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다 입었어."
진가희가 말을 하자마자 차 안의 불이 밝아졌다.
진가희는 발갛게 물든 얼굴을 돌린 채 자리에 앉아 입을 열지 않았다.
옆에 앉은 하도훈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담배를 눌러 끄고 진가희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데려다줄게."
진씨 집안까지 30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진가희는 마음이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했다. 한시도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 하도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빨리 차 문을 열고 내렸다.
하도훈은 진가희가 차에서 내릴 줄은 몰라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뭐 하려는 거야?"
진가희가 대답했다. "혼자 갈게."
하도훈이 낮은 목소리로 설득했다. "아직 30분 남았어."
진가희는 잠시 침묵했다. "택시 잡으면 돼."
하도훈은 눈썹을 찌푸렸다. 진가희는 하도훈이 방심한 틈에 그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갔다.
"가희야."
하도훈이 차 안에서 소리쳤다.
진가희는 하도훈의 부름을 무시하며 택시를 타고 빠르게 모습을 감추었다.
하도훈이 차에서 내리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진가희가 거실에 들어섰을 때, 집안은 아무 소리도 없이 고요했다. 고희숙을 마주칠까 두려워 진가희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들어갔다.
방문을 힘껏 닫은 진가희는 문에 머리를 기대었다.
눈을 감는 순간, 어젯밤 하도훈과 서로 껴안고 있던 장면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다.
진가희는 스스로가 유죄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고요한 호수처럼 마음에 동요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자신에게는 죄가 있다.
다음날, 진가희가 언제 돌아온 것인지 모르는 고희숙이 아침을 먹을 때 진가희에게 물었다. "가희야, 어제 수업들으러 간 거 아니야? 언제 돌아왔어? 난 전혀 몰랐어."
진가희는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채로 죽을 먹으며 고희숙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고희숙은 무기력한 진가희의 모습을 몇 초간 바라보다 그녀의 그릇에 단백질 음식을 집어 주었다. "너무 말라도 안 좋아. 많이 먹어."
진가희는 이상한 음식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머리를 숙여 토가 나올 정도로 입안에 욱여넣었다.
식사가 끝나고 고희숙이 말을 건넸다. "오늘 나랑 같이 이나 보러 가자. 아버지가 오후에 출장을 끝내고 병원으로 올 거야."
고희숙의 말이 끝나자마자 식탁 위에 놓은 진가희의 핸드폰이 울렸다. 고희숙은 넌지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액정 위로 우지성의 이름이 보였다.
진가희는 핸드폰을 꽉 움켜잡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고희숙은 진가희가 남자친구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지만, 보지 못한 것처럼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게다가 고희숙은 진가희에게 남자친구가 있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진이나의 상태가 좋아지면 모든 것은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오후에 진가희는 고희숙을 따라 진이나의 병문안을 갔다. 병원에 도착하자 진기천이 병실 침대 옆에서 진이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병실로 들어간 고희숙도 침대로 다가가 진이나를 관심했다.
진이나는 웃으며 진기천이 해외에서 가져온 선물을 살펴보았다.
진가희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멀지 않은 곳에 서서 이방인처럼 그들을 지켜보았다.
이때, 진이나가 진가희를 발견했다. "아빠, 가희 저기서 한참 서 있었는데 아직 인사도 안 하셨잖아요."
진기천은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며 곧바로 뒤돌아 사과했다. "가희야, 미안해. 아빠가 언니를 걱정하느라 네가 있다는 걸 잊어버렸어."
진가희는 이미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했기에 이 이상의 것을 더 바라지 않았다. "괜찮아요. 우리는 매일 집에서 아빠와 함께 있을 테고 언니는 병원에 있으니까 언니 옆에 있어주는 것도 당연하죠."
이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병실 안의 사람들 시선이 전부 문으로 향했다. 하도훈이 비서와 함께 문 앞에 나타나 옅게 웃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있길래 이렇게 즐거워하는 거야?"
하도훈의 출현에 진이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도훈아, 왔어! 아빠가 출장에서 나한테 뭘 가져다줬는지 봐봐. 내가 아직도 어린애인 줄 안다니까."
병실 문 앞에 도착한 순간부터 하도훈의 시선은 병상에 누워있는 진이나에게 향해 있었다. 병실로 들어오고 나서야 하도훈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진가희를 발견하고 멈칫 발걸음을 멈추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도훈의 시선이 느껴지자마자 진가희는 고개를 돌려 그의 눈길을 피했다.
곧바로 시선을 거둔 하도훈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진이나에게 다가갔다. "아버님 눈에 넌 영원히 어린아이야."
병상 옆에 서서 진이나를 바라보는 하도훈의 눈빛은 다정다감했다.
진이나는 하도훈의 손을 잡았다. "너도 날 놀리는 거지? 나 화낼 거야. 흥."
하도훈은 진이나의 손을 맞잡으며 애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얌전히 치료를 받아야 내가 걱정을 안 하지."
진가희는 하도훈이 진이나와 맞잡은 손을 보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하도훈이 소리 없이 곁눈질로 진가희를 살폈다.
갑자기 고희숙이 입을 열었다. "가희야, 이쪽으로 와서 언니하고 이야기 좀 나눠."
진가희는 진이나의 곁으로 다가갔다. 진이나의 곁에는 하도훈이 서 있었다.
고희숙이 물었다. "도훈아, 가희 어젯밤에 너랑... 같이 있었던 거야?"
고희숙은 모호하게 질문했다.
이 화제를 꺼내자 진기천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진가희와 하도훈의 관계는 매우 미묘했으며 비밀스러웠다.
진가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하도훈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네. 어제 제가 데려다줬어요."
고희숙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아침에 가희 남자친구한테 전화가 와서 어젯밤에 가희가 남자친구와 같이 있은 줄 알았어."
진가희는 입술을 꾹 물었다. 한순간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곧이어 진이나가 웃으며 주의를 환기했다. "엄마, 가희도 이젠 어른인데 그렇게 엄하게 관리할 필요 없어요."
그제야 고희숙은 입을 다물었다.
하도훈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의사 선생님과 대화 좀 하고 올 테니까, 먼저 이야기 나누고 있어."
진이나가 잡고 있던 하도훈의 손을 놓았다. "응, 가 봐."
하도훈이 병실을 나가고 진가희는 이 자리에 있는 것이 힘겨웠다. 하도훈이 나가고 20분 후, 진가희는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아빠, 나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진가희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 아무도 그녀가 하는 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잠시 서서 대답을 기다리던 진가희는 병실을 벗어났다.
밖으로 나오자 마침 의사 진료실에서 나오던 하도훈과 마주쳤다.
그와 마주치게 될 줄 몰랐던 진가희는 자리에 굳었다.
인기척을 느낀 하도훈이 고개를 돌리자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진가희가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하도훈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온 하도훈이 연고를 건네자 진가희는 어리둥절했다.
"방금 의사한테 받은 연고야."
"어제는 내가 너무 지나쳤어.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