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나는 입꼬리를 씰룩이며 미친 거 아니냐고 욕을 내뱉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대박 났고 모든 사람의 비웃음을 받던 그 ‘착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나오려는 욕을 참으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하지훈 대표님, 농담하지 마.”
“이호석은 되는데 왜 나는 안 되는 거야?”
하지훈이 갑자기 냉랭한 어조로 묻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방금 이호석에게 20을 가져오면 하룻밤 놀아준다고 했잖아. 그런데 내가 20억을 준다는데 왜 하룻밤같이 있어 주지 않겠다는 거야?”
나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흘겼다.
방금 이호석이 제시한 20억이 전 재산이고 그의 목숨과도 같다는 걸 알고 일부러 자극하려고 한 말인데 이 남자가 정말인 줄 알다니.
하지훈은 내 앞으로 다가와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집에 지금 돈이 많이 부족하지 않아? 네가 하룻밤만 같이 있어 주면 20억은 네 거야. 어때?”
나는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 그가 이러는 것이 단지 돈으로 나를 모욕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고 나는 알고 있었다.
가슴이 뻐근해지는 것을 애써 참으며 나는 그를 향해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우리 집은 지금 돈이 많이 부족한 게 맞아. 하지만 이런 식으로 돈을 벌지는 않을 거야.”
말을 마치고 난 나는 급히 룸을 뛰쳐나갔는데 눈물로 시야가 흐려졌다.
사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정말 이상하다.
예전에 나를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나를 아무리 모욕해도 별로 슬퍼하지 않았는데 하지훈의 수모는 달랐다. 그의 수모는 쉽게 내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나는 단숨에 1층 로비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는 배달복을 입은 오빠가 장천호, 이호석 등에게 둘러싸여 수모를 당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오빠는 돈을 받기 위해 그들에게 무릎을 꿇었고,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내가 지켜온 자존심과 교만이 와르르 무너졌다.
나는 입을 가리고 있었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오빠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 하지훈에게 모욕만 당하면 20억을 받을 수 있는데 내가 뭘 거만하게 굴겠는가.
나는 갑자기 몸을 돌려 필사적으로 위층을 향해 달려가며 하지훈이 아직 떠나지 않았기를 바랐다.
룸으로 뛰어 들어간 나는 하지훈이 소파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내가 돌아갈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너 날 미워하지? 내가 너한테 온갖 수모를 다 줘서 매우 밉지?”
하지훈이 대답하기 도전에 나는 또 한마디 했다.
“그래, 네가 우리 집 빚을 갚아 줄 수만 있다면 네가 어떻게 모욕하든 얼마든지 받아줄게.”
하지훈은 잔을 내리더니 웃으며 물었다.
“내 숨겨둔 애인이 되어줘도 돼?”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돼.”
그는 아내의 자리를 빼앗아 여신에게 주고 나를 남들에게 내세울 수 없는 숨겨둔 애인으로 만들었다.
얼마나 직설적인 수모인가.
다음 날, 아빠가 돌아오자마자 흥분해서 엄마에게 우리 집 빚을 다 갚았다고 말했다.
엄마는 너무 기뻐서 울면서 아빠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다.
아빠는 하지훈이 갚아줬고 좋은 거처까지 마련해줬다고 하셨다.
순간, 엄마는 하지훈을 높이 칭찬하며 하지훈이 나를 너무 사랑해서 우리 가족을 이렇게 도와줬을 거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그저 웃기만 했다.
오후에 하지훈의 기사가 나를 데리러 왔다.
부모님은 그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아직도 하지훈의 아내인 줄 알고, 하지훈이 나를 데려가서 함께 복을 누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하지훈의 애인이라는 것을, 그가 멋대로 모욕하고 소일거리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훈은 지금 우리 집의 예전 별장에 살고 있고 별장에 있는 집사 하인들은 모두 예전 그대로였다.
예전에 그들은 나와 함께 하지훈을 모욕했는데 하지훈이 그들을 내쫓지 않는 걸 보니 하지훈은 마음이 넓은 사람이었다.
그가 나에게도 그렇게 관대할지 모르겠다.
룸에 있을 때 그 남자의 수모를 생각하면 나는 기분이 다시 우울해졌다.
나는 이 하인들과 다르다. 그들은 기껏해야 말로 하지훈을 모욕할 뿐이었지만 나는 하지훈에게 욕도 하고 구타도 하며 여러 사람 앞에서 얼굴에 술도 뿌렸다.
내가 전에 했던 일을 떠올리면 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잘해줬을 텐데.
가정부 오영자는 나를 방까지 안내했다.
“아가씨, 대표님께서 안에서 기다리라고 했어요. 그리고...”
오영자는 말을 멈추었다.
“대표님이 돌아오기 전에 반드시 몸을 깨끗이 씻으라고 했어요.”
나는 슬픈 마음에 입술을 깨물며 명백한 모욕 앞에서 어쩔 수 없다.
그의 애인이 되기로 약속했으니 나는 존엄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 방은 나와 하지훈이 전에 묵었던 방인데 모든 것이 예전과 같으면서도 다르게 변했다.
예전에 침대 옆에는 하지훈이 자리를 깔고 잤고 나는 침대 위에서 잤다. 항상 높은 자세로 침대 옆에 반 발자국도 가까이 가지 말라고 그에게 경고했다.
이제 바닥에 깔았던 자리도 없어지고 내 오만도 사라졌다.
고분고분하고 내가 괴롭혀도 군말 없던 데릴사위 남편도... 이젠 없다.
기억을 더듬을수록 나는 마음이 쓰라려 욕실로 가서 샤워했다.
샤워를 마치고 난 나는 침대에 누워 하지훈이 돌아오기를 기다기며 애인이니까 애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하자고 마음 먹었다.
예전과 너무 다른 지금 상황에 마음이 쓰리지만 생각해 보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적어도 우리 집 빚은 다 갚았고 부모님도 안심하고 살 수 있으며 오빠도 더는 고생할 필요가 없고 돈다발 때문에 무릎을 꿇을 필요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니 내 마음이 조금 위로가 되었다.
하지훈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지난 며칠 지치고 바쁘게 뛰어다닌 나는 침대에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지만 나는 몸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어리둥절해서 눈을 떴는데 한눈에 나를 짓누르고 있는 사람이 하지훈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의 손은 내 옷 안에 있었다.
“너... 감히!”
조건반사처럼 나는 손을 들어 그를 때렸지만 곧 그가 치켜든 나의 손을 힘껏 잡았다.
그는 조롱 섞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초라해졌는데도 부잣집 아가씨의 성격은 여전하구나.”
눈앞의 낯익은 방과 낯익은 사람을 보며 나는 몇 초 동안 멍해 있다가 뒤늦게야 반응이 왔다.
‘그래, 이제 그가 이곳의 주인이고 나는 그의 천한 애인일 뿐이야.’
나는 손을 움츠리고 눈살을 찌푸리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는 코웃음 치더니 일어나 욕실로 갔다.
욕실 안의 물소리를 들으며 나는 긴장하여 손가락을 꼬았다.
사실 그를 좋아하기 시작한 후 나는 그의 터치를 절대 거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 마음이 맞아 해야 하는 이 순간이 그의 보복을 위한 굴욕적인 시간이 되어버렸다.
앞으로 닥칠 일을 생각하면서 나는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갈 수 없다.
얼마가 지났는지 그가 마침내 다 씻었고 욕실 문 여는 소리가 나의 신경을 자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