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집 가야지.”
지수현이 담담한 시선으로 신설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냥 집 가면 재미없잖아. 너 MY로 다시 복귀한 거 축하도 할 겸 곧 결혼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나는 거 축하도 할 겸 내가 에로스에 테이블 하나 예약했거든? 뉴페이스 모델들로 물갈이했다는데 이 언니가 한번 데려가 줄게!”
신설리는 입이 귀에 걸린 채 눈썹을 들썩이며 신나 했다. 모델들을 보자마자 바로 덮쳐버릴 것처럼 눈동자가 흥분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나를 데려가 주는 거 맞아? 네가 보고 싶은 건 아니고?”
지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웃으며 물었다.
신설리는 조금의 민망함도 없이 당당한 발걸음으로 다가오더니 그녀의 목을 팔로 감싸며 은근한 눈빛을 던졌다.
“친구야, 우리 사이에 너랑 내가 어디 있냐. 그리고 네가 전에 허정운 그 자식을 좋아했던 건 분명 네가 화려한 세상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오늘 이 언니가 식견 넓혀줄 테니까 나만 믿고 따라와. 내일 아침이면 허정운이 누군지도 잊어버리게 될걸?!”
지수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어. 그런 건 너 혼자 즐겨. 난 관심 없어.”
지수현이 그냥 떠나려고 하자 신설리는 다급히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잠깐만! 어차피 집 가도 할 일 없잖아? 그냥 나랑 같이 시간 보낸다고 생각해! 그리고 곧 이혼할 마당에 아직도 허정운을 위해 정조를 지킬 생각인 건 아니지?”
그럴 생각이 아니긴 했지만, 그녀를 쉽게 놓아주려 하지 않는 신설리를 바라보며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한 번만이야.”
신설리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지수현을 손을 움켜 쥐였다.
“좋았어!! 빨리 가자! 일단 저녁부터 먹고!”
두 사람은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에로스로 향했다. 발을 들이자마자 귀청을 찢을 듯한 음악 소리와 젊은 남녀들의 환호성이 들려왔고 현란한 조명 아래 스테이지에서 음악에 몸을 맡긴 채 본능적으로 몸을 흔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신설리는 곧장 지수현을 데리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에로스는 이층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일층은 스테이지와 테이블, 이층엔 보안이 비교적 철저한 룸과 투명한 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투명한 룸에선 아래층의 스테이지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감상할 수 있었지만,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적나라하게 밖에서 다 보이는 것이 결점이었다.
신설리와 지수현은 웨이터의 안내로 투명한 룸으로 들어갔고 곧 두 사람이 주문한 술과 남자 모델이 방으로 들어왔다.
준수한 외모의 두 남자 모델을 보자마자 신설리는 지수현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수현아, 내 말이 맞지? 넌 어떤 스타일이 좋아? 네가 고르고 나면 내가 나머지 할게.”
에로스의 남자 모델은 술 상대만 되어줄 뿐 밖에서 따로 만나지는 않았기에 누구나 춤을 잘 추거나 노래를 잘하거나 또는 마술을 잘 피우는 등 개인기를 가지고 있었다.
지수현은 담백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스캔했다가 웃으며 신설리를 바라보았다.
“아니면 둘 다 너 할래? 내가 봤을 땐 다 네 스타일인 것 같은데.”
“난 다 좋아. 좋은 건 같이 즐겨야지. 이렇게 하자. 너랑 가까운 모델은 너 하고 나랑 가까운 모델은 나 하고!”
신설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모델은 센스 있게 알아서 신설리와 지수현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안녕하세요. 제가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전 준걸이에요. 제가 무엇을 해드릴까요?”
남자는 눈웃음을 치며 지수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렇게 예쁜 손님을 난생처음 본 그는 흥분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게다가 한눈에 보아도 얼굴에 손대지 않은 자연 미인이었기에 오늘 밤 계 탄 거나 다름없었다.
테이블마다 이런 미녀라면 밖에서 따로 보자고 해도 기꺼이 따라나설 수 있을 지경이었다.
흥분에 겨운 그와는 달리 지수현은 무덤덤한 시선으로 그를 힐끗 바라보며 냉담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요. 그냥 가만히 앉아계시면 돼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그녀는 오늘 밤 신설리와 함께 이곳에 온 것이 후회스러웠다.
준걸은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미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그였기에 인츰 평정을 되찾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제가 노래 한 곡 불러드릴게요. 저 노래 제법 잘 부르거든요.”
“좋아요.”
지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하게 선곡한 노랫소리가 곧 룸 안을 가득 채웠다.
지수현의 맞은편에 앉은 신설리와 그녀의 남자 모델은 어느새 서로 과일을 먹여주는 사이로 발전했고 지수현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에 차마 두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녀는 고개를 앞으로 홱 돌리며 준걸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마침 지수현과 신설리의 룸을 지나던 양주헌은 무심코 안을 들여다보았다가 깜짝 놀라 제자리에 발걸음을 우뚝 멈추고 말았다.
지수현과 허정운의 비밀 결혼은 지씨 가문과 허씨 가문을 제외하고 허정운과 친한 몇몇 친구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만 허정운의 말로는 얌전하고 보수적이라던 지수현이 이런 펍에 왔다는 게 적잖이 충격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한쪽 입가를 위로 올렸다. 그에게는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긴 셈이었다.
