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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박지헌은 유 집사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서 있자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말을 건넸다. “하나한테 전화하라고요. 내 말 안 들립니까?” 그 말에 유 집사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대표님, 일단은 위층으로 먼저 올라가 보시는 게...” “위층에 뭐가 있는데요?” 유 집사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하자 박지헌은 혀를 한번 차더니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2층으로 올라가 침실 문을 열어젖힌 그는 그만 제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방 안이 너무나도 허전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준 곰 인형은?” 곰 인형은 그가 강하나를 위해 디자이너에게 직접 메시지를 보내 구한 한정판 곰 인형이었다. 유 집사는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박지헌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어 한달음에 옷장 앞으로 달려가 손잡이를 확 열어젖혔다. 옷은 많이 걸려있었지만 그중에 강하나의 옷은 하나도 없었다. 서랍도 열어봤지만 전부 다 박지헌의 옷뿐이었다. 아무리 집을 나갔다고 해도 그 많은 옷을 다 가지고 나갔을 리는 없었다. 이렇게 속옷 한 벌 남기지 않을 리는 없었다. 박지헌은 다시 발걸음을 옮겨 이번에는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곳은 애초에 사용한 적이 없는 것처럼 깨끗했다. “하나 물건들은 다 어디 있어요?” 유 집사가 답했다. “필요한 것들만 남겨두고 거의 다 팔아버리셨습니다.” “팔아?” 박지헌은 그 말에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아무리 요 며칠 소홀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일을 크게 만드는 건 선을 넘은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버린 물건 중에는 어렵게 구한 것도 매우 많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감히?!’ 박지헌의 두 눈이 분노로 무섭게 번뜩거렸다. 그는 자신이 이제껏 그녀를 너무 오냐오냐하며 떠받든 게 문제였다며 돌아오면 두 번 다시 그렇게 애지중지 대해주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 퍼졌고 박지헌은 발신자가 박정재인 것을 확인하더니 이내 이를 꽉 깨물었다. 하지만 막상 전화를 받을 때는 태도를 누그러뜨리며 예의를 갖췄다. “네, 아버지.” “다은이는 잘 챙기고 있는 거니?” “네, 걱정하지 마세요. 잘 챙기고 있어요.” 그 말에 박정재가 목소리를 한 톤 낮추며 근엄하게 얘기했다. “그래. 절대 하나한테 들키지 말아. 근 몇 년간 이정 그룹이 이만큼의 이익을 낼 수 있었던 건 다 너희 둘의 기사 덕분이니까. 만약 너희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기고 그게 발각되면 주가에 큰 영향이 미칠 거야. 그러니 처신 잘해.” “네, 아버지. 항상 조심하고 있습니다. 하나가 다은이와 제 사이를 알게 되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겁니다.” “그래. 이번 주말에 하나 데리고 본가로 와라. 함께 식사나 하자.” “네, 알겠습니다.” 아버지와의 통화를 끝낸 후 박지헌은 음산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유 집사는 그에게 뭐라고 얘기를 하려다가 그 얼굴을 보고 도로 말을 삼켰다. ... 아침 8시. 이정인은 소파에서 꿀잠을 자다가 누군가가 깨우는 소리에 눈을 비비적거리며 일어났다. 그러고는 바로 앞에 서 있는 미인에 입을 떡 벌린 채 넋을 잃고 말았다. 어제의 강하나는 줄곧 미소를 짓고 있기는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텐션이 낮고 우울한 기운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강하나는 마치 사람이 바뀐 것 같았다. 물론 화장 때문에 그런 것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어제와는 달리 무척이나 밝고 에너지가 넘쳐보였다. 하긴 아무리 전 세계를 매료시킨 천재 감독이라고 해도 그녀는 이제 고작 24살이었다. 아무리 결혼을 했다고 해도 그녀는 여전히 매력 있는 여자였다. “왜 여기서 자? 침실이 두 개나 더 있는데.” 강하나의 질문에 이정인이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저 원래 소파에서 자는 거 좋아해요. 그리고 제가 여기 있어야 감독님이 절 필요로 하시면 언제든지 달려가죠.” 