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그의 애가 아니었어
이연아는 거침없이 강찬우를 저격했고 이에 성시연은 고개를 내저으며 가라앉은 기분으로 방금 상자에서 본 내용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이연아는 다 들은 후 입이 쩍 벌어지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도 어쨌든 친구 편을 들어줘야 하니 억지로 몰아붙였다.
“내가 볼 때 천벌 받을 사람은 네 친아빠야. 그리고 강찬우 아빠도 너희 엄마를 좋아했었다며...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너무 몰입하지 말아.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성시연은 가슴이 꽉 막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지만 답답한 마음은 좀처럼 뚫리지 않았다.
엄마의 유품을 확인한 뒤 그녀에겐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생겼는데 바로 친아빠를 찾는 일이었다. 아빠를 찾아서 엄마가 생전에 부치지 못한 그 편지들을 매정한 아빠에게 전해줘야 한다. 적어도 본인이 양심 없는 인간이란 걸 알아채야 하고 한 여자의 인생을 저버렸다는 걸 깨달아야 하니까.
이때 문득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 선생님 맞네요? 의사 가운을 입은 모습만 봐서 정직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퇴근하면 이런 곳에도 오네요?”
성시연은 뜬금없이 나타난 이하윤을 쭉 훑어보았는데 파격적인 노출 의상에 요염한 자태를 내뿜었다. 그런 그녀에게 좀처럼 호감이 생겨나질 않았다. 아마도 이 여자가 강찬우의 연인이라서 그런가 보다...
이연아는 시큰둥한 성시연의 표정에 대뜸 말을 꺼냈다.
“선생님, 정말 어디서든 선생님 환자분을 볼 수 있네요? 의사는 이런 곳에 오면 안 된다고 누가 정했나요? 사람이라면 다 스트레스를 풀 때가 있잖아요, 안 그래요?”
한편 이하윤은 성시연과 친한 듯 옆자리에 앉았다.
“선생님 찬우 씨랑 보통 사이 아니죠?”
너무 직설적인 질문에 이연아가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이봐요, 그게 그쪽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잔말 말고 얼른 가던 길 가세요.”
이하윤은 입을 삐죽거렸다.
“저번에 병원에서부터 말해주고 싶었거든요... 무심코 찬우 씨 휴대폰을 봤는데 선생님 사진이 들어있었어요.”
성시연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뭐라고요?”
‘찬우 씨 휴대폰에 어떻게 내 사진이 있어? 그 사람은 날 죽도록 미워하잖아!’
이하윤은 일부러 뜸 들이며 말을 아꼈고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성시연은 그녀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만약 정말 강찬우의 휴대폰에서 성시연의 사진을 봤다면 라이벌로 여겨야 하는 게 정상 아닐까? 왜 전혀 적대감이 안 느껴지는 걸까?
그녀는 사진에 관해 더 캐묻지 않고 위로 삼아 떠보듯이 물었다.
“이제 막 수술했는데 이런 곳에 놀러 오면 찬우 씨가 뭐라 안 해요?”
이하윤은 크게 웃으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하하, 찬우 씨가 왜 날 간섭하겠어요? 설마 내가 찬우 씨 애를 지웠다고 여기는 건 아니죠?”
성시연은 또다시 멍해졌다.
“그럼... 아니에요?”
이하윤이 어깨를 들썩였다.
“당연히 아니죠. 나도 그러고 싶긴 하네요. 찬우 씨 애를 가지면 재벌가에 발을 들일 수도 있잖아요. 그 아이 아빠는 소문난 플레이보이예요. 절대 그 누구도 책임질 성격이 아니죠. 내가 재수 없게 걸려든 것뿐이에요.”
성시연은 이하윤이 누구 애를 임신했었던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온통 두 가지 생각뿐이었다.
첫 번째로 이하윤은 강찬우와 연인 사이가 아니라는 것, 두 번째는 강찬우의 휴대폰에 그녀의 사진이 들어있다는 것...
그렇다면 강찬우도 실은 그녀를 죽을 만큼 미워하는 건 아닌가 보다. 성시연은 문득 기분이 좋아지고 강찬우를 향한 죄책감이 더 짙어졌다.
잠시 후 이하윤은 느끼한 남자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이연아는 그런 그녀를 대놓고 야유했다.
“저런 여자들 딱 질색이야. 어디서 친한 척인데? 딱 봐도 이 바닥에서 놀다 남은 쓰레기이면서!”
성시연은 아무 말 없이 여전히 이하윤이 했던 말만 되뇌었다. 강찬우의 휴대폰에 정말 그녀의 사진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