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벌써 스물여덟인데, 결혼은 언제 할 거냐?”
“글쎄요. 결혼할 생각 없어요.”
“그럼 어떡할 생각이야!”
고인성은 가죽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어 앉아 긴 손가락은 검은 염주를 느긋하게 돌리고 있었다.
“계속 몰아붙이면 출가해 버릴지도 모르죠.”
“이놈의 불효자식!”
“별일 없으면 이만 돌아갈게요. 말 좀 줄이고 잠이나 많이 자세요. 연세도 있으신데 자꾸 욱하시면 건강에 안 좋아요.”
고인성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뒤돌아보지 않고 본가 저택을 떠났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고성진은 분노로 온몸을 떨었다.
“저놈을 정신 차리게 만들어야겠어!”
...
“11번 룸, XO 한 병!”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 송유리는 상대방이 ‘1번’이라고 했는지 ‘11번’이라고 했는지 정확히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큰 소리로 다시 물었다.
“몇 번이라고요?”
하지만 상대방은 다른 일에 바빠 그녀를 쳐다볼 겨를조차 없었던 터라, 되려 그녀를 향해 짜증 섞인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멍하니 뭐해? 빨리 가! 손님이 급하다잖아. 늦으면 네 일당에서 깎일 줄 알아!”
“아닙니다! 지금 바로 가요!”
송유리는 작은 체구로 술병을 들고 부지런히 뛰었다.
1년 전, 송씨 가문이 진짜 딸을 찾으면서 그녀는 자신이 그저 빈자리를 채운 대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안 좋은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고, 결국 송씨 가문에서 쫓겨난 그녀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지금 그녀가 벌어들이는 돈은 생활비와 학비를 충당할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 돈이 없으면 밥도 못 먹고 학비도 내지 못할 처지였다.
그저 두 개의 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간단한 일이었고, 잘못 찾아갔다면 다시 돌아오면 될 일이니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송유리는 우선 1번 룸 앞에 도착했다.
문 앞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 두 명이 서 있었고 그들의 경계 태도는 꽤나 날카로웠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저기요. 혹시 술 주문하셨나요...”
문이 열리더니,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를 안으로 확 끌어들였다.
“어서 들어와! 곧 도착하실 거야.”
“저는 주문하신 술 서빙하러...”
룸에 있던 남자는 그녀의 말을 들으려 하지조차 않았고 그녀를 강제로 안쪽으로 끌고 가더니 혼잣말하듯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속옷은 안쪽 방 침대에 준비돼 있어. 얼른 갈아입어. 오늘밤 어떻게든 성사시켜야 해. 돈 걱정은 하지 마. 절대 손해 보지 않게 해 줄게.”
“네? 뭐라고요?”
“됐어. 이제 준비해. 서둘러!”
그 남자는 말을 끝내자마자 룸을 빠져나갔고 송유리는 그 자리에 홀로 남겨졌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난 그냥 서빙을 왔을 뿐인데... 그래도 이 술을 주문한 건 맞을지도 몰라.’
송유리는 가지고 온 술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룸은 방이 두 개 있는 스위트룸이었다. 겉은 KTV처럼 꾸며져 있었지만 안쪽은 고급스러운 스위트룸이었다.
술을 내려놓고 나가려던 송유리는 그제야 밖에서 문을 잠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황한 그녀는 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저기요! 왜 문을 잠그셨어요? 문 좀 열어주세요!”
“사람 없어요? 누구 없어요!”
“규정상 이룸은 잠그면 안 됩니다! 제발요! 저 좀 내보내 주세요!”
송유리는 온 힘을 다해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그녀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제 그녀의 외침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체력을 아끼고 차분하게 탈출 방법을 생각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혹시 납치당한 거야? 도움을 요청해야 하나?’
하지만 근무 시작 전에 핸드폰을 제출해야 했기에 그녀는 지금 통신 수단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룸 안에는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향기가 떠돌았다. 그 향을 맡을수록 머리가 어지럽고, 숨쉬기가 점점 답답해졌다.
그때, 잠겨 있던 문이 갑자기 열렸다.
송유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일어나 문 쪽으로 뛰어갔다.
“저는 여기 직원이에요! 저 좀 내보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 앞으로 던져졌다.
