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지수현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는 내게 그런 걸 물어볼 자격이 없어."
말을 마친 그녀가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가자 지연정의 차가운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거기 멈춰!"
지수현이 입가에 차가운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돌려 지연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삼자인 주제에 이렇게 방자하게 구는 자는 아마 네가 처음일 거야."
표정이 변한 지연정이 지수현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정운 오빠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 네가 아무리 수단을 써서 여기에 남는대도 오빠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눈치가 있다면 빨리 오빠랑 이혼해!"
‘가능한 한 멀리 꺼져서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마!’
눈썹을 치켜세운 지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100억 원만 줘. 그럼, 당장 이혼할게."
지연정의 동공이 움츠러들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동안 정운 오빠가 네게 준 돈으로도 모자라? 지수현, 너무 욕심부리지 마!"
"내가 허정운이랑 빨리 이혼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너잖아? 그에 대한 네 마음을 증명하려면 뭔가 포기하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너!"
지수현의 눈동자에 비웃음이 서렸다.
"보아하니 허정운에 대한 네 사랑도 별것 아닌 것 같구나. 100억 원도 주려 하지 않다니?"
뭔가 말하려던 지연정이 곁눈질로 계단 위에 나타난 사람을 보고 금세 가련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 내가 네게 100억 원을 주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야. 다만 내가 네게 돈을 준 걸 정운 오빠가 알게 된다면 분명 화를 낼 것이야."
"왜 그에게 알려야 하지? 네가 말하지 않으면 되잖아?"
지연정은 말문이 막혔다.
두 사람이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차가운 소리가 계단 입구 쪽에서 들려왔다.
"지수현, 네가 무슨 수로 그 100억 원을 모을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연정이를 봉으로 삼으려 했구나!"
지수현은 침착한 표정으로 허정운의 차가운 두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나는 지연정이 기꺼이 그 100억 원을 내줄 줄 알았지. 그래서 이 애에게 기회를 군 거야."
두 사람이 자신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을 본 지연정이 저도 모르게 드레스자락을 움켜쥐며 음침한 눈빛을 번뜩였다.
"정운 오빠, 언니한테 뭐 하러 100억 원을 언급해? 언니가 정말 돈이 부족하다면 내가 먼저 빌려줄 수 있어."
지수현이 의미심장하게 지연정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려던 순간, 허정운이 싸늘하게 말했다.
"이 일은 너랑 상관없어. 만약 얘가 다음에 또다시 네게 돈을 요구한다면 그냥 거절하면 돼."
곧 손안에 들어올 100억 원이 이렇게 날아가자 지수현이 입을 삐죽거리고는 두 사람과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아 위층으로 올라가 다시 잠들려고 했다.
그녀가 허정운의 곁을 지나칠 때 문득 그에게 손목을 붙잡혔다.
그가 지수현의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지수현, 네가 또다시 연정이에게 돈을 요구한다면 네가 정말로 100억 원을 손에 넣더라도 절대 너랑 이혼해 주지 않을 거야!"
아래층에 있던 지연정이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는 너무 화가 나서 눈시울을 붉혔다.
지수현이 그의 손을 뿌리치고 한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차디찬 표정으로 말했다.
"알았어. 앞으로 말을 하려면 말만 해. 나한테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지 말고. 나 바보 알레르기가 있어!"
허정운이 실눈을 뜬 채 두 눈을 위험하게 번뜩였다.
"지수현, 날 화나게 하지 마!"
지수현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바로 몸을 돌려 침실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다.
허정운이 분노 가득한 눈빛으로 침실 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정운 오빠...."
지연정의 목소리에 허정운이 정신을 차렸다. 그가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가 눈살을 찌푸리고 지연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 하러 이렇게 일찍 왔어?"
허정운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감정에 지연정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그냥 오빠가 걱정돼서 와 봤을 뿐이야.... 설마 언니도 여기 있을 줄은 몰랐어. 만약 언니가 돌아온 줄 알았다면 오지 않았을 거야."
