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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허정운은 멈칫하더니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지연정한테 연락해 봐.” 시애틀 지사는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지연정도 따라나섰다. 지연정은 여행할 겸 온 거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허정운을 따라 온 것이었다. 그것은 지사의 모든 직원이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곧이어 빠른 속도로 티켓팅을 마친 강수영은 지연정까지 픽업한 뒤, 공항으로 갔다. 열 시간이 넘는 비행을 거쳐, 비행기는 마침내 용강시 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장시간의 비행 동안, 강수영도 지연정에 대한 허정운의 다정다감함을 느낄 수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뒤, 그들은 공항 출구까지 이동했다. 사람이 몰릴 때, 허정운은 반사적으로 지연정의 앞을 막아서기도 했다. 지수현도 허정운과 함께 출장을 갔었다. 하지만 그땐 지수현이 허정운을 챙기기에 바빴고 허정운은 냉랭한 태도로 지수현을 대했다. 지수현보다도 지연정이야말로 허정운의 와이프 같았다. ...... 한편, 지수현도 공항의 다른 출구로 나왔다. 그녀는 브이넥 나시 원피스 차림에 선글라스를 기고 있었다. 옅은 미소까지 짓고 있는 그녀는 기분도 좋아 보였다. 신설리는 이미 공항에서 지수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수현을 보자마자 신설리는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신설리를 발견한 지수현도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캐리어를 끌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지수현이 신설리에게로 거의 다다랐을 때쯤, 신설리는 표정이 굳은 채로 지수현의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수현은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돌리자 공항 출구에서 나란히 나오는 허정운과 지연정의 모습이 보였다. 캐리어를 끌던 지수현의 손에는 저도 몰래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덤덤한 얼굴이었다. 신설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지수현은 신설리에게 말했다. “가자.” 지수현은 아무렇지 않았고 눈빛에도 별다른 정서가 드러나지 않았다. 신설리는 지수현이 정말로 허정운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은 것인지 긴가민가했다. 그녀는 황급히 지수현에게서 캐리어를 빼앗으며 말했다. “쇼핑 많이 했나 봐. 꽤 무겁네.” “다 너희들 선물이야.” 두 사람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날카로운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엄밀히 말하면 지수현 한 사람을 향한 시선이었다. 허정운이 어딘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지연정은 허정운의 옷깃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정운 오빠, 왜 그래?” 허정운은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 착각인가?’ 허정운은 조금 전 지나간 여자를 보며 지수현을 떠올렸다. 하지만 지수현은 나시 원피스를 입은 적이 없었다. 지수현의 옷차림은 언제나 다정한 느낌을 주는 스타일이었다. 허정운은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한 듯 강수영에게 물었다. “아직도 지수현이 어디 있는지 못 찾았어?” 강수영은 감히 허정운의 눈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네...... 오늘 내로 지수현 씨의 구체적인 행방을 반드시 알아내겠습니다!” 강수영은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허정운의 주변 공기는 또다시 얼어붙은 듯했다. 그는 냉랭한 말투로 말했다. “강 비서는 연정이를 데려다줘. 난 저택에 다녀와야겠어!” 저택에 도착하니 시간은 이미 저녁 7시를 넘기고 있었다. 저택 안은 어두컴컴했다. 지수현은 집을 비워둔 것 같았다. 문을 열자 먼지가 풀썩 날리는 것 같았다. 허정운은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예전엔 집에 들어오자마자 환하게 미소 짓는 지수현을 마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둑어둑한 공간만이 허정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허정운은 거실의 불을 켰다. 집안 곳곳은 이미 먼지가 한 겹씩 내려앉은듯 했다. 관리실에서 얘기한 것과 같았다. 지수현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예전의 지수현은 가끔씩 허정운에게 심술부리는 일이 있더라도 한 달씩 집을 비운 적은 없었다. 허정운의 마음속에는 불길한 예감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거실 테이블에 놓아둔 합의이혼서와 그 위에 올려둔 반지를 발견한 순간, 허정운의 불길함은 절정에 이르렀다. 한 달째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탓에, 합의이혼 서류에도 먼지가 한 겹 내려앉았다. 허정운은 서류를 집어 들고 마지막 페이지를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지수현은 이미 사인도 해두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분노가 허정운의 마음속에서 치솟았다. 허정운은 합의이혼서를 손에 꽉 움켜쥔 채, 표정이 일그러졌다. ‘감히 이렇게 나온다는 거지?’ 허정운이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 어찌 몰라 할 때, 휴대폰이 울렸다. “대표님, 지수현 씨의 행방을 알아냈습니다...... 지금 지수현 씨는 성북에 계십니다......” 강수영이 우물쭈물거리자 허정운은 냉랭한 목소리로 호통쳤다. “똑바로 말 해! 성북 어디에 있냐고!” “저택에 계십니다...... 그 저택의 주인은 요즘 새로 떠오르는 영화배우인 시승훈 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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