙겨주기도 했다. 방우혁은 비록 감정 표현이 서툴고 담담한 성격이지만 결코 냉혈한은 아니었다. 게다가 황희숙은 드문드문한 세상 속에서도 참된 이웃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내일 낮에 직접 가서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자.’ 그다음 날 오전, 고3 체육 수업 시간. 사실 고3에게 체육 수업이란 건 단지 공부에 찌든 학생들에게 짧은 숨 돌림의 기회를 주는 것에 불과했다. 학생들은 대부분 운동장에서 자유롭게 놀거나 운동을 했다. 어떤 아이들은 농구나 축구, 달리기를 즐겼고 게으른 부류인 방우혁과 유지석은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와 농구 코트 옆 벤치에 앉아 느긋하게 잡담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이 앉은 농구 코트엔 처음엔 몇 명만이 농구 하고 있었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어제 방우혁과 마주쳤던 양지욱이 있었다. “어? 양지욱이 왜 이쪽까지 왔지?” 유지석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그러고는 슬쩍 방우혁을 바라봤다. 어제 하루 종일 학년 전체에 떠돌았던 소문이 떠올랐다. 양지욱이 한소유와 방우혁이 짝이 된 걸 못마땅하게 여겨 직접 찾아와서 경고를 날렸다는 얘기였다. 다만 그 시간 유지석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기에 진짜 상황은 잘 모른다. “우혁아, 어제 그 일은... 진짜야? 양지욱이 진짜로...” “꺅!” 그 순간 농구 코트 쪽에서 여자애들의 비명이 터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양지욱이 교복 상의를 벗고 상반신을 드러낸 채 서 있었다. 탄탄한 가슴근육과 복근이 선명하게 드러났고 많은 여학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양지욱은 키도 크고 체격도 좋으며 얼굴도 잘생겼고 공부도 잘했다. 거기에 집안까지 탄탄하니 그야말로 학교의 진짜 왕자님이었다. 그는 농구공을 집어 들고 가볍게 드리블하더니 자유투 라인 근처에서 날아서 멋진 덩크슛을 날렸다. “와아!” 한 번의 덩크슛으로 또다시 함성이 터졌고 심지어 남학생들조차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자유투 라인 근처에서 도약해서 덩크를 할 수 있는 고등학생이라니. 이건 NBA에서도 쉽지 않은 기술이었다. “세상에 양지욱 진짜 뭐야? 어떻게 저렇게 멀리 뛰어?” “진짜 NBA 선수 저리 가라네!” “후후, 너희는 아직도 몰랐냐. 양지욱은 어릴 때부터 무술을 배웠대. 지금 뭐라더라... 선천 무사? 맞아. 선천 무사래.” 근처에서 남학생 몇 명이 수군댔다. “선천 무사?” 그 말을 들은 유지석은 흥분한 나머지 얼굴 살이 덜덜 떨렸다. 그리고는 방우혁을 보며 작게 속삭였다. “야, 방우혁. 너 진짜 양지욱하고 문제 있었던 거면 지금이라도 사과하는 게 나아. 선천 무사 상대로는 절대 이길 수 없어...” 방우혁은 빙그레 웃었다. 이미 어제 그는 양지욱의 수준을 파악했다. 선천 5단, 즉 연기기 5층 수준이었다. 하지만 방우혁은 연기기 9,832층인 존재였으니 그의 눈에 양지욱은 그저 장난감 수준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나이에 그 정도 수준이라면 일반인들에겐 확실히 넘사벽인 존재였다. 이때 양지욱 주변에는 사람들로 인산인해가 되기 시작했고 특히 여학생들이 하나같이 열광하고 있었다. 농구공이 한 번씩 골때에 들어갈 때마다 비명과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한편, 한소유는 절친인 조수연과 함께 운동장에서 산책하고 있었다. “소유야, 너 얼른 우리 반으로 돌아와. 너 없는 거 너무 심심해.” 조수연이 그녀의 손을 잡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지난번 반 바꾸겠다고 했더니 교무부장한테 거절당했어. 오히려 꾸지람만 들었고...” 한소유가 힘없이 말했다. “뭐? 그깟 교무부장이 감히 널 혼냈다고? 집에 가서 아버지한테 말씀드려. 전화 한 통이면 끝이지. 교무부장이 뭐라고 하겠어?” 조수연이 분을 삼키며 외쳤다. 그러다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스럽게 물었다. “잠깐... 그까짓 교무부장이 네 부탁을 거절했다? 말도 안 돼. 