허정운이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연정아, 지수현은 내 아내야.”
지연정의 눈가가 단번에 빨개졌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서로를 좋아하잖아? 오빠도 언니랑 감정이 없으면서 왜 감정 없는 결혼생활을 유지하려 하는 거야?"
허정운이 잠시 침묵하더니 지연정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우리는 이미 끝난 사이야. 설령 내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내 아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지연정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한 채 눈물을 뚝뚝 떨궜다.
"당시 오빠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그 기회를 틈타 오빠에게 시집간 언니가 이 년 동안 오빠를 돌봐줬기 때문에 언니를 사랑하게 된 거야?"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 하지만, 그녀랑 이혼하지도 않을 거야."
"왜?"
"나는 교통사고가 난 뒤 이 년 동안 일어설 수 없었어. 그때 그녀가 줄곧 내 곁에서 나를 돌봐주었어."
그리고 지수현과 이혼할 생각만 하면 허정운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지연정이 가련한 표정을 지은 채 울먹였다.
"오빠가 배은망덕한 사람이 될 수 없다면, 그럼 나는? 오빠가 교통사고가 난 걸 줄곧 내게 말하지 않았잖아? 내가 알게 되었을 때는 오빠가 이미 언니랑 결혼한 뒤였어. 그때 내 심정이 어땠는지는 알기나 해?”
“나는 귀국해 오빠에게 따지고 싶었지만, 그러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 만약 언니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면, 충분히 다른 방법으로 갚으면 되잖아? 왜 굳이 오빠의 일생을 바치려 하는 거야"
허정운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지연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일은 확실히 내가 네게 미안해. 그래서 네가 귀국한 뒤, 그 저택에서 지내겠다고 했을 때 그러하고 했잖아? 네가 MY를 가지고 싶다고 하니 지금 그 회사를 인수하는 중이고. 그러나 유독 마음만큼은 네게 줄 수 없어."
말을 마친 허정운이 지연정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상관하지 않고 바로 자리를 떴다.
눈물을 흘리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지연정은 저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절대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안 돼!’
지수현이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허정운과 지연정이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다. 그녀는 개의치 않고 바로 회사로 갔다.
사무실에 도착한 그녀는 전화로 신설리를 불렀다.
"내가 내일부터 며칠간 자리를 비우니 회사 일은 네가 일단 처리해. 만약 네가 처리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냥 기다려."
"응, 알겠어."
신설리가 아직 나가지 않은 것을 본 지수현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또 무슨 볼일이 있어?"
"응. 이따가 회의에서 양건덕이 너를 난처하게 할 거야. 어제 그의 부서에서 그 직원들이 해고된 뒤 그가 사무실에서 한바탕 화를 냈다고 해."
지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 너는 먼저 일하러 가봐."
신설리가 나간 뒤 지수현은 고개를 숙이고 계속 서류를 훑어보았다. 그녀는 이 일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오전 열 시에 회의가 제시간에 열렸다.
지수현은 최근 작업 계획과 그 중점을 강조하며 담담한 표정으로 아래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별일 없으면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이만 회의를 마쳐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양건덕이 입을 열었다.
"지 대표님, 할 말이 있습니다."
지수현이 잔잔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양건덕이 웃으면서 말했다.
"지 대표님, 요즘 우리 회사에서 애를 먹고 있는 계약 건이 하나 있는데 만약 지 대표님이 나서주신다면 분명 잘 해결되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 대표님이 MY를 떠난 지도 이미 삼 년이나 되었으니 우리도 지 대표님의 능력을 한번 보고 싶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큰 회사를 능력 없는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수현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조금 뒤 계약서를 내 사무실로 보내줘요."
지수현이 이렇게 흔쾌히 승낙할 줄은 몰랐던 양건덕이 잠시 멍하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 대표님이 하루빨리 이 계약을 마무리 짓기를 기대하죠!"
회의를 마친 뒤, 신설리가 지수현의 뒤를 따라 그녀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지 대표, 내가 이미 양건덕을 조심하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