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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오거스트는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여자들이 넘어오지 않고는 못 배기는 제일 자신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랑...” “하암.” 그때 강하나가 분위기를 깨트리며 대놓고 하품을 했다. 오거스트가 무슨 생각인지 이미 눈치를 챘던 그녀였다. “미안한데 내가 어젯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요. 기회가 되면 또 얘기하죠. 그럼 이만.” 그녀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얘기한 다음 오거스트가 옆에 있든지 말든지 전혀 상관없는 태도로 잠을 자기 시작했다. 오거스트는 그녀의 말에 미소를 지은 채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러다 잠시 후 강하나가 정말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자 그제야 자기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뒷좌석에서 모든 상황을 다 지켜본 이정인은 강하나의 단호한 태도에 속으로 감탄을 했다. 그는 남자의 유혹을 칼 차단하는 데 있어 강하나보다 더 단호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강하나는 비행기가 뜨기 전부터 시작해 착륙할 때까지 쭉 잠만 잤다. 그래서 비행기에서 내리고도 여전히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 “기사님이 곧 도착한다고 하니까 조금만 기다리래요.” “그래.” 강하나가 아직 비몽사몽 한 얼굴로 답했다. 그런데 그때, 웬 팔 하나가 그녀의 어깨에 걸쳐졌다. 이에 강하나가 고개를 돌려보니 오거스트가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는 다른 한 손을 들어 그녀에게 초대장을 건네주었다. “소진시에 개인 별장이 하나 생겨서 토요일 저녁 8시에 파티를 열까 하는데 하나 씨도 와요.” 오거스트는 매사 당당하고 늘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강하나에게 거절당할까 봐 심장이 두근거리며 조금 초조했다. “미안한데 난 사람 많은 곳은 질색이라서요. 사양할게요.” 아니나 다를까 강하나는 고민하는 척도 하지 않고 그를 거절했다. 이에 오거스트는 자존심이 좀 상했지만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밀어붙였다. “꼭 오라는 말은 아니에요. 하지만 이 초대장은 가지고 있어요. 이건 하나 씨 거니까.” 그는 이 말을 남긴 후 선글라스를 끼며 앞으로 유유하게 걸어갔다. 이정인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남자가 봐도 멋있어. 안 그래요?” 그러자 강하나가 관심 없다는 얼굴로 답했다. “응, 전혀 안 그래. 느끼하기만 해.” 아마 오거스트를 느끼하다는 말로 형용할 수 있는 사람은 강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잠시 후 강하나와 이정인을 데리러 온 차 한 대가 도착하고 두 사람은 기사님과 인사를 나눈 후 차에 올라탔다. 차를 보낸 사람은 일전 강하나와 함께 협력한 적이 있는 영화 투자자인 이재혁이었다. 그는 강하나의 열혈팬이기도 하고 또 이정인의 친구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교외에 있는 한 별장이었는데 해당 별당은 이재혁이 소유하고 있는 별장 중 하나로 그는 강하나가 이곳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별장을 대청소시킨 후 자신의 집에 있는 도우미 두 명도 이곳으로 보냈다. 차에서 내린 강하나와 이정인은 마치 동화 속에서나 볼법한 별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별장은 외관부터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게다가 주위는 온통 나무로 뒤덮여 있어 고요한 것이 운치도 있었다. 또한 별장 내부는 따뜻한 원목 인테리어로 되어 있었고 가구들도 전부 엔틱한 느낌의 가구들뿐이었다. 강하나는 이곳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온 후 바로 이재혁에게 전화를 걸어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대표님, 고마워요. 이런 예쁜 별장을 다 빌려주시고.” 이재혁은 전형적인 호쾌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뭘요. 하나 씨가 오는데 제가 그 정도도 못 해 드릴까 봐요. 