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룸 안의 사람들도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허정운의 싸늘한 시선이 꼿꼿이 지수현을 향해 있었다. 어두운 눈동자에는 분노가 가득 서려있었다.
지수현의 눈빛에는 의아함이 잠깐 스쳤다. 여기서 허정운을 마주칠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잠시 뒤 그녀는 덤덤하게 시선을 거두더니 아무 일 없다는 듯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그녀의 무심한 태도에 허정운은 약이 올라 낯빛이 퍼레졌다. 몇 걸음만에 지수현의 옆으로 가더니 그녀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향했다.
신설리의 눈빛이 차가워지더니 다급히 다가가 허정운을 가로막아 섰다.
“허 대표님, 지금 뭐 하시는 거죠?”
허정운은 냉랭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언성을 높였다.
“비키시죠.”
신설리는 차갑게 냉소를 지었다.
“수현이는 제 친구예요. 만약 허 대표님이 제 친구를 데려가고 싶으시다면 저한테도 마땅한 이유를 설명해 주셔야 하지 않겠어요?”
허정운은 여전히 냉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인내심이 바닥이 난 듯 보였다.
“마지막으로 말하겠습니다. 비키세요.”
두 사람이 서로 대치하는 모습을 보던 지수현은 이대로 가다간 신설리만 손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입술을 꾹 말아물며 말했다.
“설리야, 나 괜찮아. 금방 돌아올게.”
신설리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수현아…”
“걱정하지 마. 저 사람 나 어떻게 못 해.”
그 말을 끝으로 허정운은 그녀를 잡아끌고 문 밖으로 향했다. 지수현은 그 힘에 이끌려 나가다가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그 모습에 신설리는 속에서 다시 한 번 화가 끓었다.
그녀는 지수현이 정말 보는 눈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어떻게 허정운처럼 매너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지수현을 복도 끝까지 데려간 뒤 그제야 허정운은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지수현, 너 지금 유부녀인 거 몰라? 어제는 시승훈이랑 놀아나더니 오늘은 바에서 남자 호스트들이랑 찝적대고. 지금 나 일부러 엿 먹이는 거야?”
지수현은 그의 손길에 의해 빨개진 손목을 문지르며 덤덤하게 답했다.
“만약 그렇게 계속 이혼협의서에 사인 안 하면 앞으로 더 먹게 될 거야.”
허정운은 실소했다.
“앞으로 한 번만 더 다른 남자랑 이상하게 엮이면 내가 꼭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야!”
그 말에 지수현은 그저 웃어 보이더니 하나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네가 어떻게 날 후회하게 만들지 정말 궁금한데. 지 씨 가문으로 협박할 거야? 잊지 마, 네가 가장 사랑하는 지연정도 지 씨 가문 사람이야. 만약 네가 우리 집안에 해로운 일을 벌이면 걔도 슬퍼할걸. 진짜 그걸 바라는 거야?”
허정운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지수현이 지연정 얘기를 꺼낸 것 때문이 아니라 만약 지수현이 정말 떠나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다면 그에겐 그녀를 잡을 만한 능력도 명분도 사실 없다는 걸 갑자기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순간 허정운의 마음속에는 불안함이 증폭되었다.
하지만 그 불안과 초조함은 이내 밀려오는 분노에 의해 덮였다.
“이미 너한테 다 설명했잖아. 나랑 연정이 너한테 미안할만한 짓 한 적이 없다고!”
지수현은 살짝 귀찮아진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허정운, 나한테 그렇게 해명하지 않아도 돼. 너희 둘 일 나 하나도 관심 없어. 그냥 우리 언제 이혼하냐는 것만 알고 싶을 뿐이야.”
지수현의 싸늘한 태도에 그는 애써 가라앉힌 분노가 다시 올라왔다.
매번 만날 때마다 이 여자는 이혼 얘기만 꺼냈다. 이미 좋게 좋게 해명을 다 해줬는데도 전혀 듣지 않는 눈치였다.
생각할수록 허정운은 더 화가 나 지수현의 턱을 잡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을 맞췄다. 자꾸 헛소리만 해대는 붉은 입술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지수현은 허정운이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지라 입술에서 따뜻한 촉감이 느껴지자 감전된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하지만 곧바로 그녀는 허정운을 밀쳐버리고 그의 뺨에 따귀를 날렸다.
“짝!”
선명한 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서 울렸다. 분위기는 바닥을 쳤다.
허정운은 싸늘하게 지수현을 바라보았다.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벅벅 닦는 그녀의 행동이 그의 화를 더 돋웠다.
“지수현, 한 번만 더 그렇게 닦아봐!”
지수현은 그를 흘깃 바라보며 아무런 표정 없이 답했다.
