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드문 휴일, 송유리는 침대에 파묻혀 달콤한 늦잠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유리야! 오늘 쉬는 날이지?”
황이진이었다.
“네... 맞아요.”
송유리는 반쯤 감긴 눈으로 겨우 대답했다.
“우리 집에 놀러 와! 구경 좀 시켜 줄게!”
“아니에요... 괜히 번거롭게 할까 봐...”
“무슨 소리야. 지금 별장에 나 혼자 있어. 대표님은 바빠서 여긴 아예 오지도 않아.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와!”
‘고인성이 없다면 편하게 놀다 올 수 있겠네.’
송유리가 고민하자, 황이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거다! 내가 지금 차 보낼게!”
결국 송유리는 황이진의 초대를 거절하지 못하고 그녀가 보내준 차를 타고 별장에 도착했다.
별장은 고풍스러운 중식 스타일로 꾸며져 있었다. 정원에는 잔잔한 물소리가 들렸고, 비단잉어가 노니는 호수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황이진과 송유리는 도우미들이 준비한 다과를 즐기며 정원을 배경으로 여유로운 오후를 만끽했다.
“나 스파 예약했어. 같이 가자.”
“전 괜찮아요. 그냥 여기서 쉴게요.”
“알았어.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도우미한테 말하고, 심심하면 산책해도 돼. 근데 뒤뜰은 가지 마. 거기 엄청 사나운 개가 있거든.”
“알겠어요. 맘 편히 스파 다녀오세요.”
황이진은 스파를 받으러 갔고 송유리는 혼자 남았다.
송유리는 지루한 나머지 정자에 앉아 물고기 먹이를 호수에 던지고 있었다.
호수 속 비단잉어들은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었다. 평소에도 먹이를 많이 받아먹은 게 분명했다.
먹이를 다 주고 나서도 할 일이 없자, 송유리는 근처를 산책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벼락 맞은 듯한 털을 가진 보더 콜리가 깡충깡충 뛰며 그녀에게 달려왔다.
“어? 엇...”
송유리는 본능적으로 몇 발짝 물러섰다.
보더 콜리는 그녀의 발치에서 멈추더니, 고개를 들고 송유리를 에워싸고 한 바퀴 돌며 킁킁 냄새를 맡았다.
송유리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예 숨을 참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멍! 멍멍!”
한 바퀴를 돌고 나서야 강아지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두 번 짖었다. 그러고는 작은 머리를 그녀의 다리에 살포시 비볐다.
“응?”
‘공격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순한 아이였어?’
강아지가 먼저 다가오자, 송유리는 마음을 놓고 조심스럽게 무릎을 굽혔다. 그녀의 손길에 보더 콜리는 말랑말랑한 머리를 그녀의 손에 기대며 얌전히 있었다.
강아지의 털은 부드럽고 폭신해서 만질수록 감촉이 아주 좋았다.
송유리는 슬쩍 정원을 바라봤다.
‘여기가 뒤뜰과 가까워도 아직 뒤뜰까지 온 건 아닐 거야... 게다가 이 강아지가 이렇게 순한 걸 보니, 이진 언니가 말한 그 사나운 강아지는 아닌 것 같아.’
안심된 그녀는 더욱 과감하게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아이고 귀여워라! 이름이 뭐야?”
“멍멍!”
“진짜 예쁘게 생겼네?”
“멍멍!”
“개인기 해볼래? 손!”
예상치 못하게 강아지가 진짜로 앞발을 내밀자, 송유리도 손을 내밀어 살짝 잡아보며 감탄했다.
‘역시 보더 콜리는 똑똑하단 말이야!’
“누가 함부로 만지라고 했지?”
갑자기 들려온 차가운 목소리가 송유리와 강아지 사이의 따뜻한 분위기를 산산이 조각냈다.
송유리는 깜짝 놀라 손을 얼른 거두며 뒤를 돌아봤다.
웬 남자가 역광을 받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햇살이 그의 날렵하고 긴 실루엣을 감싸 그의 모습을 정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 분위기만으로도 시선을 압도하게 했다.
“죄송합니다...”
송유리는 황급히 사과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제야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고인성 대표님? 이진 언니는 별장에서 고인성을 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왜 갑자기 나타난 거지?’
송유리의 맑고 예쁜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며 얼굴을 돌렸다. 고인성과 시선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혼냈나?왜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그래?”
“아닙니다...”
입으로는 아니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푸념하고 있었다.
‘혼낸 게 아니라고?’
그러나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용기는 없었다.
고인성은 조금 전 자기 말에 설명을 보탰다.
“강아지를 만지기 전에 손은 씻었어? 코코는 나이가 많아서 쉽게 병에 걸릴 수 있거든...”
