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위에 적힌 건 전부 법대로 한 거야.”
서지수는 이혼을 하더라도 공평하게 진행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이는... 네가 하는 짓으로 봤을 때 같이 살게 둘 수 없어.”
“결혼한 5년 동안 넌 한 푼도 못 벌었잖아.”
진수혁은 무정하게 말을 이었다.
“근데 왜 내가 번 돈을 절반이나 너한테 줘야 하는 건데?”
“너랑 하늘이 생활하는 거, 전부 내가 돌봤어.”
서지수가 대꾸했다.
진수혁은 차가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래서?”
‘그래서라고?’
서지수는 그가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게 느꼈다.
“그렇게 뜯어 간 돈으로 네 엄마 치료비를 낼 생각이라면, 꿈 깨.”
진수혁은 이혼합의서를 테이블 위로 던졌다.
“그게 무슨 뜻이야?”
“너한테 줄 돈은 없어.”
진수혁이 그녀의 의문을 풀어주듯 덧붙였다.
“받아들이지 못하겠으면 소송이라도 걸던가.”
서지수는 잠시 멍하니 굳었다가 몇 초 뒤 모든 걸 깨달았다.
처음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물었을 때부터 지금 이렇게 속내를 드러내기까지의 시간 동안, 그는 이미 재산을 빼돌려 놓았을 테다.
룸 앞에서 그 이야기를 딱 들었을 때부터 수상하다 싶었다. 이제 보니 전부 미리 계획된 함정이었다. 그는 그녀가 사실을 알아차리고 따져 묻길 기다렸다가 바람피우는 것을 정당화할 작정이었을 것이다.
‘진수혁, 정말 대단하네.’
“됐어.”
서지수는 이제 모든 걸 간파했다. 진수혁이 하는 일에는 빈틈이 없으니 파헤쳐 봐야 헛수고일 게 뻔했다.
“사인해. 난 아이만 있으면 돼.”
진수혁은 서명했다.
그의 필체는 본인만큼이나 깔끔하고 보기 좋았지만 서지수는 구역질만 느껴졌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두 사람은 가정법원에 가서 이혼 서류를 접수했다. 그는 붙잡지도,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평소처럼 아무런 파동도 없이 덤덤했다.
서지수는 서명하는 그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나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어쩌면 저렇게 오랫동안 잘해줄 수 있었을까. 우리가 쌓아온 감정은 결국 뭐였던 걸까.’
“이혼 신청이 접수됐습니다. 5월 13일부터 30일 동안, 어느 한쪽이라도 이혼을 원치 않으면 여기서 신청을 철회하실 수 있습니다.”
직원은 이혼 접수증을 내밀며 이어 설명했다.
“6월 13일부터 7월 12일 사이에 증명서류를 가져오시면 이혼증을 발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신청하지 않으면 이혼 취소로 간주해요.”
두 사람은 한 장씩 서류를 건네받았다.
가정 법원을 나설 때, 서지수는 그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친구 소채윤을 찾아갔다. 이렇게 큰일을 겪고 나니 마음을 터놓을 사람이 필요했다.
소채윤의 집에 도착하니, 막 잠에서 깬 소채윤이 그녀의 어두운 안색을 보고 걱정스레 물었다.
“왜 이렇게 축 처졌어?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나 진수혁이랑 이혼했어.”
서지수는 담담히 말했지만 마음은 칼에 베인 듯 아팠다. 진심으로 좋아했던 사람이니 괴롭지 않을 수 없었다.
소채윤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농담하지 마. 세상 사람들이 다 이혼해도 진수혁은 못 해. 걔 널 엄청 아껴줬었잖아. 손에 들면 깨질까, 입에 물면 녹을까 노심초사하던 걔가 이혼을 허락할 리가 없지.”
“진짜야.”
서지수가 진지한 표정을 짓자, 소채윤도 농담이 아님을 깨닫고 서둘러 자세히 물었다.
서지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털어놓았다.
