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그녀는 하인이 아니다

한평생 올바르게 살아왔던 할아버지는 이런 심한 말은 참을 수 없었다. “나유아가 아이를 낳으려 해도 고선호가 원해야 하지 않겠어?” 나유아는 마음이 아팠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네.” 고석훈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아내를 꾸짖었다. “애들이 놀러 왔는데 임신 얘기만 할 거야?” 이에 할머니가 한마디 반박했다. “고집 좀 작작 해요, 당신은 증손자를 안고 싶지 않아요?” 고석훈은 곧 화제를 돌렸다. “유아야, 요즘 밖에서 도는 소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나유아는 예의를 지키며 순순히 대답했다. “선호 씨가 잘 처리해 줄 것으로 믿어요.” 고석훈은 그녀의 대답에 만족했다. “밖에서 뭐라 하든 우리 고씨 가문의 손자 며느리는 나유아 너뿐이야. 그런 형편없는 것들은 고씨 가문에 반 발자국도 못 들일 거야.” 이에 김순자가 대답했다. “네가 하루빨리 아이를 낳아주면 집으로 돌아갈 거야.” 고석훈의 안색이 또 변한 것을 본 김순자는 얼른 말을 멈추었다. “알았어요. 이 말은 그만 할게요. 유아야, 저녁에 여기서 묵어. 할머니가 네가 가장 좋아하는 연근 갈비탕을 끓여줄게.” 나유아가 무슨 말을 더하려고 하자 김순자는 기분 좋게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고석훈의 매서운 시선이 나유아의 얼굴에 떨어지자 표정이 부드러워지며 말했다. “할머니의 말은 마음에 두지 마, 너랑 선호가 다정하고 화목하게 사는 걸 보고 싶어서 그래.” 나유아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럼요, 알아요.” 고석훈은 그녀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너의 할머니는 어때?” 할머니를 언급하자 나유아는 표정이 부드러워지며 환하게 웃었다. “잘 지내요.” “너희랑 같이 살고 싶은 마음은 아직도 없대?” 고석훈이 또 물었다. 나유아는 어리둥절하다가 입을 열었다. “할머니는 시골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해요. 시내가 시끄럽다고 싫어하시고 동네 사람들에게 부탁하기도 했어요.” 고석훈은 나은희와 오랜 친구였기에 나유아는 나은희에 대한 사소한 이야기를 해드렸다. 나은희가 오늘 닭 모이를 몇 번 줬는지도 알 정도였다. 고석훈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시선을 그녀를 스쳐 뒤에 있는 다른 사람을 보는 듯했다. “나은희에게 너 같은 손녀가 있다는 건 복 받은 거야.” 나유아는 어리둥절해 하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니에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키워주셔서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고석훈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식사 후. 두 사람은 방으로 돌아갔다. 신혼 첫날밤 이후 두 사람은 처음으로 고택에 묵었다. 나유아가 조금 불편하게 느껴질 때 고선호가 먼저 말했다. “할머니께서 어제 건강검진 받으러 갔는데 심장이 안 좋으시대. 오늘 밤 여기 묵어달라는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 나유아는 별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니야, 당연히 해야 하는 거지.” 40억이 걸린 문제이니 어디서 자든 상관없다. 단념한 나유아는 자진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원래 그들의 신혼 방이었다. 원래는 검은색과 흰색으로 된 인테리어로 심플하고 차가웠지만 지금은 부드러운 카펫을 깔고 불을 켜지 않은 채 거실 탁자 위에 손목 굵기의 촛불을 켜고 있었다. 발걸음을 멈춘 나유아는 갑자기 그들의 신혼 첫날밤을 떠올렸다. 그때도 촛불이 이렇게 하늘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때 그들의 신혼 첫날밤을 서로 예의를 갖추며 보내리라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어찌 된 영문인지 서로 뒤엉켜버렸다. 그 후 고선호는 그녀가 그에게 약을 먹였다고 의심하며 오랫동안 그녀를 상대하지 않았다. 이 방에 대한 그녀의 기억은 사실 그리 좋지 않았다. 처음의 고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하물며 그날 밤 그는 미친 듯이 밤새도록 달렸다. 나유아는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한 후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장, 장선댁에게 방 하나 더 달라고 할게.” 고선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우리가 따로 자고 있다는 걸 알리려는 거야?” 나유아는 뜨거운 기운이 머리 위로 치솟는 것을 느끼며 숨을 몇 번 들이마시고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럼 따로 자. 당신이 소파를 쓰면 되겠어.” 고선호는 눈썹을 찌푸린 채 불쾌한 어투로 물었다. “왜 내가 소파에서 자? 내가 따로 자려는 것도 아니고.” 나유아는 말문이 막혔다. ‘좋아, 내가 소파에서 자지 뭐. 어쨌든 하룻밤이고, 고선호도 배지혜가 질투할까 걱정하지 않는데 내가 뭔 상관이야.’ 문밖. “물건을 넣었어?” 김순자는 장선댁의 손에 들려 있는 쟁반을 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분부하신 양에 따라 넣었으니 아이에게는 해가 없을 거예요.” 장선댁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하지만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나쁠 것 없어. 임신이 된다면 그 애에게도 좋은 일이겠지만 이래도 임신하지 못하면,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걸 설명해. 그럼 우리도 다른 계획을 세워야지.” “가봐, 직접 마시는 걸 보고 와.” 김순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분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