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넓디넓은 파티장 안에서 그가 어떻게 찾은 거지?
우연인 건가?
아니면 정말로 그녀를 알아보기라도 한 건가?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 눈빛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섬뜩하게 만들었다.
고하진은 절대로 그한테 잡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건 둘째치고 그를 침대에 수갑을 채웠는데 그 행동 하나만으로도 이 남자한테 잡히게 되면 그녀는 전혀 살길이 없을 것이니 말이다.
게다가 그의 위협적인 눈빛 속에는 그녀를 으스러뜨리고 말겠다는 다짐이 잔뜩 서려 있는 듯해 보였다.
이제 유일한 길은 도망밖에 없다.
그러니 그녀는 그보다 더 먼저 손을 써야만 한다.
다행히도 미리 준비해 놓은 바가 있었다.
“아! 사람이 죽었어요! 아! 피! 피가 흘러요!”
고하진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옷 속에 숨겨두었던 피가 들어있는 주머니를 찢어버렸다.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잡음 속에서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누구도 그녀가 소리를 지르는 동시에 동그란 공 같은 물건이 그 남자의 발 옆에 떨어져 끈적끈적한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이번 파티에서 준비된 도구들이 어찌나 완벽했던 건지 이 모든 건 그녀가 아까 화장실에서 가지고 나온 것들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그의 품에 안기고 비명을 지리는 데까지 전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그녀의 반응력과 민첩도는 그야말로 놀라울 지경이었다.
귀청을 찢을 듯한 비명과 섬뜩할 정도의 핏빛으로 인해 항상 침착함을 유지하던 경도준마저도 약간 멍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가 방심한 틈을 타 고하진은 그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가요.”
고하진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진우남을 데리고 도망을 쳤다.
일분일초가 급한 이 시각 그녀는 이 남자한테 잡히게 되면 오늘 밤 목숨을 건질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경도준은 썩소를 지어보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했었는데 이제는 찾던 사람이 바로 그녀라는 걸 확신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의 그녀는 순백의 마술 가운 차림이었고 여기 호텔 곳곳에는 그의 부하들이 배치되어 있다!
내가 사냥감으로 널 찜했는데 어딜 도망가?
그는 그녀가 조금 더 활개 치게 놔둘 작정이었다.
허나 발길을 옮기려 하던 그때 그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신발이 바닥에 달라붙어 꿈쩍할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같은 시각 온몸에 ‘피’범벅인 고하진을 막는 자도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홀에 막 다다랐을 무렵 고하진은 아무 여자나 하나 끌어당겼고 갑작스레 팔이 잡힌 그 여자는 심히 놀란 탓인지 발버둥을 치지 않은 채 고하진을 따라나서고 있었다.
전용 엘리베이터가 마침 3층에 멈춰 섰다.
고하진은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분명 그 남자가 타고 올라온 엘리베이터일 테니 뜻밖에도 그녀한테 시간을 벌어준 셈이었다.
고하진은 재빨리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문이 닫히던 순간 파티장을 걸어 나오고 있는 그 남자를 발견했다.
발이 바닥에 붙어있었을 텐데 어쩜 벌써 빠져나온 거지?
그래도 어차피 발 늦은 셈이다.
“안녕.”
고하진은 문이 닫히는 틈 사이로 예의 있게 손을 내흔들어 보였다.
서로 가면을 쓰고 있는 상황이라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어도 그녀의 동작은 한마디로 건방지다고 표현할 수가 있었다.
그런 그녀의 오만함을 지켜보며 비스듬히 뜨고 있는 경도준은 서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아!
정말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전체 호텔에 빈틈없이 그물을 쳐 놓았는데 어딜 도망가?
순진하기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난 진우남은 고하진을 바라보는 눈빛에 착잡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혜인 씨, 부탁 하나 드릴게요.”
고하진은 진우남을 아랑곳하지 않고 방금 끌고 나온 여자분한테 다소 예의 있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누구신데요? 제가 왜 그 부탁을 들어드려야 되죠?”
이혜인의 눈빛에는 경멸감과 짜증이 물들어 있었다.
고하진은 그녀한테 다가가 귓속말 몇 마디를 하고 있었고 이혜인은 화들짝 놀란 표정을 보이며 이를 꽉 깨물었다.
“뭘 하면 되죠?”
“이거 입으세요. 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문이 열리면 다친 척하고 앞으로 쓰러지면 되세요.”
고하진은 “피”가 잔뜩 묻은 마술 가운을 벗어 건넸다.
1층에서 누군가가 지키고 있을 거라는 걸 아는 그녀는 대비를 해야만 했다.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지는 이 관건적인 순간에 달려 있다.
이혜인은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진우남은 눈빛이 번쩍였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총명한 머리와 대담한 성격에다 반응이 민첩할 뿐더러 흠잡을 데 없는 상황 대응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진씨네 가문의 숨겨진 비밀마저 꿰뚫고 있다.
대체 누구지?
아니나 다를까 엘리베이터는 1층에 멈춰 섰다.
전용 엘리베이터 안의 사람이 자신이 모시는 도련님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자 고오한은 경각심을 갖추었다.
“이 사람들 막아.”
밖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빠르게 몰려들었고 바로 그때 피가 잔뜩 묻은 옷을 걸친 이혜인이 고오한한테로 쓰러졌다.
“이봐요. 괜찮아요?”
당황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다들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고하진은 뒤에서 닫힘 버튼을 누르고 있는 중이었고 부하들이 정신을 차려보니 엘리베이터 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그리고 그 엘리베이터는 지하 주차장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또 한발 늦어버렸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진우남은 신속한 동작으로 고하진의 얼굴에 씌워져 있는 가면을 벗겨버렸다.
“고하진?”
진우남은 자신이 헛걸 본 줄로 여겼다.
어떻게 고하진일 수가 있지?
그 멍청하고도 미련한 고하진이라고?
사람들의 놀림이나 받은 고하진?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그러나 지금 앞에 있는 사람은 분명 그가 알고 있던 고하진이 틀림없었다.
방금 그녀가 보여줬던 행동들로 보아 그녀는 멍청하기는커녕 사람을 감탄하게 할 정도로 총명한 사람이었다니!
그러니까 평소에 일부러 멍청한 척 연기했던 거야?
대체 왜 그랬던 거지?
고하진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를 힐끔하고는 태연스레 가면을 다시 얼굴에 씌우고 있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그녀의 반응을 보여 진우남은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여자의 정체가 대체 뭐야?
그는 사촌 형이 집에서 고하진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멍청한 여자라 욕하며 파혼을 하겠다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 다시 와서 생각해 보니 참으로 우습고 아이러니한 기분이 들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고오한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바로 앞에 차 세워뒀어요.”
진우남은 궁금한 점이 많았으나 지금은 캐물을 시기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불과 몇십 미터 거리에 세워둔 차로 달려간다고 해도 걸리는 시간은 몇 초면 그만이다.
허나 뒤에서 사람들이 바싹 쫓아오고 있으니 고하진한테 있어서 몇 초라는 시간조차도 위험한 지경이었다.
3층에서 고하진이 전용 엘리베이터를 탔던 터라 경도준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엘리베이터를 기다려야만 했고 마침 1번 엘리베이터가 3층에 멈춰 섰다.
하지만 경도준이 탄 엘리베이터는 또다시 1층에서 멈추게 되었고 이 지배인은 안에 들어있는 사람을 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도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