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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그날 아침. 박강우는 식탁에 마주 앉아 진기웅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강은영은 밥 먹는 시간에도 일을 시키는 진 비서를 불만스럽게 쏘아보았다. 그렇게 한눈을 팔다가 그녀는 그만 혀를 깨물어 버렸다. “아!” 한창 중요한 부분을 보고 중이던 진기웅은 흐름이 끊기자 짜증스럽게 강은영을 노려보았다. 박강우는 울상을 짓고 있는 아내를 힐끗 보다가 서류를 내려놓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 봐봐.” “혀가 너무 아파.” ‘진 비서 때문이야. 하필 밥 먹는 시간에 일 얘기를 할 건 뭐람.’ 그녀는 원망 섞인 눈빛으로 진기웅을 바라봤다. 박강우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진 비서는 일단 회사로 출근해.” “대표님, 이 서류들은….” “오전에 나도 회사에 들릴 거야.” 말을 마친 그는 다시 시선을 강은영에게로 돌렸다. 진기웅은 그런 박강우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박강우는 입에서 피가 나는 것을 확인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누가 뺏어 먹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급하게 먹어? 이제 어쩔 거야?” 강은영은 눈물을 머금고 박강우를 바라봤다. 박강우는 결국 마음이 약해져 상처를 후후 불어주며 물었다. “이제 좀 괜찮아?” “그래도 아파.” 이미 통증이 많이 가라앉은 상태지만 그와 애교를 부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박강우가 말했다. 강은영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냥 더 불어달라고 한 거였는데….’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볼 의료진들을 생각하며 강은영은 고개를 저었다. “안 가.” 박강우는 피식 웃고는 전 집사를 시켜 비상약 박스를 가져오게 했다. 그는 뿌리는 연고를 꺼내 그녀의 입안에 뿌려주자 강은영은 그제야 살 것 같다는 듯이 표정을 풀고 물었다. “이따가 회사 나갈 거야?” 그러면서 걱정 어린 눈빛으로 그의 상처 부위를 바라봤다. 어제 붕대를 갈아줄 때 이미 딱지가 앉은 것을 확인하긴 했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약물을 잘못 써서 감염이 된 이후로는 더욱 방심할 수 없었다. “급히 처리해야 할 서류가 있어. 점심에는 돌아올 거야.” 박강우가 말했다. “나도 같이 갈래.” 강은영은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일벌레인 그는 회사만 가면 무아지경으로 일에만 집중하기에 관리가 필요했다. 박강우는 약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나랑 회사에 같이 가겠다고?” “그래. 뭐 문제 있어?” 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돌려 전 집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집사 아저씨는 올라가서 나 선생님이 주고 간 약 상자 좀 가져다주세요.” “네, 사모님.” 전 집사는 소문에 전해지는 것과 달리 너무도 사이가 좋은 두 사람을 보며 역시 뉴스나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며 속으로 혀를 찼다. 박강우는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사실 따라갈 필요는 없어. 윤범이도 오늘 회사에 같이 가기로 했거든.” 강은영은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나 선생님은 되고 나는 안 돼?” “그건 당연히 아니지!”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 박강우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전 집사가 약 상자를 가지고 내려왔고 강은영은 자세히 확인한 뒤에 옷을 갈아입으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녀가 단정한 오피스룩 차림으로 내려오자 박강우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이 옷도 그가 그녀를 위해 직접 디자인한 옷이었다. 예전에는 절대 건드리지 않던 것들인데 그녀가 말한 것처럼 강설아의 이간질에 속았다가 정신을 차린 거라면 지금 상황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강씨 집안 사람들 얼굴을 떠올리자 그의 눈빛에 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역시 여보의 안목은 탁월해. 이 옷 너무 마음에 들어.” 강은영은 종종걸음으로 박강우의 앞에 다가가서 한바퀴 빙 돌며 말했다. 그가 직접 디자인한 옷들은 전부 그녀의 취향에 맞춘 것들이었다. 박강우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당연히 마음에 들지. 여보가 사준 건 뭐든 다 좋아.” 강은영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박강우는 어쩌면 이 모든 게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회사로 출근했다. 