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허지연의 아버지가 곧장 의자에서 일어났다. "하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 딸아이가 친구를 데리고 오느라 조금 늦었어요. 괜찮으시죠?"
하도훈은 허지연의 아버지인 허근창의 말에 대범하게 말했다. "테이블에 젊은 사람이 거의 없어서 우리가 나누는 화제가 좀 엄숙하고 재미없는데 마침 분위기를 활기차게 만들 수 있겠네요."
허근창에게 조심스러운 접대를 받던 하도훈이 불현듯 진가희를 불렀다. "가희야, 여기로 와."
진가희는 원형 테이블 맞은편에 멈춰 서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도훈 오빠."
허근창은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하도훈은 자신에게 걸어오는 진가희를 바라보며 조명 아래에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허근창이 의아한 표정으로 하도훈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하도훈이 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진가희를 소개했다. "가희는 이나 여동생이에요."
진이나는 하씨 집안의 미래 안주인이다. 그제야 다들 깨달았다.
허근창은 마음속에 계획이 생기기 시작했다. 진가희는 하도훈과 가족이고 우지성과는 연인 사이이다.
잠시 생각하던 허근창이 하도훈에게 물었다. "하 대표님, 가희 자리를 마련할까요?"
하도훈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근창은 직원에게 지시해 진가희의 자리를 우지성의 옆에 추가했다.
하도훈의 비서가 옆에서 그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테이블에 놓인 손수건을 집어 손을 닦으려던 하도훈이 허근창의 자리 배치를 보고 행동을 멈추었다.
하도훈의 미세한 동작을 눈치채지 못한 허근창이 옆에서 물었다. "자리 괜찮아요?"
하도훈은 허근창을 힐끔 바라보았다.
허근창의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을 때, 하도훈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지켜야 할 규칙 같은 건 없어요."
하도훈은 말을 하며 손수건을 내려놓았다.
하도훈이 움직이고 나서야 다들 자리에 앉았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우지성은 진가희의 옆에 앉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가희야, 뭐 먹을래?" 우지성은 예전과 똑같이 진가희에게 질문하고 챙겨주었다.
진가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주스 좀 마실래?" 우지성이 질문을 이어갔다.
진가희는 우지성의 말을 여전히 무시했다. 상황이 이전과 달라 우지성은 진가희를 과도하게 살뜰히 챙길 수가 없었다. 경솔하게 행동할 수 없었다.
진가희는 이상할 정도로 과묵했다.
이때, 허근창이 입을 열었다. "하 대표님, 우지성은 상당히 진취적인 젊은이에요. 학교에서 성적도 항상 상위권이에요. 경제학과를 전공하고 있고 졸업을 앞두고 있어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고 키워주시길 바랍니다."
하도훈의 목소리가 원형 테이블 맞은편에서 들려왔다. "허 대표님이 훌륭하다고 칭찬을 하시는 걸 보니까 분명 특출한 부분이 있는 거겠죠. 당연히 잘 키워줘야죠."
우지성은 바람을 일으킬 정도로 진가희의 옆에서 벌떡 일어나 술잔을 들고 공손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하 대표님,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우지성은 고개를 젖혀 술잔에 있던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진가희는 우지성의 주량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 순간이 괴로웠다.
우지성의 허리는 이 자리에서 한 번도 꼿꼿이 펴진 적이 없었다.
그에 반해 우지성의 맞은편에 있는 하도훈은 무관심한 자태로 느긋하게 말을 하며 술잔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 곧이어 하도훈이 비서에게 말했다. "자리 마련해 줘."
허근창은 하도훈이 통쾌하게 허락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상당히 의외였다.
서로 얽혀 있던 진가희의 두 손이 끊어진 현처럼 떨어졌다. 마음속으로 하도훈이 이렇게 하는 이유를 생각했다.
진가희가 이유를 짐작하기도 전에 우지성은 또다시 자신의 술잔에 술을 가득 채워 들어 올렸다. 그의 목소리가 흥분에 젖어 있었다. "하 대표님, 정말 감사합니다."
"고마워할 필요 없어. 아직 졸업도 하지 않았고 앞날이 창창하니까 잘해봐."
"네, 하 대표님."
공손하게 대답한 우지성은 붉어진 얼굴로 진가희를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기대가 서려 있었다.
진가희는 우지성과 시선을 마주할 수 없어 맞은편에 앉은 하도훈만 직시했다.
마침 하도훈의 시선도 진가희에게 향했다.
그 뒤로 식사 자리에는 술잔이 오가며 시끌벅적했다. 오로지 진가희 만이 이 자리가 가시방석이었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하도훈은 술잔을 한 번도 들지 않았지만 누구도 말참견을 하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고 하도훈은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떠났다. 차에 앉은 하도훈은 호텔 앞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그쪽을 쳐다보았다. 허지연에게 끌려 호텔 입구로 나오는 진가희가 보였다.
진가희의 뒤로 우지성이 뒤쫓아 나왔다.
"가희야, 우리 얘기 좀 할 수 있어?"
우지성은 진가희에게 빠르게 걸어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진가희는 고개를 돌려 우지성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진가희의 표정에 우지성은 멈칫하더니 얼굴이 순식간에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왜, 왜 그래? 가희야,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우리 같이 해결하자. 응?"
하도훈은 차에 앉아 연인 같은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움과 눈물을 억제하고 있는 진가희의 얼굴을 우지성이 만지려는 순간, 진가희는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우지성을 만나서는 안 된다. 진가희는 자리를 떠나기 위해 몸을 돌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진가희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아차린 하도훈은 비서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곧 비서가 차에서 내려 진가희에게 다가갔다. "가희 씨, 하 대표님께서 집에 데려다줄 필요가 있는지 물어보십니다."
진가희는 겨우 지푸라기를 움켜잡은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네. 데려다주세요."
우지성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진가희는 그를 뿌리치고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하도훈의 차에 탔다.
얼마 되지 않아 하도훈의 비서도 차에 탑승했고 시동이 걸렸다.
진가희는 차 창문을 통해 점점 멀어지는 우지성을 바라보자 눈시울이 시큰했다.
뒤에서 하도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왜? 아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