듣고 난 소채윤은 급한 성격답게 바로 폭발했다.
“헐, 진수혁 진짜 인간 말종이네.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 요구를 할 수가 있어! 그 인간, 네가 소유리랑 어떤 사이였는지도 알아?”
“알아.”
서지수가 아는 사람들은 전부 조사해 놨었다.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해? 제정신이 아니네!”
소채윤은 갈수록 분개하더니 갑자기 서지수의 손을 잡고 벌떡 일어섰다.
“야, 당장 가서 그 인간 두들겨 패자! 안 그러면 내 속이 안 풀려.”
“네가 걔 근처나 갈 수 있겠어?”
서지수가 냉정하게 일깨웠다.
“...”
소채윤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여간 사람이 너무 잘 나도 문제야.’
소채윤은 잠깐 침묵하고 나서 진지하게 물었다.
“너희 둘 정말 공동 재산이 없어? 일부러 거짓말로 속이려는 건 아닐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야.”
서지수는 이미 모든 걸 다 체념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 왜 안 중요해?”
소채윤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설령 있어도, 걔 성격상 내가 돈을 손에 쥘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게다가 이혼 소송은 증거 모으기도 쉽지 않고, 간신히 모은다 해도 대부분 정황 증거라 직접적인 효력은 없을 거야.”
이혼 소송도 말로만 쉬웠다. 특히 진수혁이 상대라면 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허점을 남기지 않는 사람이라, 소유리에게 쓴 돈이며 그녀와 동거했다는 사실이며, 어떤 증거도 쉽게 잡히지 않을 게 뻔했다.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이를 데리고 이 삐뚤어진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내가 보기엔 그냥 이혼하지 말고 본처 자리에 버티고 앉아서, 신나게 걔 돈 쓰는 게 좋을 것 같아. 소유리는 평생 숨겨진 첩으로 만드는 거지!”
소채윤은 점점 진수혁이 못된 놈이라고 확신했다.
“그럼 딱 걔 요구대로잖아.”
서지수는 냉철했다.
소채윤은 그 말에 잠깐 멈칫하더니 정말 그러네 싶어서 열불이 치밀었다. 예전에는 그가 세상에서 제일 괜찮은 남자인 줄 알아서 더 화가 났다.
“그럼 이후엔 어떻게 할 건데? 정말로 그 둘이 잘 먹고 잘살게 내버려둬?”
“우선 집부터 옮길 거야.”
서지수는 어젯밤 다 울고 난 뒤부터 이미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왔다.
“그리고 자리 잡으면 일도 구할 거고.”
“바람피운 쪽은 걔인데, 왜 네가 나가야 해?”
소채윤은 그 생각에 반대했다.
“그냥 하늘이랑 거기 쭉 살아. 걔가 뭘 어쩔 건데.”
“직접 내쫓진 않겠지만 분명 어떻게든 나를 몰아내려고 만들 거야.”
서지수는 어제 일을 겪으며 진수혁을 다시 보게 되었다.
“젠장, 진짜 재수 없는 인간이야!”
소채윤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
“걔 보고 세상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했던 내가 바보지.”
서지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 그녀도 진수혁이 자신을 아버지라는 나락에서 건져준 빛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 알았다. 그는 또 다른 나락이었다.
돈을 들고 도망치며 어머니와 그녀를 내팽개친 아버지.
결혼 중에 재산을 빼돌리고 다른 여자를 받아들이라 요구한 남편.
어쩌면 이렇게도 닮았을까.
소채윤이 그녀를 도와 이익을 최대로 챙길 방안을 고민하던 중 휴대폰이 울렸다. 병원 번호인 걸 확인한 서지수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
“서지수 님, 진 대표님이 어머님 다음 달 이후 치료비 지원을 중단하신다고 하셔서요.”
의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 병원에 오셔서 이후 치료에 대해 상의할 수 있을까요?”
“지금 바로 갈게요.”
서지수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었다.
곧장 소채윤에게 일이 있다고 알린 뒤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와 함께 사무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진수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