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강희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순종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두 눈에 원한이 스쳐 지나갔다.
강원주와 강희진은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정도로 많이 닮았다. 강원주는 그녀에게 다가가 턱을 움켜쥐고 목덜미에 드러난 흔적들을 샅샅이 훑어보면서 질투심을 드러냈다.
“흥. 요망한 여우 같은 네 어미와 똑같구나. 얼굴 말고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는 것.”
하도 꽉 잡아서 얼굴이 아팠지만 강희진은 여전히 시선을 늘어뜨리고 순종적인 표정을 지었다.
“폐하께서 총애하시는 분은 화비마마이십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은총을 바라겠습니까?”
그 말에 강원주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들더니 손을 뿌리치고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래도 네 분수를 아는구나.”
강희진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손가락 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승은을 입었으니 이 약을 먹거라.”
강원주는 그녀의 달라진 분위기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탁자 앞에 앉았다.
“내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르는 게 좋을 거다. 네 어미의 목숨이 아직 내 손 안에 있다는 걸 명심하거라. 만약 딴마음을 품는다면 너희 모녀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강희진은 일부러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강원주는 코웃음을 치고는 상궁에게 탕약을 가져오라고 했다.
코를 찌르는 역겨운 냄새가 코끝을 스치자 강희진은 구역질이 날 것 같았지만 그래도 순순히 들이켰다.
이 탕약은 전생에도 먹었던 것이었다. 여인의 회임을 돕는 탕약이면서도 몸을 쇠약하게 만드는 탕약이었다.
강씨 가문에서는 애초부터 강희진이 아이를 낳은 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오늘따라 그녀가 순종적인 모습을 보이자 강원주는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폐하께서 언제 다시 너를 찾으시겠다고 하셨느냐?”
강희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선우진은 아침에 오늘 밤 그녀를 보러 오겠다고 했다. 전생에 정말로 왔었고 밤새도록 그녀를 괴롭혀 잠 못 이루게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강원주는 질투심에 눈이 멀어 일부러 트집을 잡아 그녀를 빗속에 무릎 꿇리고 벌을 준 바람에 꼬박 사흘 동안 열병을 앓았다. 하지만 강희진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희진은 재빨리 머리를 굴리고는 불안한 척하며 말했다.
“아무 말씀 없으셨어요. 아침에 제가 깨기도 전에 조정에 나가신 걸 보면 많이 바쁘신 듯합니다.”
강원주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강희진의 종아리를 발로 걷어찼다.
“쓸모없는 것. 됐다... 이만 물러가거라.”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아픔을 참으면서 절뚝거리며 나갔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자 눈빛이 점차 차가워졌다.
오늘 아침 선우진은 밤에 그녀를 보러 오겠다고 했다. 전생에 그는 정말로 명광궁에 왔었다. 하지만 이젠 강원주가 전생에서처럼 총애를 받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오늘 밤이 그 절호의 기회였다.
...
선우진은 조회를 마치고도 한가할 틈이 없었다. 상서방에 상소문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는데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봐야 했다.
그가 즉위한 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았고 조정에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자들이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강상목이 가장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선우진은 강상목이 동료를 탄핵하는 내용의 상소문을 보고 싸늘하게 웃으면서 주필로 크게 X를 그었다.
상소들을 모두 처리하고 나니 벌써 일경이 지났다.
그가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무표정하게 밖으로 나오자 정허운이 재빨리 다가가 물었다.
“폐하, 피곤하시옵니까? 돌아가 쉬시겠나이까? 아니면...”
선우진은 엄지손가락에 낀 옥 반지를 만지작거리면서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
“명광궁으로 가자.”
정허운이 공손하게 답했다.
‘화비마마가 마음에 드셨나 보네. 앞으로 잘 보여야겠다.’
연이 명광궁에 도착하자 문 앞의 궁인들이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폐하, 만수무강하시옵소서.”
연에서 내린 선우진이 덤덤하게 물었다.
“화비는 어디 있느냐?”
궁인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 고했다.
그 시각 강원주는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황제가 왔다는 소식에 깜짝 놀라 식은땀까지 흘렸다.
‘강희진, 폐하께서 정무가 바쁘시다며? 어찌 갑자기 오신 거지?’
강원주가 춘희에게 말했다.
“어서 강희진을 단장시켜서 데려오너라.”
춘희는 명을 받들고 허둥지둥 방을 나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색이 창백해진 채로 급히 뛰어 들어왔다.
“강... 강희진이 방에 없사옵니다.”
그 시각 주전에서 기다리다가 인내심을 잃은 선우진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싸늘하게 말했다.
“어찌 된 것이냐? 짐이 좀 총애했다고 교만을 부리는 게냐?”
주변의 궁인들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결국 강원주가 잔뜩 굳은 얼굴로 걸어 나오더니 억지웃음을 지었다.
“폐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방금 막 잠들었나이다. 그대로 나올 수가 없어서 단장하느라 조금 지체하였사옵니다.”
선우진은 그녀를 보면서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이유인지 강원주를 본 순간 마음속에 있던 흥미가 확 사라졌다. 그녀의 뼛속 깊이 배어 있는 연약하고 매혹적인 모습은 그저 그의 착각인 것만 같았다.
그의 표정이 차가워지자 강원주는 불안한 마음에 소매를 잡아끌었다.
“폐하...”
“그럼 돌아가서 쉬도록 하거라. 그저 지나가는 길에 들른 것뿐이다.”
강원주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선우진은 거부감이 더욱 심해져 손을 휘저어 그녀를 뿌리쳤다.
그녀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선우진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분한 마음에 손수건을 꽉 움켜쥐었다.
“그년이 어디 있는지 당장 찾아내. 감히 거짓말을 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찻잔을 바닥에 던져버렸고 두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
명광궁 전체를 거의 다 뒤져서야 궁녀들이 강희진을 끌고 들어왔다.
여우 같은 요망한 얼굴을 본 순간 강원주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뺨을 후려갈겼다.
“빌어먹을 년. 아버지의 계획을 망치려고 일부러 폐하가 오실 거라는 걸 알려주지 않은 거지?”
뺨을 맞은 강희진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고 볼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언니, 전... 그런 적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