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신설리가 흥분한 표정으로 따지자 지수현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이번에 물러나도 그가 다음에 또다시 다른 기회를 찾아 나를 괴롭히려 할 거야. 그러니 차라리 이번에 본때를 보여주는 게 나아."
"그가 네게 넘겨준 고객이 상대하기 까다로울 게 분명해. 설마 네가 손해를 보면 어쩌려고 그래?”
지수현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말고 너는 일단 일하러 가봐."
"나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러니 네가 고객을 만나러 갈 때 꼭 나를 데려가야 해?”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이 정도 일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면 앞으로 더 큰 문제가 생겼을 때 회사가 망하지 않겠어?"
그녀가 고집을 부리자 신설리도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물러섰다.
"좋아. 그러나 만약 무슨 돌발 상황이 생긴다면, 반드시 내게 연락해야 해. 혼자서 버티지 말고!"
"응, 알았어."
신설리가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양건덕이 계약서를 가져왔다.
그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 대표님, 그럼, 저는 계약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릴게요!"
"알겠어요. 별일 없으면 그만 나가봐요. 나는 아직 할 일이 많으니."
양건덕이 분노 가득한 눈빛을 번뜩이더니 차갑게 비웃고는 몸을 돌려 바로 자리를 떴다. 그는 지수현의 못난 꼴을 볼 수 있기를 기대했다.
지수현이 서류를 훑어보더니 저녁에 고객과의 만남을 약속하고는 다른 일을 하기 시작했다.
곧 퇴근 시간이 되어 지수현이 서류를 들고 두 사람이 약속한 식당으로 향했다.
지수현이 룸에 들어서자마자 안에 앉아 있던 사람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지수현 씨, 어서 앉아요!"
지수현이 이렇게 예쁠 줄은 몰랐던 백상엽이 그녀를 보자 마음이 근질근질하여 곧바로 달려들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이번에 양건덕이 정말 미녀를 내게 선물했군.’
양건덕이 전화로 자신에게 한 말들을 떠올린 백상엽은 간질거리는 마음을 참기 어려웠다.
지수현은 백상엽과 두 자리 떨어진 곳에 앉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백 사장님, 안녕하세요."
지수현이 자신과 이렇게 멀리 떨어져 않는 것에 불만을 품은 백상엽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지수현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러고는 콩알만 한 눈동자로 그녀의 가슴 쪽을 음흉하게 쳐다보았다.
"지수현 씨, 이렇게 서먹하게 굴 필요 있어요? 비록 우리가 예전에 만난 적은 없지만, 볼수록 친해진다고, 그냥 나를 상엽 오빠라고 불러요!"
백상엽은 쉰이 넘은 나이로 지진성보다 나이가 더 많았다. 그는 웃을 때면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 잡혔는데 그러고도 지수현에게 오빠라고 부르라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가 이렇게 말하면서 식탁 위에 올려놓은 지수현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다음 순간, 돼지 멱 따는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 이거 놔! 아파, 아프다고!"
지수현이 침착한 표정으로 그를 놓아주었다.
"미안해요, 백 사장님. 저는 다른 사람이 저를 건드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녀가 사과했으나 눈에는 조금의 미안한 기색도 없었다.
백상엽이 마음속으로 화를 내며 눈동자를 굴리더니 갑자기 또 웃기 시작했다.
그가 식탁 위에 이미 따놓은 와인을 들고 지수현에게 한 잔을 따라주었다.
"우리 이렇게 하죠. 지수현 씨가 이 술을 마시면 내가 조금 전의 일을 따지지 않을게요. 어때요?"
지수현이 눈썹을 치켜세운 채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었다.
"백 사장님, 와인은 너무 약한 것 같으니 제가 직원에게 위스키를 몇 병 가져오라고 할게요."
지수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하자 백상엽의 얼굴에 걸린 웃음도 차가워졌다.
"지수현 씨, 지수현 씨가 이렇게 성의가 없는 걸 보니, 우리 합작 건도 더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그가 와인 잔을 식탁 위에 “탁”소리 나게 내려놓더니 노기 가득한 얼굴을 했다.
지수현도 백상엽이 계약 건을 빌미로 자신을 희롱하려는 것을 알아차리고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알겠어요. 그럼, 백 사장님은 천천히 드세요. 저는 이만 가볼 테니."
백상엽은 원래 지수현을 살짝 위협하려고만 했으나 뜻밖에도 지수현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제자리 멍하니 굳어버렸으며 잠시 후 그녀를 뒤쫓아 나갔다.
"거기 멈춰요!"
