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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조태풍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차로 돌아가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회사로 가자!” 태진 그룹 본사. 김인영은 비서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대표이사 사무실로 들어갔다. 조수연을 본 순간 그녀는 그대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눈처럼 하얀 피부에 반달 같은 눈썹, 거기에 균형 잡힌 완벽한 몸매까지, 모든 것을 다 갖춘 그녀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차가운 분위기가 풍겼다. 김인영의 꾸며낸 아름다움과는 달리 조수연에게서는 타고난 귀티와 신성한 분위기마저 느껴졌다. 마치 천사가 이 땅에 강림하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김인영은 항상 자신의 외모에 자부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수연의 앞에 서자 처음으로 자격지심을 느꼈다. 조수연은 김인영이 말이 없자 귀찮다는 듯이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10분 시간을 줄 테니 사업 계획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세요.” 김인영은 자신이 초면에 실례했다는 것을 깨닫고 다급히 사과부터 했다. “대표님, 죄송해요. 일단 제 소개부터 할게요. 저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이 울렸다. 조수연은 김인영에게 조용히 하라고 눈짓을 보낸 뒤에 전화를 받았다.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은 만나보셨어요?” 만나서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급한 마음에 전화를 건 조태풍이 말했다. “수연아, 지금 하고 있는 일 일단 제쳐두고 나랑 좀 만나. 네 미래와 내 생사가 걸린 큰 일이야. 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조수연은 그 말을 듣고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바로 출발할게요. 엘리베이터로 가고 있으니까 구체적으로 설명 좀 해주세요. 제가 뭘 하면 되나요?” 조태풍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가 마음에 드는 청년을 한 명 만났는데 지금 싱글이래. 그 청년 한번 만나봐. 오늘 바로 결혼 약속까지 받아내면 더 좋고.” 결혼 약속? 조수연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할아버지, 오늘 처음 본 남자라면서 결혼 약속이라니요. 좀 성급한 거 아닌가요? 요즘 많이 힘드신 거 알아요. 하지만 너무 낙담하지 말아요. 분명 치료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제 걱정은 하지 말아요. 언젠가는 저와 맞는 사람을 만나겠죠.” 그녀는 할아버지가 사후의 일을 걱정해서 서두른다고 생각하고 일단 할아버지를 달래기로 했다. 조태풍은 조바심이 났다. 2천억이나 되는 치료비를 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사내였다. 절대 쉽게 볼 사내가 아니라는 얘기였다. 더 중요한 건, 그는 살고 싶었다. 이 나이에 몇 년 더 살겠다고 이러는 게 욕심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에게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현재 태진 그룹 내부에는 문제가 많았다. 그의 아들들은 회사를 관리할 능력이 안 되면서 혼자 그룹을 독차지할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조태풍이 이대로 세상을 떠난다면 조수연은 결국 여러 압박을 견디지 못할 것이고 그때가 되면 그룹 전체가 공중분해될 수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피땀 흘려가며 세운 회사가 산산조각이 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이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해두자. 지금까지 할애비가 너한테 억지로 뭘 강요한 적은 없지 않니? 내가 사람 보는 안목이 뛰어나다는 건 너도 알 테고. 그렇지 않았으면 혼자 자수성가해서 회사를 여기까지 끌고 오지도 못했어. 내 판단은 틀린 적이 없단다. 그러니 이 할애비를 한번 믿어보렴. 할애비가 이렇게 부탁하잖니!” 조수연은 가슴이 먹먹했다. 그녀에게는 큰 산처럼 든든한 분이었다. 초창기 창업 때 자금난에 시달린 적도 있었지만 차라리 야간 알바를 뛰더라도 친척들에게 손 한번 내민 적 없는 강직한 분이었다. 그런 끈기 덕분에 지금의 태진 그룹이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한 번도 누군가에게 부탁을 한 적 이 없었다. 그랬던 분이 지금 자신에게 애원하듯 부탁을 하고 있으니 기분이 착잡했다. 조수연은 눈시울을 붉히며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요, 할아버지. 할아버지 말씀을 따를게요. 할아버지가 그 사람이랑 결혼하라고 하면 그렇게 할게요.” 한편, 사무실. 조수연이 사무실을 나간 뒤, 김인영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동원할 수 있는 인맥은 총동원해서 열흘 만에 어렵게 따낸 기회였다. 그런데 자기소개도 하기 전에 상대가 인사도 없이 나가 버린 상황. 비서실 직원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말했다. “대표님은 급한 일로 나가셨으니 일단 돌아가세요.” 자존심이 상한 김인영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아직 일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나가셨다고요?” 불만이 담긴 말투에 직원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대표님께 해명이라도 바라세요? 그쪽이 필요해서 찾아온 입장이고 주제를 알아야죠!” 김인영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반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일개 비서실 직원이지만 태진 그룹 비서실이었다. 