사실 이정인이 이곳에서 잔 건 간밤에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그녀의 방 쪽에서 들리는 희미한 흐느낌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제껏 강하나가 우는 모습 같은 건 본적이 없었기에 그는 그녀의 우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이대로 문을 두드리고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고민 끝에 그는 결국 모른척하기로 하고 그 대신 방에서 이불을 가지고 나와 소파에서 자기로 했다. 그런데 자는 와중에도 한동안은 여전히 그녀의 우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 그래서 그는 강하나가 다음날 스케줄은 아마 취소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그녀는 너무나도 멀쩡한 얼굴로 그의 앞에 서 있었고 오히려 기운이 펄펄 흘러넘쳤다. ‘내가 헛걸 들은 건가? 아니면 뭐 기력을 회복하는 약이라고 먹은 건가?’ 강하나는 확실히 운 게 맞고 아무런 약도 먹지 않았다. 그저 교묘하게 화장으로 다크서클과 빨간 눈가를 가린 것뿐이었다. “내가 애도 아니고. 그리고 이제 그만 씻어. 아침 먹으러 가자.” 강하나는 이정인이 씻는 동안 휴대폰 전원을 켰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박지헌이 건 전화와 보낸 메시지들이 한가득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알림들을 전부 삭제한 후 마침 화장실에서 나온 이정인과 함께 방을 나섰다. 그러고는 간단하게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다시 올라와 캐리어를 들고 공항으로 향했다. 이정인은 공항으로 가는 길 박지헌이 또다시 강하나를 불러낼까 봐 마음을 잔뜩 졸이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번에는 전화벨 한번 울리지 않았고 무사히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강하나는 간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기에 좌석에 앉자마자 바로 담요를 덮으며 잠을 자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이정인이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불렀다. “감독님! 저기 오거스트요!” 오거스트란 말에 강하나가 눈을 살포시 떴다. 그리고 마침 흥미로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이국적인 남자와 두 눈이 마주쳤다. “또 만났네요? 이거 아무래도 당신과 연을 맺으라는 하늘의 계시 같네요. 저는 오거스트예요. 레이디는요?” 오거스트가 손을 내밀며 대뜸 라우헨어로 말을 걸어왔다. 이에 강하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이내 그의 손을 맞잡으며 똑같이 라우헨어로 인사했다. “강하나예요.” “라우헨어 할 줄 아시네요?” 오거스트가 신기하다는 듯 웃으며 자신의 자리가 아닌 그녀의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그와 함께 따라온 승무원은 그의 행동에 뭐라고 얘기를 할까 하다가 어차피 퍼스트 클래스를 예매한 사람은 세 명밖에 없어 아무 말 없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라우헨에서 3년 정도 살았어요.” 강하나가 대답했다. 그때 이정인이 로베렌어로 끼어들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이정인이에요.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저와 일행인 이분은 아주 유명한 감독님이세요.” “정인아.” 강하나는 정식으로 복귀하기 전까지는 아직 신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감독님이세요?”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오거스트는 그녀가 감독이라는 말에 아주 조금은 진지한 표정을 지었지만 말투는 여전히 가볍기 그지없었다. “하나 씨처럼 예쁜 감독은 태어나서 처음 봐요.” 강하나는 이에 지지 않고 똑같이 대꾸했다. “저도 오거스트 씨처럼 잘생기고 스타일 좋은 촬영 감독은 처음 봬요.” 그리고 오거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그를 아래에서 위로 쓱 훑었다. 다만 오거스트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의 눈빛은 무척이나 차가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눈빛과 태도가 오히려 오거스트의 흥미를 끌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남녀노소 상관없이 늘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그래서 그런 자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한 강하나의 태도에 순간 승부욕 같은 것이 돌았다. 오거스트는 강하나를 자신에게 단단히 매료되게 만든 다음 그녀에게 냉혹하고 무정한 자신의 또 다른 면모를 확실하게 보여줄 심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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