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진수혁은 오전에 이혼하러 갈 때 입었던 맞춤 제작 회색 수트를 그대로 걸치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나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차갑고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 한두 마디씩 대화를 주고받던 것 같았다. 이혼으로 기분이 흔들린 기색은 전혀 없었다.
서지수가 나타나자,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무심결에 주먹을 꽉 쥐었다. 눈에는 분명한 거부감과 혐오가 서려 있었다.
“오셨네요.”
의사가 간단히 인사를 건넸다.
서지수는 시선을 살짝 돌렸다.
“네.”
“전화로 이미 말씀드렸던 내용이긴 한데, 여기 매달 결제해야 하는 비용이 나와 있어요. 문제없으시면 정보 기재하시고 서명만 해주시면 돼요.”
의사는 치료 항목 비용표를 내밀었다.
서지수는 서류를 받아 들여다보았다. 한 달에 열 자릿수가 될 정도로 높은 치료비 내역이 눈에 들어오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결혼 전 재산이 아버지에게 사기를 당해 빼앗기지만 않았어도 몇 달은 버틸 수 있었을 텐데, 지금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현재 자산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금액이었다.
“비용이 부담되신다면 이쪽에 있는 몇 가지 방안 중에서 적당한 걸 고르셔도 돼요.”
그녀가 난처해 보였는지 의사는 다시 다른 서류를 내밀었다.
새로운 치료 방법들은 지금보다 확실히 가격이 낮긴 했지만, 그래도 한 달에 수천만 원은 훌쩍 넘었다.
서지수가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서류들을 살펴보는 동안 의사는 무의식적으로 진수혁 쪽을 쳐다봤다. 그가 눈짓을 보내자 의사는 바로 눈치를 챘다.
“그럼 우선 천천히 보세요.”
의사는 휴대폰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병실에 들러 환자분 상태 좀 보고 오겠습니다. 이 안건이 적합하지 않다면, 제가 돌아온 뒤 다시 상의합시다.”
서지수는 여전히 치료 방안을 보느라 집중해 있었다.
“네.”
의사는 사무실을 나가면서 문까지 조심스레 닫았다.
방 안에는 서지수와 진수혁 두 사람만 남았다.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적막 속으로 떨어졌다.
“그걸 아무리 들여다봐도 네 자산으로 어머님 치료비를 감당하긴 무리야.”
진수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느 때처럼 느긋하고 차분하면서도 무심한 목소리였다.
서지수는 그를 노려보았다. 순간 마음속에서 분노가 치솟았다.
“게다가 당장 집도 구해야 하고, 하늘이도 데리고 살아야 하잖아.”
진수혁은 덤덤히 말을 이었다.
서지수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이혼은 그냥 홧김에 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 줄게.”
진수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혼 얘기를 더는 꺼내지 않기로 약속해. 그럼 어머님 치료비 계속 부담해 줄 거고, 너도 여전히 내 아내로 남을 수 있어.”
“소유리는?”
서지수가 물었다.
“너희 둘은 서로 간섭할 일 없겠지.”
진수혁의 눈빛은 여전히 차분했다.
“네가 싫으면, 네 앞엔 안 보이게 할 수 있어.”
서지수는 비꼬듯 말했다.
“내가 네 배려에 감동이라도 해야 해?”
진수혁은 그녀의 투덜거림 정도는 우습다는 듯 여전히 사업을 제안하는 것처럼 나직이 이어갔다.
“어떤 선택이 너한테 가장 이로운지는 너도 잘 알 텐데. 너 지금껏 대접받으면서 살았잖아. 사치에 익숙해진 네가 검소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서지수도 알고 있다.
그녀는 태어나서 줄곧 가난함이라는 걸 몰랐다.
아버지가 사고를 치기 전까지는 돈 걱정 같은 걸 할 필요도 없었다.
