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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장

다연주는 입가에 묘한 웃음을 지으며 친구를 바라보았다. 강은영의 표정이 살짝 굳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지난 생에 박성철 뒤를 쫓아다닐 때 주변 친구들이 모두 그녀가 부도덕하다며 멀리했다. 아마 전화에서 박성철에게 반박 기사를 내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다연주도 여기까지 찾아와 주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강은영은 그렇게 말하며 다연주를 안으로 이끌었다.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메모리카드를 끼운 노트북을 다연주의 앞으로 내밀었다. 다연주는 영상 속에서 박성철을 폭행하는 친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박성철이 뭘 했길래 이렇게 화가 난 거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박성철을 사랑해서 박강우와 이혼할 거라며 난리를 피우던 친구였기에 그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강은영은 물로 마른 목을 축이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기사 오늘 내보낼 수 있어?” “그렇게 급해?” 강은영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급해!” 급하지 않았으면 다연주를 집으로 부를 일도 없었다. 다연주는 업계에서 알아주는 독설 기자였다. 그녀의 현란한 문장력과 날카로운 분석은 항상 전문가들의 좋은 평가를 받았다. 시할머니 생신이 코앞인 시점에서 이 일로 박강우와 가족들의 사이를 멀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박성철이 물귀신 작전을 시전한다면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것이다. 다연주는 여유로운 말투로 답했다. “당연히 가능은 하지. 그런데 내용은 뭐로 정할 거야? 설마 가지고 놀다가 질려서 버린 거라고는 안 할 거지?” 강은영의 입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이게 대체 친구가 할 소리인가! “아니. 우리가 집중해야 할 점은 따로 있어.” 말을 마친 그녀는 컴퓨터에서 다른 영상을 꺼냈다. 조금 전에 다연주에게 전화를 한 뒤로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영상 속에는 강설아 생일 날에 그녀와 박성철이 함께 방으로 들어가는 장면과 강설아가 불안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문을 닫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딱 봐도 뭔가 켕기는 게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박성철이 널 배신해서 지금 보복하려는 거야?” 다연주는 비웃음 가득한 눈으로 강은영을 바라보며 날카롭게 지적했다. 강은영은 예전에 자신을 뜯어말리던 주변 친구들의 말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때는 박성철과 강설아를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했기에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이제 와서 자신이 사람을 잘못 봤다고 인정하려니 수치심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보복이 아니야. 박성철은 목적을 가지고 나한테 접근했다는 쪽으로 기사를 써줘.” “사랑하던 남자가 언니와 바람이 나니까 지금 모든 잘못을 그에게 뒤집어씌우겠다는 거잖아? 은영아, 너 원래 이렇게 비겁한 사람이었어?” 그 말을 들은 강은영은 화가 나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래서 기사 쓸 거야, 말 거야?” “써, 써줄게!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나 보지 마. 물론 난 지금의 네가 마음에 들어.” 강은영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다연주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친구를 보고 피식 웃고는 메모리카드를 챙기고 일어섰다. “두 시간 뒤에 기사 한번 검색해 봐.” 말을 마친 그녀는 그 길로 집을 나가버렸다. 한참 후, 강은영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강준형이었다. 굳이 전화를 받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할지 뻔히 보였다. “여보세요.” “너 대체 어떻게 된 거니!” 수화기 너머로 강준형이 이를 가는 소리마저 들려왔다. 강은영은 싸늘한 목소리로 비꼬듯 말했다. “강 회장님은 아직 저한테 전화를 걸 정도로 여유가 넘치나 보네요?” 선을 확실히 긋는 낯선 호칭에 강준형은 울화가 치밀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머리채를 끌고 집에 데려오고 싶었다. “강은영, 박 대표가 어떤 사람인데 감히 그 조카랑 엮여서 이런 일을 만들어? 애초에 너희들 결혼 허락하는 게 아니었어!” 아버지가 딸에게 할 얘기라고는 믿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사고가 난 후에 해명 한마디 들어보려고 하지 않고 모든 잘못을 딸에게 덮어씌우다니. 강은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냉소를 지었다. “과연 당신 허락이 없다고 우리가 결혼을 못 했을까?” 만약 강준형의 말이 통했다면 박강우와 결혼한 여자는 당연히 강은영이 아닌 강설아여야 했다. “아빠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강준형은 강은영이 이렇게까지 말대꾸할 거라고 생각지 못했기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강은영은 그들이 처음부터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차갑게 말했다. “나랑 박성철 사이는 당신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야. 하지만 강설아와 박성철 사이가 공개되면 아빠 뒷수습하느라 애 좀 먹겠어.” 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주변이 다시 조용해졌지만 강은영의 마음은 오래도록 진정이 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겨도 가족은 영원한 버팀목이라고 하는데 그녀는 한 번도 그런 걸 가져본 적이 없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매정하게 버려진 그녀였다. 한편, 강씨 저택에서는 삭막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조금 전 강은영과의 통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진미선이 분개하며 말했다. “걔 점점 버릇없어지는 것 같아요.” 강준형은 혈압이 올라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결국 박강우가 요 며칠 사이 자신들을 저격하는 이유가 강은영과 박성철의 배신에 대한 화풀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밖에서 돌아온 강설아는 얼굴이 거무죽죽해서 거실에서 왔다갔다 하는 강준형과 음침한 얼굴로 소파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진미선을 보자 다급히 다가갔다. “아빠, 엄마, 무슨 일 있었어?” 부부는 나긋나긋한 큰딸의 목소리를 듣자 그제야 표정을 조금 풀었다. 강설아는 진미선에게로 다가가서 옆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진미선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은영이 걔가 너처럼 착하고 철이 들었으면 내가 이렇게 속을 끓일 일도 없었을 텐데.” 강은영만 떠올리면 진미선은 기분이 나빴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이기적이던 애가 커서 집안에 이런 재앙을 몰고 올 줄이야! 강설아는 강은영 얘기가 나오자 입가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겉으로는 억지로 표정을 관리하며 말했다. “그만 생각해, 엄마. 은영이가 성철이 좋아하는 걸 우리가 몰랐던 것도 아니잖아. 걱정 마세요. 은영이가 알아서 잘 수습하겠지.” “알아서 뭐든 척척 할 애였으면 집안을 이 꼴로 만들지는 않았겠지.” 강준형은 최근 은행 대출도 거부당하고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 모든 게 강은영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울분이 치밀었다. “솔직히 은영이가 이러는 것도 이해가 돼. 처음부터 성철이를 좋아했는데 강우 때문에 억지로 한 결혼이잖아.” 그 말을 들은 강준형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과정이야 어찌 됐건 이제 결혼까지 한 애가 남편의 조카랑 놀아나는 게 말이 돼?” 그는 그 대단한 박 대표가 대체 뭘 보고 강은영을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그 상대가 강설아였다면 절대 지금 상황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강설아는 적절하게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진미선은 그런 그녀의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됐어. 너도 너무 걔 감싸고 돌 필요 없어. 네가 아니었으면 처음부터 걔를 집에 데려올 계획도 없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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