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오늘 온 쇼핑몰은 작업실에 네 정거장이나 떨어진 곳에 위치했었다.
만약 점심 시간에 전에 임지아가 전화로 약속을 잡는 것을 듣지 않았다면 난 두 사람이 나한테 감시 카메라를 설치한 건 아닌지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마주쳤으니 인사는 해야했다.
임지아는 내가 들고 있는 카메라 가방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선배님도 사진 찍는 걸 좋아하세요?”
“그냥 둘러본 거야.”
“잘됐네요.”
임지아는 주한준에게 눈빛을 보냈다.
“카메라를 잘못 고를까 봐 걱정됐는데, 선배님이 한 분 도와주시면 안 되요?”
임지아가 주한준에게 말했다.
이 브랜드의 카메라 가격은 대부분 다섯 자릿수였다. 그건 임지아의 두 달치 월급과 비슷했다. 임지아가 이렇게 자신있게 말하는 거보면 분명히 주한준이 계산할 것이다.
“미안, 내가 아직 밥을 안 먹어서.”
나는 임지아의 제안을 거절했다.
“여기 직원분한테 물어봐. 나보다 더 전문적이고 친절하셔.”
임지아는 애써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제 생각이 짧았어요.”
그렇게 나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선물을 사긴 샀는데, 어떻게 줄지 아직 문제였다.
초대도 안 했는데 남의 생일 파티에 생뚱맞게 나타날 수는 없었다. 이런 어리석은 짓은 옛날에 해본 적이 있었지만 말이다.
주한준과 사귀고 맞은 첫 번째 그의 생일에 그는 나한테 먼저 집으로 돌아 가라고 함축적으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별로 유쾌했던 기억은 아니었다.
그때, 카카오톡 알림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엄겨울이 생일 초대장을 보낸 것이었다.
[내일 저녁에 시간 있어?]
사실 생일 파티에 별로 참석하고 싶지 않았지만, 선물을 주려면 파티에 참석 해야만 했다. 선물을 다른 사람한테 대신 전달해 달라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누구누구 참석 하는데?]
[세 네명 정도 올 거야. 모두 네가 아는 사람들이야.]
엄겨울은 생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마 내가 돈을 쓰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주소 보내줘.]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문자를 보냈다.
공교롭게도 장소는 지난번 심화연이 나를 초대 했던 레스토랑이었다.
사실 그 레스토랑 셰프의 솜씨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왠지 그의 생일 파티가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음 날이 찾아왔다.
하던 일을 끝낸 후 나는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선배님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어차피 선배님이 도착하기 전에는 파티가 시작 되지 않을 거예요.”
김가온이 말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려 한다고 얘기를 꺼내려던 찰나, 임지아가 사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선배님 오늘 저녁에 약속이 있으세요?”
임지아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출발해요. 겨울 형님이 신신당부 했으니 꼭 안전하고 정확하게 레스토랑까지 모실게요.”
이 집돌이도 뜻밖에 수다를 떨 때가 있었다.
차는 달리고 달려 저녁 7시 30분 쯤에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룸 안에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는데, 엄겨울을 제외하고 같은 반 여학생이었던 방민아와 낯 익은 얼굴의 한 남자도 있었다.
모두 다 동갑내기였다.
엄겨울은 나와 김가온을 발견하고 한걸음에 마중을 나왔다.
“배고프지? 이제 음식을 준비하라고 할게.”
“형, 급해 하지 마세요. 선배님이 선물을 가지고 왔어요.”
김가온이 말했다.
그의 말에 엄겨울은 깜짝 놀랐다. 그래도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그게 정말이야? 괜히 돈 쓰지 않아도 되는데.”
“형, 표정 관리 좀 해 주시겠어요?”
엄겨울은 김가온을 노려보았다. 그런 다음 나를 쳐다 보며 말했다.
“어서 자리에 앉아.”
나는 그에게 선물을 건넸다.
“반장, 생일 축하해.”
엄겨울의 시선은 내가 준비한 카메라에 향했다. 하지만 그는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왠지 기분이 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라이카 카메라야. 겨울이 형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네?”