혹시 너... 일부러 핑계 댄 거 아냐? 사실은 그 방우혁이라는 애가 좋아서 반 안 옮기려고 하는 거지?” “너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한소유는 얼굴이 벌게지며 반박했다. “후후, 이 반응 보니까 정답이네.” 조수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그들 귀에 농구 코트 쪽에서 들려오는 여자애들의 비명이 쏟아졌다. “무슨 일이야? 왜 저쪽에 저렇게 사람이 많아?” 한소유가 급히 말을 돌렸다. 그러자 조수연은 농구 코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상의를 벗은 채 농구를 하는 양지욱을 발견하고 눈빛이 번쩍였다. “어머. 양지욱이네. 가자, 우리도 보러 가자!” 한소유는 양지욱의 이름만 들어도 불쾌했기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조수연이 억지로 끌고 가는 바람에 마지못해 발걸음을 옮겼다. 점점 사람들이 몰려들자 방우혁은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그만 가야겠는데.’ 그는 유지석의 어깨를 톡톡 치며 말했다. “여기 너무 시끄러워. 우리 그냥 가자.” 그 순간, 양지욱이 다가왔다. 늘 그랬듯이 그는 느긋한 걸음으로 익숙한 미소를 지었다. “와, 이게 무슨 우연이람. 방우혁.” 그건 전혀 우연이 아니라 계획된 만남이라는 걸 방우혁은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그가 짧게 물었다. “딱히 별건 없고. 그냥 네가 여기 앉아서 심심해 보여서 말인데 농구 한 판 어때?” 그 말이 끝나자 주변 학생들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어제 소문에 이어 오늘은 직접적인 대결이라니. 이건 완전 구경거리였다. 누가 봐도 양지욱이 기선제압을 위해 일부러 찾아온 상황이었다. “농구 못 해.” 방우혁은 시큰둥하게 답했다. “농구도 못 해? 남자라는 놈이?” 양지욱이 입꼬리를 비웃듯 올리자 학생들 사이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야, 양씨 가문 큰 도련님께서 직접 초대한 건데 감히 거절한다고?” “그러니까. 사람들 다 보고 있는데 그렇게 쫄면 좀 창피하지 않냐?” 한두 명씩 부추기기 시작하더니 곧 무리를 이룬 남학생들이 조롱 조로 외쳤다. 여학생들은 방우혁을 경멸하듯 바라보았다. ‘저렇게 소심한 애가 한소유랑 짝이라고?’ 그때 사람들 틈 사이로 들어선 한소유와 조수연이 이 장면을 목격했다. “어머, 소유야. 네 짝꿍이 지금 당하고 있는 것 같은데?” 조수연이 웃으며 말했다. 한소유는 양지욱이 이렇게 대놓고 사람들 앞에서 방우혁을 곤란하게 만들 줄은 몰랐고 당황스러웠다. ‘안 돼. 내가 나서서 막아야 해!’ 한소유는 몸을 틀어 인파로 들어가려 했지만 조수연이 그녀를 막아섰다. “소유야, 참아. 지금 끼어들면 너랑 방우혁 소문 확정되는 거야. 그냥 가만히 있어봐. 나도 네 짝꿍이 얼마나 대단한지 궁금했거든?” 조수연은 한소유의 초조한 얼굴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걱정하지 마.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설마 진짜 때리기야 하겠어?” 하지만 그건 장담 할 수 없었다. 양씨 집안 사람들은 다들 또라이들이니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할아버지인 한명수가 직접 말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농구공을 손에 든 양지욱이 웃으며 갑자기 방우혁에게 공을 던졌다. 순간적인 기습이었다. 조금이라도 반응이 늦었다면 얼굴에 제대로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방우혁은 아주 가볍게 한 손으로 공을 낚아챘다. “몇 점 내기로 할래?” 그가 물었다. 그 광경에 양지욱은 눈을 가늘게 떴지만 이내 익숙한 미소로 말했다. “3점 내기 어때?” 방우혁이 진짜로 승부를 받아들였다. 농구장의 분위기는 한순간에 후끈 달아올랐다. 누군가 박수를 치며 외쳤다. “이야. 진짜 죽기를 각오한 남자네!” 한소유는 속이 타들어 간 나머지 발을 동동 굴렀다. ‘왜 하필... 왜 하필 저걸 받아들이는 거야. 양지욱이 가만있을 리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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