말 한 마디에 장영 물산 같은 중소기업은 송강시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될 수도 있었다. 김인영은 애써 미소 지으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조급해서 말실수를 했네요. 그럼 언제면 대표님을 다시 뵐 수 있을까요?” 비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다시 예약을 잡으셔야죠.” 또 최소 열흘을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였다. 김인영은 화가 났지만 겉으로 티는 내지 못하고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시 예약하고 찾아올게요. 안녕히 계세요.” 말을 마친 그녀는 어깨가 축 늘어져 건물을 나왔다. 한편, 산경 마을. 이장훈은 3년만에 다시 찾은 고향을 마주하고 기분이 착잡했다. 길을 걷다가 아는 얼굴을 만나 인사라도 건네려 했지만, 사람들은 그가 무슨 역병이라도 되는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피해갔다. 그는 3년 사이에 자신이 사람들 눈에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그는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 전혀 그가 기억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집이 맞나 싶을 정도로 대문은 쓰러져가고 있었고 마당에는 부서진 가구 파편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매번 집에 돌아오면 손을 씻던 수조와 수도꼭지도 망가져서 바닥에 찌그러져 있었다. ‘내가 없는 사이에 집에 강도라도 들었나?’ 그리고 보고 싶었던 부모님과 예령이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이장훈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큰소리로 불렀다. “아버지, 어머니, 집에 계세요?”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백발이 성성한 두 노인이 밖으로 나왔다. 두 노인은 이장훈을 보자마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며 달려왔다. “아들, 드디어 돌아왔구나!” 이장훈은 낯선 부모님의 모습에 당황하고 말았다. 그가 떠날 때는 검은 머리에 잘 정돈되어 있던 두 분이었는데 지금은 10년은 더 나이 들어 보였다. 이장훈은 죄책감에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울먹였다. “아버지, 어머니, 제가 불효 자식이네요. 걱정 끼쳐서 정말 죄송합니다.” 유옥란은 다급히 아들을 부축하며 말했다. “이게 뭐 하는 거야? 어서 일어나. 돌아왔으면 됐어. 그동안 고생 많았어, 아들. 배고프지? 지금 네가 좋아하는 장국 해줄게.” 이장훈은 어머니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 배 안 고파요. 예령이는요? 아직 자고 있어요?” 그러자 유옥란의 표정이 하얗게 질리더니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아들, 출소한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절대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마. 예령이는 걔 외삼촌이 와서 데려갔어.” 이순철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데려간 게 아니라 빼앗아갔다고 하는 게 맞겠지. 김유신 그 자식이 건달 열 명 정도 데리고 오더니 집안을 이 꼴로 만들고 예령이 빼앗아갔어. 네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안 찍으면 예령이 볼 생각하지 말래.” 상황을 전해들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정말 너무하네요!” 이순철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인영이 걔, 너한테 면회 갔다가 거절당하고 온 날이면 집에 와서 온갖 신경질을 부렸어. 네가 이혼을 안 해주고 있으니 우리도 맘 편히 살지 말라더라. 어쩌다가 그런 애가 우리 집에 들어온 건지!” 이장훈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제가 찾아가 볼게요!” 유옥란은 아들을 말렸다. “아들, 그러지 마. 나온지 얼마나 됐다고. 또 사고치면 큰일 나!” 이장훈은 어머니께 걱정 끼치기 싫어 말투를 바꿔서 말했다. “예령이를 데려오려고 가는 거예요. 걱정 마세요. 이혼 서류에는 이미 사인했어요. 그쪽과 다툴 이유도 없고요.” 유옥란은 그 말을 듣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잘 생각했어. 그럼 어서 가서 예령이 데려와.” 이장훈은 고개를 끄덕인 뒤에 서둘러 집을 나섰다. 그가 떠난 뒤에도 유옥란은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아까 장훈이가 마당 청소하면서 아무 말도 안 하더라고요. 난 너무 걱정돼요. 장훈이 안쓰러워서 어떡해요? 인영이 대신해서 감옥까지 갔다왔는데 결과가 이혼이라니… 말은 안해도 속은 얼마나 쓰리겠어요.” 이순철도 한숨을 쉬었다. “나도 그게 걱정이야. 새 출발을 할 수 있으면 그나마 괜찮을지도. 누구 괜찮은 처자 없으려나.” 두 사람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문앞에 호화 외제차 한대가 와서 멈추었다. 차 문이 열리고 조수연이 조태풍을 부축하며 차에서 내렸다. “여기가 이장훈 이 선생님 댁이 맞나요?” 이순철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손님을 맞았다. “우리 아들이 이장훈이긴 한데… 선생은 아닌데요?” 조태풍은 이 집이 맞다는 소리를 듣고 손녀를 이장훈에게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안 그래도 아들을 위해 새 출발을 격려해 주고 싶었던 노부부는 천사 같이 예쁜 조수연을 보고 이게 무슨 경사인가 싶었다. 물론 너무 현실감이 없는 얘기였기에 이순철은 이유를 여쭈었다. 조태풍은 이 집 아들이 자신의 목숨을 살렸다고 말했고 그제야 이순철은 부담을 내려놓고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린 좋아요. 며칠 후에 맞선 자리나 마련하죠. 가장 중요한 건 두 사람 의사니까요.” 조태풍은 이순철보다 마음이 급했다. “내일 구청에서 이혼 접수한다고 들었어요. 수연이를 그쪽으로 보낼게요. 접수 마치고 나오면 바로 만날 수 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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