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휴게실에 있던 직원들은 황이진이 한턱내겠다는 말에 금세 들떠버렸다.
“언니, 갑자기 이렇게 통 큰 이유가 뭐예요? 혹시 대단한 사람이라도 만난 거예요?”
“우리 언니 실력이면, 대기업 회장님도 손쉽게 사로잡겠지!”
“언니 정말 대단해요!”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어디로 갈지, 어떤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할지 이야기꽃을 피우며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 시끌벅적한 소음 속에서, 구석에 앉아있는 송유리의 감정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가 떠난 휴게실에는 송유리만 홀로 남았다.
적막이 내려앉은 그 공간에서, 마침내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린 누군가가 조용히 다가왔다.
따뜻한 손길이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감싸주었다.
“유리야,왜 울고 있어?”
송유리가 고개를 들어 바라본 건, 황이진의 매혹적인 얼굴이었다.
황이진은 송유리가 비트 타운에 처음 왔을 때부터 유일하게 챙겨주던 동료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송유리를 도와준 건, 황이진뿐이었다.
“어제 술 한 병을 제대로 배달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이번 달 월급에서 170만 원이 차감된대요. 그럼 학비를 낼 수 없게 되거든요...”
“에이, 돈 때문이라면 내가 빌려줄게.”
“하지만...”
송유리는 입술을 깨물었고 선뜻 돈을 빌리기가 망설여졌다.
그러자 황이진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무 말 말고 받으라니까. 돈은 송금했어. 나중에 여유 생기면 갚으면 돼. 별일도 아닌데 울지 마. 네가 우는 걸 보니 내 마음이 아프다.”
송유리는 핸드폰 화면에 찍힌 400만 원 송금 내역을 보고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썼다.
한편으로 자신처럼 가진 것 없는 사람을 위해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고마워요! 이진 언니, 돈은 꼭 갚을게요. 정말이에요.”
“어? 근데 유리야, 너 목에 그게 뭐야? 왜 이렇게 빨갛지?”
송유리는 얼른 손으로 목을 감쌌다.
“저... 아마 모기에게 물린 거 같아요.”
“요즘 모기가 엄청 독한가 보네...”
황이진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이따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이진 언니, 저는... 너무 피곤해서요. 집에 가서 쉬고 싶어요. 괜찮을까요?”
“당연하지. 가는 길 조심해. 안전하게 들어가.”
황이진은 물건을 챙겨 가볍게 손을 흔들며 유유히 떠났다.
송유리도 자신의 물건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비트 타운 출구에 거의 다다랐을 때, 송유리는 송혁수를 마주치고 말았다.
송혁수는 바로 그녀를 키워준 아버지였다. 그는 지금 한 대기업 고위직 앞에서 아첨하며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마치 얼굴에 철판을 깐 듯, 자존심을 내던진 모습이었다.
송유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못 본 척하고 멀리 돌아가 조용히 지나가려고 했지만, 그럴 틈도 없이 그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유리야?”
송유리는 고개를 숙였고 감히 그를 쳐다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송혁수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지금 이런 곳에서 일한다고? 정말 염치도 없다! 우리 송씨 가문에 창피를 주려고 작정했냐?”
송유리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해명했다.
“아니에요. 저... 전 그저 여기서 서빙만 했어요. 다른 일은 정말 아무것도... 저는...”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마침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젯밤 있었던 일들이 떠오르자, 스스로조차 떳떳할 수 없었다.
송혁수는 차가운 비웃음을 던졌다.
“어때? 말문이 막히지? 집에서는 이나의 목걸이를 훔치고, 밖에서는 이런 추잡한 짓이나 하고 다니고... 정말 기가 막혀! 네가 우리 집에서 쫓겨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만약 아직도 우리 송씨 가문에 있었다면, 네 덕에 망신당할 뻔했어!”
“저... 전 목걸이를 훔치지 않았어요. 그건 제가 가져간 게 아니에요.”
“뭐라고? 목걸이에 발이 달려 네 베개 속으로 들어가기라도 했다는 거야? 정말 뻔뻔스럽기 짝이 없네. 어쩌다가 너 같은 애를...”
송유리는 그의 눈에 서려 있는 뿌리 깊은 혐오를 마주했다. 마치 그녀의 가슴에 차가운 칼날이 계속해서 꽂히는 것 같아 오랫동안 아팠다.
그녀는 눈앞이 흐려졌다.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송유리에게도 한때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가정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송혁수는 낯선 소녀를 데리고 집에 돌아왔다.