전생에는 두 사람 사이가 안 좋다는 소문이 수도 전체에 났고 강은영이 회사에 얼굴을 비추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녀를 본 직원들은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강은영은 박강우에게로 쏠리는 여자들의 뜨거운 시선이 불편했다. 그녀는 몸을 바짝 당겨서 그에게로 밀착하며 소유권을 주장했다. “나 선생님 도착했나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진기웅에게 물었다. 진기웅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박강우를 보며 말했다. “나 선생님한테 검사 받고 회의 들어가.” “그래.” 평소와는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에 직원들은 벙찐 표정을 지었다. 강은영은 박강우의 옆에서 검사 받는 모습을 감시했다. 박강우 본인은 이제 강은영을 믿기로 했지만 그의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를 경계했다. “상처 회복이 느리네. 감염 조심해야겠어.” 일련의 검사를 마친 뒤에 나윤범이 말했다. 박강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강은영도 그의 말을 수첩에 기록했다. 나윤범이 나간 뒤, 진기웅은 회의 준비하러 가고 비서실 여직원이 커피를 타서 안으로 가져왔다. 박강우의 옆에서 3년이나 같이 일한 이유빈이었다. 이유빈은 들어오자마자 박강우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대표님, 커피 나왔습니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허리를 숙여 커피를 책상 위에 놓는 순간, 아찔한 굴곡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적어도 박강우가 고개만 들면 다 보일 정도였다. 강은영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 ‘정실 부인이 옆에서 눈 퍼렇게 뜨고 있는데 저게 지금 뭐 하자는 거지?’ 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이유빈의 비음 섞인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대표님, 양 변호사님께서 이혼 합의서 완성됐다고 하던데 언제 강은영 씨한테 가져다드릴까요?” 강은영은 고개를 번쩍 쳐들고 박강우를 바라보았다. 한창 서류에 사인 중이던 박강우도 펜을 멈추고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강은영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식은땀이 삐질 흘렀다. 강은영은 너무 화가 나서 숨소리마저 거칠어졌다. 남편 사무실에 왔다가 대놓고 꼬리 치는 여직원을 보지 않나, 게다가 이혼 서류도 미리 준비해 놓고 있었다니! 이유빈은 상사가 말이 없자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얼굴이 흙빛이 된 강은영을 보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 사모님 여기 계셨어요? 지금 양 변호사님 호출할게요.” 강은영의 얼굴이 분노로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싸늘한 눈초리로 박강우를 바라봤다. 박강우는 지끈거리는 미간을 마사지하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이유빈 씨.” “네, 대표님. 지금 바로 양 변호사님한테 전화드릴게요.” 이유빈은 상사의 이혼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들뜬 목소리로 답했다. 박강우는 차게 식은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노려보다가 말했다. “당신 해고야. 당장 인사부 가서 퇴사 수속하고 꺼져.” “대표님…?” “꺼지라는 말 안 들려!” 박강우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이유빈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기다시피 해서 사무실을 나갔다. 사무실에서 나온 이유빈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그는 박강우가 왜 곧 이혼할 여자를 위해 자신을 해고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강은영은 입이 뿌죽 나와서 박강우에게서 고개를 홱 돌렸다. 박강우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를 품에 안았다. 강은영이 바둥거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거 놔.” 아직 화가 덜 풀린 강은영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 계속 나한테서 떠나고 싶어했잖아. 그래서 양 변호사한테 이혼 서류 작성하라고 시켰어. 요즘 당신이 얌전해져서 깜빡 잊고 있었는데 내가 미안해. 화 풀어.” 부드러운 목소리에 강은영은 이내 마음이 풀어졌다. 그녀는 그의 셔츠에 얼굴을 비비며 새침하게 말했다. “이유빈 씨 대놓고 당신 유혹하던데?” 회사에서 박강우의 옆자리를 노리는 여자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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