지수현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옆의 룸으로 들어가자, 웃음기 섞인 전이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주헌, 너 인마 30분이나 늦었어. 오늘은 네가 쏘는 거다?!”
룸에는 전이경과 기운철, 그리고 낯선 사람은 접근하지 말라는 뉘앙스를 온몸으로 풍기며 차가운 얼굴로 술을 마시고 있는 허정운이 있었다.
그런 허정운을 뒤로하고 전이경과 기운철의 곁에는 짧은 미니 원피스를 입은 미녀가 앉아 있었다.
양주헌은 문을 닫아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를 차단했다. 그는 친구들의 곁으로 앉으며 허정운을 힐끗 바라보았다가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방금 밖에서 누구를 봤는지 알아?”
“누구를 봤는데?”
“헤어지고 가짜 임신 진단서를 조작해서 너한테 시집오려던 전 여자 친구?”
전이경이 감흥 없는 얼굴로 물었다.
줄곧 가벼운 만남을 즐겼던 양주헌은 예상치 못하게 한 연예인에게 잘못 걸려 곤경에 처하게 되었고 그 일로 양주헌의 어머니는 맞선을 통해 수준 맞는 집안의 여자와 결혼하라고 그를 강요하고 있었다. 어머니를 피해 회사에서 밤을 보낸 지도 벌써 며칠째였다.
“전이경, 너 죽을래?!”
양주헌이 인상을 쓰며 언성을 높였다.
“대체 누굴 봤기에 이래. 뜸 좀 그만 들여! 30분이나 지각한 주제에 벌주 안 마시게 하면 됐지. 뭘 그리 어물쩍거리고 있어. 수줍어하는 계집애처럼. 크크.”
전이경은 장난기가 더욱 짙어진 얼굴로 키득거렸다.
“안 믿어지겠지만... 나 방금 운정이 와이프 봤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술을 마시던 허정운의 동작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확실해?”
허정운이 냉기 흐르는 시선을 양주헌에게 던지며 물었다.
양주헌은 깨고소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랑 왔던데? 한 사람씩 남자 모델을 끼고 말이야. 지나갈 때 보니까 모델이 노래하는 모습을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더라. 운정아, 너 와이프 단속...”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정운은 술잔을 테이블에 쾅 내리치더니 몸을 벌떡 일으켜 룸을 나섰다.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이혼을 제기하지 않나 그를 차단하지 않나 이젠 하다 하다 술집에서 남자를 끼고 논단 말이야?! 지수현! 간이 부어도 제대로 부었구나!
양주헌은 벙한 표정으로 허정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옆의 전이경과 기운철에게 시선을 옮겼다.
“쟤 지연정 좋아하는 거 아니었냐? 지수현이 남자랑 논다는 게 이렇게 오버할 일이었냐?”
“아무리 지수현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지금 엄연히 부부인데 와이프가 바람이 나 봐라. 너 같으면 받아들일 수 있겠어?”
전이경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는 허정운의 행위가 좋아하는 마음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저 단순히 자기 여자가 뻔뻔하게 다른 남자와 놀아나는 걸 견디지 못하는 거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던 기운철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번득였다. 그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가 답답한 심정에 테이블 위의 술잔을 단숨에 비워냈다.
“참. 지수현이랑 같이 온 친구가 누구게? 내가 말하면 너희 깜짝 놀란다!”
“누군데?”
슬슬 구미가 당기는지 전이경이 눈동자를 반짝이며 물었다.
“신설리!!”
“뭐라고?!”
전이경은 얼굴을 와락 찌푸리더니 이를 악물고 물었다.
“신설리라고. 몇 년 전에 집안이 폴싹 주저앉은 걔 있잖아. 아, 그전에 같이 파티에도 참석했었는데. 너... 왜 그래?”
“아, 아니야. 그냥 물어봤어.”
전이경은 피식 냉소를 흘리며 한 글자 한 글자 어색하게 내뱉었다.
이어 그는 옆에 있던 미녀를 한 손에 끌어안으며 핸드폰으로 셀카 한 장을 찍더니 사진을 인스타에 게시했다.
“이경 씨, 지금...”
미녀는 깜짝 놀란 얼굴로 두 눈을 커다랗게 뜨며 촉촉한 눈빛으로 전이경을 바라보았다.
“오해하지 마. 단지 누군가에게 보여주려는 것뿐이니까.”
전이경이 쌀쌀맞게 대답하며 오해의 싹을 잘라버렸다.
미녀는 곧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씩씩거리며 밖에 나온 허정운은 아니나 다를까 옆의 투명한 룸에서 놀고 있는 지수현을 발견했다. 지수현은 섬섬옥수가 따로 없는 손가락으로 옆의 남자에게 과일을 먹여주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남자의 입술에 닿을 듯이 가까워지자, 허정운은 분노로 더 활활 타올랐다.
신설리가 지수현이 겉도는 모습에 진실게임을 놀자고 제안했고 게임에서 진 지수현에게 과일을 먹여주라는 벌칙을 시킨 것이었다.
다시 손으로 남자의 입에 과일을 먹여주려는 순간, 룸의 문이 벌컥 열리며 상이라도 엎을 듯이 분노로 가득 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