그의 목소리가 낮지 않아 문득 주변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꽃을 조각한 나무 칸막이 사이를 통해 다른 한쪽에 있던 몇 사람이 맞은편에 있는 지수현과 백상엽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오늘 저녁에 여기로 밥 먹으러 왔던 양주헌 일행은 설마 여기서 지수현을 만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백상엽 저자는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는 옷감 판매를 시작으로 몇 년 전의 시장 형세를 기회 삼아 한순간에 큰돈을 벌더니 거들먹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졸부 같은 작태라 조금 지위가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허정운의 표정이 어둡게 변한 것을 본 양주헌이 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운아, 수현 씨가 어쩌다 백상엽을 건드렸지? 백상엽은 여자를 데리고 놀기 좋아하는 자로, 그자에게 얽힌 자는 죽지 않으면 반신불수가 되니 용강시에서 소문이 안 좋기로 유명해.”
그는 비록 지수현이 허정운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나 지수현이 백상엽의 손에 망가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지수현에게 시선을 고정한 허정운은 어두운 얼굴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지수현은 옆에 있던 몇몇 사람을 눈치채지 못한 채 백상엽을 돌아보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백 사장님, 또 무슨 할 말이 있어요?”
백상엽이 차갑게 비웃었다.
"지수현 씨, 당신은 그저 MY의 얼굴마담에 불과해. 그런 주제에 내 앞에서 무슨 청순한 척이야? 설령 내가 여기서 당신을 어떻게 한다고 해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내 인내심이 다 닳기 전에 순순히 나를 따라와! 내가 잠자리에 만족하면, 어쩌면 계약해 줄지도 모르니!”
지수현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양건덕이 그렇게 말했어요?"
백상엽의 눈빛에는 경멸과 조롱이 담겨 있었다.
"양 사장이 뭐라고 말했든 그게 중요한가? 당신이 그런 차림으로 나를 만난 목적이 나를 유혹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지수현은 오늘 흰색 탱크톱 드레스를 입고 겉에는 외투를 걸쳤다. 긴 머리카락은 살짝 말린 상태라 온화하고도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고개를 숙이고 자기 옷차림을 한 번 훑어본 그녀는 이렇게 입은 것이 어떻게 그를 유혹하기 위해서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백 사장님, 저는 당신에게 관심이 없어요. 제발 자중하기를 바라요."
지수현이 이 말을 내뱉고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으나 백상엽이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
"누가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도 된다고 했어? 그렇게는 안 되지!"
그가 이 말을 마친 순간, 지수현의 주변에 문득 건장한 남자 두 명이 나타났다. 키가 1미터 80센티미터가 넘는 자가 지수현을 내려다보자 압박감이 장난 아니었다.
지수현이 입꼬리를 끌어올리고는 차가운 눈빛을 한 채 말했다.
"설마 강제로 뭘 하려는 건 아니죠, 백 사장님?”
나무 칸막이 뒤쪽에 서 있던 양주헌이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운아, 빨리 나가서 막지 않으면 수현 씨가 백상엽에게 끌려갈 것 같아!"
그가 생각하기에는 매우 연약해 보이는 지수현이 손해를 볼 것이 분명했다.
허정운이 차가운 눈빛을 한 해 말했다.
"좀 더 기다려."
“뭘 더 기다려?”
허정운은 더 이상 말 하지 않은 채 칠흑 같은 두 눈동자로 지수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MY 창업자 안나가 복귀한 지 얼마 안 돼 때마침 지수현이 다니는 회사가 MY라니. 정말 이렇게 공교로운 일이 있다고?’
백상엽이 분노 가득한 눈빛으로 지수현을 차갑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 여자를 내가 있는 룸으로 데려와! 내가 조금 뒤 아주 죽여버릴 거야!”
말을 마친 백상엽은 몸을 돌려 룸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는 속으로는 이미 조금 뒤 지수현을 어떻게 데리고 놀지 궁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몇 걸음 내딛기도 전에 뒤쪽에서 두 사람의 비명이 들려왔다. 백상엽이 미처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엉덩이를 발로 걷어차여 저쪽으로 날아가 벽에 세게 부딪혔다.
"쾅!"
벽에 부딪혔다가 바닥으로 떨어진 백상엽은 온몸이 부서질 듯이 아파 비명을 질렀다.
나무 칸막이 뒤쪽에 있던 양주헌이 너무 놀라 멍해진 얼굴로 저도 모르게 허정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수현 씨가 저렇게 강했어?”
방금 그는 지수현이 어떻게 손을 썼는지도 제대로 못 봤는데 그 건장한 두 남자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게다가 한 발로 남자를 걷어차 버릴 수 있다니. 그게 정상적인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야?’
허정운은 아무 말 하지 않았으나, 지수현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더욱 깊어졌다.
‘나는 어쩌면 여태껏 지수현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같아.’
한편 지수현은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백상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백상엽은 이 순간 머릿속에 지수현이 그야말로 악마 같은 자라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가… 가까이 오지 마! 그렇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
백상엽의 당황한 눈빛을 마주한 지수현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빛을 한 채 백상엽의 곁으로 다가가 발로 그의 가슴을 꾹 밟아버렸다.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낀 백상엽이 울컥 붉은 피를 토해냈다.
"방금... 날 죽여버리겠다고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