“사실 너는 우리 송씨 가문의 딸이 아니야. 병원의 실수로 두 가문의 아이가 뒤바뀌었어. 너와 우리 친딸의 인생이 그렇게 바뀐 거야.”
그날 이후, 송유리는 자신이 송씨 가문의 진짜 딸이 아닌 가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새로 나타난 소녀, 김이나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없었고 어머니마저 그녀가 초등학생일 때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완전히 고아로 자라온 아이였다.
송유리는 그저 송씨 가문에서 김이나의 빈자리를 대신했던 대타에 불과했다.
김이나가 돌아오자, 송유리는 하루아침에, 가족에게서 낯선 사람이 되어버렸다. 가족의 관심과 사랑은 모두 김이나에게로 쏠렸고, 송유리는 점점 투명 인간이 되어갔다.
김이나는 이미 연예계에서 이름을 날리는 유명한 배우였다. 그녀는 예쁘고, 착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반면 송유리는 부모님의 사랑에서 밀려났고, 가문에서 투명한 존재가 되어갔다.
그녀의 삶은 마치 창문 너머 남의 행복을 훔쳐보는 듯했다. 언제나 밖에서만 바라볼 뿐, 따뜻한 온기 속에 설 자리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이나가 자신의 비싼 목걸이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모두가 집안을 샅샅이 뒤진 결과 그 목걸이는 송유리의 베개 속에서 발견되었다.
송유리는 억울했지만 아무리 변명해도 소용없었다. 모두의 실망스러운 눈빛 속에서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송혁수는 단호하게 그녀를 송씨 가문에서 쫓아냈다.
그렇게 송유리는 정말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고아가 되어버렸다.
송유리는 여전히 억울함을 삼키며 말했다.
“저는 정말... 그 목걸이를 훔치지 않았어요.”
“대표님 나오십니다! 길을 비켜주세요!”
비트 타운의 보안요원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빠르게 정리했고, 그 소란은 송혁수의 비난을 끊어놓았다.
송혁수는 송유리의 말을 듣지도 않고, 온 신경을 온통 엘리베이터 쪽에 집중하고 있었다.
“고 대표님이 여기에? 이 중요한 사실을 이제야 알다니! 내가 왜 돈 회장님에게 아부하고 있었지? 고 대표님께 바로 가면 되는데!”
경성 재계의 황태자, 고인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 사이에서 엘리베이터를 나섰다.
사람들은 그의 등장에 숨을 죽였다. 188cm의 큰 키와 차가운 분위기는 사람들 속에서도 단번에 눈에 띄었다.
고인성은 경성 재계 최고 권력 가문인 고씨 가문의 유력한 후계자였다.
소문에 따르면 고인성은 여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차가운 성격이었다.
너무나 절제된 삶을 살다 보니, 일부 사람들은 그가 수행자처럼 살고 있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주변에 아름다운 여자가 그렇게 많은데도 꿈쩍하지 않는 게 가능할까 싶어서였다.
이런 남자는 약점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었고, 누구도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고인성이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오자, 그의 188cm 큰 키는 사람들 속에서 단연 돋보였다.
수려한 이목구비와 날 선 눈매, 눈꼬리에 자리한 작은 눈물점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차가운 매력에 묘한 아우라를 더했다.
여자들은 그의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와, 진짜 잘생겼다!”
“헉, 고인성이 이렇게 멋있을 줄은 몰랐어!”
“잘생기긴 했는데, 전혀 다가갈 수 없는 포스잖아. 혹시 여자 자체에 관심이 없는 거 아니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고 대표님을 유혹하려 했던 여자들이 하나같이 어떤 꼴이 됐는지 잊었어?”
“진짜 무섭긴 해. 그냥 멀리서 보는 게 좋겠어.”
송유리도 멍하니 그쪽을 바라보고 있다가 우연히 고인성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송유리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저 남자는... 어젯밤 그 남자잖아? 저 남자가 바로 고인성이라고?’
방금 들었던 소문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자, 송유리는 급히 시선을 돌렸고,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가려 했다.
‘고인성을 유혹하려는 여자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면... 조용히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그 남자를 멀리해야 해.’
한편, 고인성은 걸음을 멈추고 송유리가 있던 방향을 바라보았다.
명서원은 고인성의 시선을 따라 그쪽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눈에는 그저 고인성을 동경하며 볼이 빨개진 여자들과, 그와 인연을 만들고 싶어 안달이 난 남자들뿐이었다.
“대표님, 뭘 보고 계신 거예요?”
고인성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누군가... 익숙한 얼굴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