그 후 회사가 파산하자마자 곧바로 진수혁과 결혼했고, 카드 한도 없이 막 쓸 수 있게 해줘서 돈에 대한 근심은 전혀 하지 않고 살았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이걸로 충분히 만족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소유리와 함께 있어도 진수혁이 그녀를 소홀히 대할 일은 없을 테고, 지금까지처럼 모든 걸 세심히 챙겨줄 수 있다.
하지만 인생에는 돈 말고도 중요한 것들이 있다. 자존심과 체면, 그리고 자신만의 가치관 같은 것 말이다.
“자존심이 밥 먹여주진 않아. 밖에 나가보면 세상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 곳도 아니야.”
진수혁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은 듯 매정하게 덧붙였다.
“내 보호 없이 넌 아무것도 못 할 걸?”
서지수는 기분 나쁜 듯 퉁명스럽게 받았다.
“내 일에 참견할 필요 없어. 너나 잘해.”
“서지수.”
그는 그녀가 왜 이토록 고집을 부리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진수혁, 더 볼일 없으면 나가줘. 난 의사랑 할 얘기가 남았거든. 네 말 들어줄 시간 없어.”
서지수가 처음으로 이렇게 노골적인 말투로 그를 대했다.
진수혁은 화를 내지도 않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그녀는 마음속 방벽이 서서히 압박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서류를 꼭 쥐고 억지로라도 그와 마주 보았다. 시선 싸움에서 밀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1분만 더 생각할 시간을 줄게.”
진수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1분 안에 결정하면 없던 일로 넘길 수 있어. 하지만 1분 뒤에도 지금처럼 고집하면, 울며 찾아와도 받아주지 않을 거야.”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진수혁은 더 머물지 않았다. 그는 1분이 지나자 바로 떠났다.
그는 서지수가 참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지금처럼 고집을 부려봤자 사회에 부딪치고 나면 누가 자신의 편이었는지 깨달을 거라고 말이다.
쾅, 하고 문이 닫혔다.
그 소리에 서지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때는 둘 사이가 다른 사람처럼 불꽃 튀는 열정은 없어도, 잔잔하고 진득한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이젠 그조차 잘 모르겠다.
그녀가 아직 이 결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의사가 다시 들어왔다. 그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서지수는 먼저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주 선생님, 저 이 서류들 좀 더 꼼꼼히 보고 결정하면 안 될까요? 오늘 가져가서 고민해 보고 알려드릴게요.”
“물론이죠.”
주현민은 흔쾌히 수락했다.
“다만 빨리 결정해 주시면 좋습니다. 비용 정산 열흘 전에는 말씀해 주시는 게 안전하고요.”
“네, 감사합니다.”
서지수는 치료 방안을 챙겨 병원에서 나왔다. 그리고 곧장 일자리를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월급이 괜찮다면 어머니를 계속 병원에 두고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제이 그룹 산하의 사립 병원으로, 국내외 최고급 장비와 전문의들이 모여 있었다. 그 덕분에, 그리고 진수혁의 배려 덕분에 지금까지 어머니의 치료가 각별히 잘 이루어져 왔는데, 만약 옮기게 되면 지금 같은 혜택을 기대하긴 어렵다.
어머니는 세상에서 그녀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유일한 가족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잘 모셔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서지수는 집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 내내 진하늘에게 이혼 얘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진하늘은 어릴 때부터 영리하고 철 들어서 웬만한 일은 알아서 잘했지만, 이혼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이 가볍진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누군가는 이미 다른 방식으로 사건을 몰아가고 있었다.
집에 도착해보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소유리와 진수혁이 소파에 나란히 앉아 다정하게 몸을 기댄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소유리가 다소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여긴 어쨌든 수혁 씨랑 지수가 함께 살던 곳이잖아. 내가 여기 오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아니야.”
진수혁의 말투는 나지막하고 무심했다.
소유리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걔 곧 이 집에서 나갈 거야.”
진수혁은 그녀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네가 이 집의 주인이지.”
소유리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고 두 사람의 시선이 뒤엉켰다. 그 모습이 아슬아슬할 만큼 깊어 보였다.
둘은 서지수가 돌아온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서로에게만 빠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