대신 새로운 영화를 제작할 때 저를 가장 먼저 불러주셔야 합니다.” “제 영화의 수익률이 그렇게 높지는 않을 텐데요?” “영화 자체는 그럴지 몰라도 영화 곳곳에 들어간 PPL로 제가 그때 이득을 좀 어마어마하게 봤거든요.” 강하나의 영화는 큰 수익률을 자랑하지는 않았지만 이재혁처럼 광고로 돈을 버는 사람이 많았기에 투자자와 광고주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인기가 많았다. “알겠어요. 그럼 제일 먼저 연락드릴게요.” 전화를 끊은 후 강하나는 이정인과 함께 도우미가 내온 과일을 먹으며 티비를 시청했다. “여기요. 감독님 포도 좋아하시잖아요. 이거 다 드세요.” “고마워.” 강하나는 미소를 지으며 포도를 건네받았다. “다은 씨는 주연이 아닌데도 독보적으로 인기가 많았어요. 드라마에서 커플이었던 배우와도 케미가 끝내줬고요. 상대 배우를 보는 표정이 정말 사랑에 빠진 표정이던데 대체 어떤 마음으로 연기를 한 건가요?” 그때 티비에서 서다은이라는 이름이 들려왔다. 이에 이정인은 볼륨을 조금 키우며 강하나에게 말했다. “감독님, 저 여자 요즘 이정 그룹에서 엄청 밀어주고 있는 신인 여배우 아니에요? 거의 뭐 티비를 틀었다 하면 나오던데.” 강하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첫사랑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연기했어요.” “첫사랑이요?” 사회자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물었다. “네. 학창시절 때 같은 학교에 다녔던 사람이었어요. 아성 빌딩에서 저한테 사랑한다고 고백해주었거든요. 저한테는 정말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에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어느 고등학교를 나오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운성 고등학교요.” “운성 고등학교?” 이정인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박지헌 대표도 운성 고등학교 출신 아니었어요? 알겠다!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라서 그렇게 챙겨줬던 거구나.” 강하나는 쑥스러운 듯 미소짓는 서다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서다은의 첫사랑이 바로 박지헌이야.” “그러면 더 말이 되네요.” 이정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뭔가 이상하다는 듯 강하나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잠깐만요. 바,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강하나가 포도를 한 알 집어 먹으며 다시 한번 얘기해주었다. “너 청력에 문제 있어? 박지헌이 바로 서다은의 첫사랑이라고. 그리고 지금은 연인이고.” “...” 이정인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머리가 하얘졌다. ‘첫사랑? 연인? 설마...!’ “그러니까 박지헌 대표가 바람이 났다 이 말이에요?” “그래.” 강하나가 자조하듯 피식 웃으며 답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다 말해줄게. 나, 이미 이혼합의서에 사인했어. 그리고 며칠 뒤면 박지헌도 사인하게 되겠지. 그럼 그때부터 우리는 완전히 남남이 되는 거야.” ‘바람에 이혼까지... 대체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된 거야.’ 이정인은 그제야 강하나가 왜 박지헌의 곁을 떠나고 다시 복귀하려고 했는지 깨달았다. “저한테는 조금 더 빨리 말해주시지 그러셨어요...” “하하하, 대표님이 저만 예뻐하다뇨. 그런 거 아니에요. 다른 배우들이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그런데 정말 다정한 분이신 건 맞아요.” 그때 티비에서 서다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맑고 듣기 좋은 목소리였지만 지금은 그 목소리가 무척이나 거슬렸다. 이정인은 얼른 리모컨을 들어 티비를 껐다. “죄송해요. 저는 정말 모르고...” 강하나는 그 말에 웃으며 계속해서 과일을 먹었다. 그런데 고개를 살짝 숙이는 순간 눈물 한 방울이 포도 위에 떨어졌다.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눈물이 떨어진 포도를 집어 먹었다. “네가 왜 죄송해. 네가 바람이 난 것도 아닌데. 난 그냥 이번 기회에 너한테 확실하게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야. 난 이제 더 이상 박지헌의 아내가 아닌 강하나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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