옆에 있던 한 남자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방 문이 저절로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문에 집중되었다.
잠시 후, 주한준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시선은 엄겨울의 손에 들린 카메라 가방을 향했다. 순간 그의 눈빛이 가늘게 떨려왔다.
“역시 어디선가 선배님 목소리가 들린다고 했는데 진짜네요.”
임지아는 주한준의 팔짱을 낀 채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바로 옆방에 있었다. 마치 사전에 미리 계획한 것처럼 공교로웠다.
“이게 바로 인연 아니겠어?”
엄겨울이 말했다.
“준한아, 괜찮다면 술을 한잔 할래?”
“그래도 괜찮아?”
주한준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알아 챌 수 없었다.
“대표님께서 오늘 나를 단단히 망신 시키는 거 아니야?”
엄겨울은 농담을 던졌다.
말을 마치고, 두 사람은 한쪽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았다.
메인 테이블.
임지아는 자리에 앉자마자 엄겨울의 자리에 놓여져 있던 카메라를 발견했다.
“저거 선배님께서 며칠 전에 까다롭게 고르고 고르다가 산 카메라인데 엄겨울 씨한테 주려고 샀던 거였네요.”
그 말에 엄겨울의 눈빛이 흔들렸다.
“고르고 또 골랐다고요?”
임지아는 워낙 붙임성이 좋았다.
“네, 맞아요. 점심 시간에 선배님께서 멀리 있는 쇼핑몰까지 가서 산 거예요. 직원 말을 들어보니 아주 오랫동안 고민 했다고 했어요.”
그 말에 엄겨울은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너무 빤히 바라보는 바람에 쑥스럽기까지 했다.
어쨌든 답례품이기 때문에 가격 차이나 너무 많이 나면 안 되었다. 그래서 꽤 신중하게 고른 것인데 임지아가 떠들썩하게 말 하는 바람에 조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는 속으로 빨리 음식을 먹고 빨리 집에 가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그때, 김가온이 불쑥 말을 걸어왔다.
“선배님, 선배님 자리는 여기에요.”
그는 엄겨울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바람에 모든 사람들이 시선이 마치 상의라도 한 것처럼 나에게 집중되었다.
8인실이었기 때문에 빈자리가 두 개나 더 남아 있었다. 하지만 엄겨울 옆자리에 앉지 않으면 그의 체면이 말이 아닐 것 같았다.
그래서 그저 고집을 피우지 않고 묵묵히 그의 옆자리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때, 주한준이 세심하게 임지아를 대신해 그녀의 식기를 헹구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술과 요리가 상에 오르고, 생일 파티를 한 다음,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열심히 밥만 먹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 배가 부르다싶었을 때, 임지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님, 엄겨울 씨 두 분 덕분에 오늘 저녁 잘 먹었습니다. 제가 한 잔 올릴게요.”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주스가 잔뜩 담긴 컵을 공손하게 위로 올리는 모습이 아주 귀여웠다.
임지아는 일부러 두 분이라는 글자를 더욱 강조했다.
밤새 가슴에서 맴돌던 불쾌한 감정이 갑자기 솟구쳤다.
엄겨울은 이런 내 기분을 눈치챘는지 해명하기 시작했다.
“임지아 씨, 오해세요. 저랑 진아는 그저 친구 사이일 뿐입니다. 마음만 받을게요.”
말을 마치고 그는 앞에 있는 술잔을 들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죄송해요. 저는 선배님이랑 만나시는 줄 알았어요.”
임지아는 깜짝 놀라 안절부절못했다.
임지아는 주한준이 데리고 온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를 뭐라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어린 아이와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주한준은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술잔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남 팀장님, 제가 시아를 대신해서 사과드리죠.”
말은 이렇게 하지만 태도는 조금 무례했다.
그래도 뭔가 성의를 표시해야 할 것 같아서 나도 그를 따라 술잔을 들고 말했다.
“반장 같은 훌륭한 청년이랑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나는 옆에 서 있는 엄겨울을 힐끗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