“너도 나처럼 이렇게 개한테 물렸다면 넌 아마 지금쯤 샤워를 하고 있었을 걸.”
“너!”
허정운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지수현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냉기가 감돌았다.
예전만 해도 지수현은 아주 온화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그와 대화를 나누곤 했다. 지금처럼 날이 서있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
지수현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더 이상 허정운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차감게 말했다.
“나 내일 출근해야 돼. 다른 일 없으면 먼저 가볼게.”
그러고 허정운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고 바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려 했다.
“거기 서!”
허정운은 그녀의 앞으로 걸어가 그녀의 앞길을 막았다.
“언제 일을 찾은 거야?”
“너랑 무슨 상관인데?”
허정운은 애써 화를 억누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잊지마, 우리 부부야.”
지수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곧 아니게 될 거야.”
“지수현, 내 인내심도 한계가 있어!”
애써 화를 참는 허정운의 표정을 보는 지수현은 그의 모습이 꽤나 웃기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혼을 선택해. 그럼 더 이상 안 참아도 되잖아.”
“나 이미 똑똑히 말했어. 절대 이혼 동의 안 한다고!”
“그럼 참아!”
“…”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질 때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정운아, 수현 씨. 왜 룸에 들어가지 않고 여기 서있어요?”
지수현은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 서있는 사람은 기운철이었다. 그를 발견하자 그녀 표정에 서려있던 매서운 기운도 한결 사그라들었다.
기운철은 허정운의 가장 친한 친구들 중 한 명이었다. 전에 허정운이 다리를 다쳤을 때도 자주 와서 허정운을 돌봐주었다. 게다가 성격도 좋아 가끔 지수현과도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래서 지수현도 그를 꽤나 좋게 여기고 있었다.
그녀는 입가를 올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즐겁게 놀아요. 전 이만 가봐야겠네요.”
기운철 앞이라 허정운은 더 이상 지수현을 막아서지 않았다. 그녀의 뒷모습이 멀어지자 무표정으로 기운철을 바라봤다.
“왜 나왔어?”
“화장실에 가던 길이었는데 너랑 수현 씨가 다투는 걸 봐버려서. 더 심각해질 까봐.”
2초간의 침묵 뒤 기운철이 덧붙였다.
“정운아. 사실 수현 씨 너무 좋은 사람이야. 네가 다리를 다친 그 2년 동안 네 옆에서 널 돌봐준 거 다 수현 씨잖아. 네가 수현 씨 좋아하지 않더라도 조금 더 잘해줘.”
허정운은 싸늘한 눈빛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나도 잘 알고 있어. 이따가 일이 있어서 들어가진 않을게. 애들이랑 잘 말해줘. 계산서는 내 이름에 달아두고.”
허정운이 떠난 뒤 기운철은 그 자리에 한참 서있다가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룸으로 돌아갔다.
허정훈과의 마찰 때문에 지수현과 신설리도 기분을 망쳐 계산을 하고 바로 바를 떠났다.
신설리에게 대리운전을 불러준 뒤 지수현은 길가에서 택시를 잡았다.
택시를 기다릴 때 그녀는 내일부터 혼자서 운전을 하며 출퇴근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그녀의 옆에 멈췄다.
지수현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 자신이 부른 택시가 온 거라고 생각해 문을 열고 바로 차에 올랐다.
갑자기 밀려오는 익숙한 우드향에 그제야 고개를 급히 돌려 바라봤다.
옆에 앉아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는 미간을 좁히면서 바로 다시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차 안이 어두웠는지라 아까 오를 때만 해도 뒷좌석에 사람이 또 있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허정운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지시했다.
“센트뷰로 가죠.”
기사는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수현은 허정운을 꼿꼿이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이거 좀 놔주지?”
그녀는 속으로 땅을 치고 후회하며 자신을 욕하는 중이었다. 아까 다른 생각에 잠기지만 않았어도 이런 착오는 범하지 않았을 텐데.
“김 기사님, 차문 잠가주시죠.”
“찰칵”하는 소리가 울리자 허정운은 지수현의 손을 놓아주었다.
지수현은 애써 덤덤하고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허정운, 나 내일 정말로 출근해야 돼. 너 상대할 시간 없어.”
허정운은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아까 내가 술을 마셨으니까 오늘 밤에는 네가 나 좀 챙겨줘.”
지수현의 눈동자에는 불쾌함이 스쳤다.
“그럼 지연정한테 전화를 하던지. 걔는 너 직접 챙겨주고 싶을 텐데.”
챙겨준다는 단어를 일부러 강조하며 말했다. 허정운이 자신의 뜻을 분명 알아차릴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허정운은 차갑게 웃었다.
“참 아량도 넓지. 대체 지연정이 내 아내야, 아니면 네가 내 아내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