그 남자는 열린 문을 향해 달려가던 송유리의 품에 그대로 쓰러졌다.
남자의 키는 거의 190cm에 육박해 보였고 몸도 탄탄했다. 가슴팍이 어깨에 닿자, 단단한 근육 때문에 어깨가 찌릿했다.
그가 엎드린 채로 어깨에 기대어 있었기 때문에, 송유리는 얼굴을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송유리는 간절한 눈빛으로 문 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저기요! 저 아직 안 나갔어요! 잠깐만요! 제발 저 좀 내보내 주세요!”
하지만 대답 대신, 문은 차갑게 닫혀버렸다.
송유리는 남자를 밀어내려 했지만, 성인 남자의 체중을 이겨내기는 버거웠다. 너무나도 무거워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겉으로는 날씬해 보였지만 막상 몸에 닿으니 큰 바위 같았고, 이러다 정말 깔려 죽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숨이 막혔다.
“저기요. 스스로 일어나실 수 없겠어요?”
“너무... 더워...”
“아마 에어컨 온도가 높아서 그럴 거예요.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제가 동료에게 온도 조절을 부탁할게요.”
“네 몸에서... 좋은 향이 나...”
남자의 손이 갑자기 송유리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두 사람 사이의 적당한 거리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송유리는 거의 그의 품에 안긴 듯 밀착되었다.
얇은 옷감 너머로도 남자의 체온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마치 불꽃이라도 닿은 듯 뜨거웠고 규칙적인 심장 박동은 그녀의 귓가에까지 진동처럼 퍼졌다.
송유리의 심장도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이렇게 가까이 남자의 온기를 느낀 건 처음이었다.
그녀의 몸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송유리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듯 발버둥 쳤다.
“놓아주세요!”
송유리는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균형을 잃은 두 사람은 그대로 부드러운 카펫 위로 쓰러졌다. 가쁜 숨결 사이로, 송유리는 가까이서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창백할 만큼 하얀 피부, 조각처럼 완벽한 이목구비, 깊고 선명한 눈매... 무엇보다 눈꼬리에 자리한 작은 눈물점은 묘한 매력을 자아냈다.
처음 보는 이 남자의 외모는 그야말로 비현실적이었다.
송유리는 숨조차 잊은 채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남자는 가늘게 눈을 뜨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리고 어느새 차갑게 굳은 표정에, 입꼬리를 살짝 올려 냉소를 지었다.
이미 정신을 차린 듯, 그의 눈빛은 한결 서늘했다.
“네가 바로 오늘 밤 나를 모실 여자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돈 때문에 몸을 파는 여자라... 저렴하게 구네...”
“짝!”
송유리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과 함께 저도 모르게 남자의 뺨을 힘껏 때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갑작스럽게 뺨을 맞자, 남자의 고개가 옆으로 확 꺾였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눈동자는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감히 나한테 손찌검을 해?”
송유리는 그의 섬뜩한 눈빛에 겁을 먹었지만, 입술을 꽉 다물고 말없이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막 일어나려는 순간, 남자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채며 다시 끌어당겼다.
“아!”
중심을 잃은 그녀는 하필이면 남자의 품으로 넘어졌다.
그의 차가운 웃음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닿았다.
“쳇! 아닌척하더니 밀당에 아주 능숙하네?”
“저리 가요!”
송유리는 온몸으로 저항했지만, 남자는 더욱 힘을 주어 그녀를 붙잡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코끝을 스치자,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가 그를 더욱 자극했다.
“네... 네 몸에서 나는 이 향기는 뭐야?”
송유리는 여전히 발버둥 쳤지만, 남자는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고 얼굴을 그녀의 목덜미를 묻었다.
“이런 향기로 나를 유혹하려고?”
“이것 좀 놔요! 저는 그쪽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이중 장치라니... 할아버지가 이번엔 정말 공을 들였군...”
남자는 실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는 점점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좋아. 그걸 노린 거라면 성공했어.”
송유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체... 뭐 하려고요?”
남자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얼굴에 씌워져 있던 마스크를 벗겨내고 거칠게 입술을 맞췄다.
그의 입술은 부드럽고 따뜻했지만, 그 속에는 독이라도 섞여 있는 듯 그녀의 정신을 점점 갉아먹었다.
그녀는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저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