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그 말이 떨어지자 서지수는 잠시 멍하니 굳었다.
그러면서도 지금 이 순간 눈앞의 사람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선명히 깨달았다. 이혼 신청을 접수한 뒤로 둘은 아무런 관계없는 타인이 되어버린 듯했다.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던 답답함과 괴로움은 순식간에 깨끗이 사라졌다.
서지수는 마음을 추스르고 한층 차가워진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래, 난 너한테 아무것도 아니겠지. 근데 네가 제때 물건을 돌려줬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 아니야.”
“겨우 캐리어 하나야. 수혁이가 그걸 뺏기라도 하겠어?”
소유리는 진수혁의 편을 들며 나섰다.
“빼앗든 말든 상관없어.”
서지수는 둘을 바라보면서도 예전처럼 화나거나 슬퍼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단숨에 모든 감정을 비워버린 듯했다.
“다만, 내 캐리어가 여기서 더러운 것에 물드는 게 싫을 뿐이야.”
진수혁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러나 서지수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내 짐 돌려줘. 그럼 바로 떠날게.”
그녀는 문득 모든 걸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진수혁이 더 이상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다른 사람을 편애한다는 사실도 모두 받아들이기로 한 듯 보였다.
“하늘이는 그 캐리어가 내 건 줄 알아.”
“네 능력으로 똑같은 캐리어 구해오는 건 일도 아니잖아. 너도 나랑 이런 식으로 엮이는 건 싫을 거 아니야.”
서지수 자신도 마음이 왜 이리 빨리 식어버렸는지 의아했다.
진수혁은 그녀가 단순히 화를 내고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진짜로 담담해졌음을 직감했다. 결국 몸을 돌려 보디가드에게 지시했다.
“위층에 있는 캐리어 갖다줘요.”
보디가드는 곧장 안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밝은 색 계열 디자인의 캐리어를 들고나왔다.
진수혁과 소유리는 서지수가 그걸 그대로 가져가겠구나 싶었는데, 그녀는 두 사람 앞에서 캐리어를 열었다.
소유리는 당황해하며 물었다.
“지수야, 너 뭐 하는 거야?”
“내 물건이 빠지진 않았는지 확인해야지.”
서지수는 아무 감정 없는 목소리로 사람 속을 긁는 말을 했다.
진수혁은 혀로 어금니를 살짝 밀었다.
그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빨리 서지수가 이 방법을 배웠다.
“설마 수혁이 인품을 의심하는 거야?”
소유리는 다시 불을 지피는 듯 나섰다.
“서류나 증명서는 물론, 비싼 게 있다고 해도 거들떠보지 않을 사람이야.”
서지수는 곧바로 쏘아붙였다.
“진수혁은 그렇다 쳐. 근데 넌?”
“수혁아...”
소유리는 기가 막혀 진수혁에게 도움을 청하는 표정을 지었다.
“낮에 내 방 보석이랑 가방 몽땅 탐내던 거, 벌써 잊었어?”
캐리어를 닫으며 서지수는 피식 웃었다.
“뭐, 어차피 내겐 쓸모없는 물건이긴 해. 쓰레기통에 버려질 쓰레기를 너희가 차지한 셈 치지.”
소유리는 두 손을 꽉 쥐었지만 진수혁 앞이라 폭발할 수도 없었다.
“그 물건들은 내가 알아서 처분할 거야.”
진수혁이 한발 앞서 말을 꺼냈다.
“유리가 네가 쓰던 걸 쓸 일은 없어.”
“그래?”
서지수는 손가락에 힘을 주며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근데 너도 내가 쓰던 거잖아.”
소유리는 반사적으로 진수혁을 바라봤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는 감정이 읽히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서지수는 시선을 살짝 내리깔고 담담히 말했다.
“오늘 밤 하늘이한테 우리 이혼한 거 얘기할 거야. 네가 무슨 핑계를 댈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애가 널 덜 미워하는 쪽이었으면 좋겠네.”
말을 마친 그녀는 한 치의 미련도 남기지 않고 뒤돌아섰다. 그 뒷모습은 예전보다 훨씬 냉정했다.
“잠깐.”
진수혁이 그녀를 불렀다.
서지수는 걸음을 멈췄지만 스스로 너무 말을 잘 듣는 게 싫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진수혁이 다가오며 말했다.
“카드는 유리한테 줘. 그거 이제 네 거 아니야.”
서지수는 가방에서 카드를 꺼냈다.
사실 진수혁과 소유리의 스캔들이 터진 그날부터 카드 한도는 이미 막혀 있었다.
몇 번을 바라보던 그녀는 마침내 카드를 건넸다.
진수혁이 받으려 손을 뻗는 순간 서지수는 손가락을 느슨하게 풀었다. 찰나의 사이에 블랙카드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툭.
카드가 바닥에 부딪히며 경쾌한 소리가 났다.
서지수의 눈에는 수많은 감정이 스쳐 갔으나 곧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러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미안, 잘 못 잡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