“조금 전, 차 마시기 전에 손을 씻긴 했습니다만...”
송유리는 살짝 기죽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몰래 고인성의 표정을 살폈다.
“괜찮을까요?”
고인성은 그녀의 작은 표정 변화가 귀엽게 느껴졌는지, 차갑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다시 씻고 와.”
“네! 바로 씻고 올게요!”
송유리는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황급히 손을 씻으러 달려갔다. 그녀는 비누칠까지 꼼꼼하게 한 후 다시 돌아왔다.
고인성은 잔디밭에 자연스럽게 앉아있었다. 한쪽 다리를 세우고, 다른 쪽 다리는 쭉 뻗은 채 손에 공을 들고 강아지와 놀아주고 있었다.
송유리가 돌아오기 전까지 강아지는 고인성과 완벽히 호흡을 맞췄지만 그녀가 다시 나타나자마자 강아지는 고인성을 단번에 외면하고 송유리에게 달려갔다.
앞발을 신나게 폴짝거리며 두 다리로 점프해 그녀의 다리에 머리를 비비며 ‘만져줘!’라고 온몸으로 애교를 부렸다.
“...”
송유리는 무릎을 굽혀 강아지의 말랑말랑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동물의 순수한 애정은 정말 거부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강아지가 갑자기 다시 고인성을 향해 달려갔다.
그제야 고인성의 얼굴에도 드물게 미소가 번졌다.
“코코! 이제야 나한테 관심이 생긴 거야?”
강아지는 고인성 앞에서 신나게 점프하며 빨리 공을 던져달라는 듯 애교를 부렸다.
고인성이 공을 던지자, 강아지는 날렵하게 뛰어올라 공을 멋지게 낚아챘다.
송유리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손뼉을 쳤다.
“코코? 넌 진짜 똑똑한 강아지네?”
고인성은 강아지가 공을 자신에게 가져올 거라고 확신했지만 강아지는 우아하게 몸을 돌려 고인성을 무시한 채 송유리에게 다가갔다. 마치 주인이 바뀐 것처럼 공을 송유리 손에 얌전히 놓았다.
‘이런... 내가 불청객이었어?’
송유리도 살짝 당황했다. 강아지의 진짜 주인이 바로 옆에 있는데, 강아지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것 같아 괜히 미안해졌다.
그녀는 눈치를 보며 고인성을 바라봤다.
“아까 내가 했던 것처럼 공을 던지면 돼.”
그 말은 곧 허락이라는 뜻이었다.
송유리는 고인성의 동작을 흉내 내며 공을 던졌다. 그러자 코코는 공을 받을 때마다 새로운 묘기를 선보였으며, 마치 자신이 얼마나 잘하는지 자랑이라도 하는 듯했다.
“코코는 원래 낯을 가리는 아이인데, 유독 너를 잘 따르네.”
송유리는 코코의 머리를 실컷 쓰다듬었고, 코코는 해맑은 표정으로 더 가까이 다가와 애교를 부렸다.
어딜 봐도 겁이 많은 강아지 같지 않았다.
“정말요? 저는 코코가 원래 이렇게 사람을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고인성은 잔디밭에 앉아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그의 눈빛은 어느새 부드러워졌고 얼굴에는 편안함이 감돌았다.
회사 업무로 쌓인 스트레스와 걱정이 눈앞의 풍경 덕분에 모두 사라진 듯했다.
사실 그는 할아버지가 자신의 별장에 여자를 데려왔다는 소식에 불쾌감을 느껴 그동안 이곳에 오지 않았다.
오늘은 우연히 코코를 보러 왔는데, 뜻밖에도 송유리와 마주친 것이었다.
그는 문득 생각했다.
‘이 여자가 내 삶에 들어오는 게... 어쩌면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그런 생각이 막 피어날 무렵, 갑자기 잔디밭에 누군가 나타났다.
긴 생머리에 화려한 메이크업, 몸에 딱 붙는 섹시한 슬립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바람에 흩날리는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걸어왔다.
“대표님, 오셨어요?”
황이진은 고인성에게 다가와 그의 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일정이 있어서 바로 인사드리러 오지 못했어요. 화난 거 아니죠?”
고인성은 미간을 찌푸렸다.
얼굴에 드리운 그늘은 그의 실망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황이진의 손을 차갑게 밀쳐내며 물었다.
“누군데 내 집에 있는 거지?”
“저예요... 황이진이요.”
이름을 듣자, 고인성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할아버지가 그의 동의도 없이 데려온 그 여자였다.
고인성은 고개를 돌려 송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이 사람은?”
황이진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답했다.
“제가 초대한 손님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