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한 끼에 40억

“저녁에 나랑 함께 고택에 다녀오자. 할아버지께서 널 만나고 싶대.” 산더미처럼 쌓인 청구서를 보며 화가 치밀어 올랐던 나유아는 고선호의 말에 차갑게 한마디 했다. “내가 고택에 가는 건 아닌 것 같아.” 전화기 너머로 고선호는 몇 초 동안 침묵을 지키다 대답했다. “아직 이혼하지 않았으니 아직 네가 결정할 수 없어.” 여러 가지 이유로 고석호와 김순자가 고선호를 키웠기에 고선호는 두 분에게 효도를 다 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나유아와 결혼하라고 했을 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따랐다. 결혼한 지 3년, 고선호 부부는 각자 자신의 의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그녀와 함께 자는 것 외, 정기적으로 고향에 가서 금실이 좋은 척 연기해서 노부부를 안심시키기도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괴롭히는 사람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다른 일이었다면 고선호가 대표님으로서의 성질을 부리는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스튜디오에 문제가 생긴 지금 고선호가 전화를 걸어 저택으로 가라고 하니 협박으로 다가왔다. 나유아는 피식 웃어 버렸다. 지난 3년 동안 쏟아부었던 그녀의 사랑은 고선호의 마음을 조금도 녹이지 못한 채 그냥 개에게 줘버린 격이었다.배지혜 한 명을 위해 그녀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녀는 심호흡 한 번 하고 나서 직설적으로 물었다. “내가 당신과 함께 고택에 가면 스튜디오의 위기가 해소되는 거야?” 고선호는 생각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래, 저녁에 데리러 올게.” 전화를 끊고 난 고선호는 뜻밖에 기분이 좋아져 칼날처럼 얇은 입꼬리가 자기도 모르게 올라갔다. 그는 나유아에게 자주 연락하지 않았다. 평소 할아버지가 나유아가 보고 싶다고 해도 비서에게 통지하도록 했다. 하지만 나유아가 요즘 그에게 화를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직접 전화를 건 것이다. 이로써 그녀에게 화해할 기회를 준 것이다. ... 고선호는 내선 번호를 누르고 차갑게 분부했다. “엔효 스튜디오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아봐, 나한테 알릴 필요 없이 직접 처리해.” 반나절도 안 돼서 해약했던 스튜디오 업무가 태반이 돌아왔다. 성효진은 공장의 40억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갑자기 해약했던 계약서가 모두 돌아왔다. 스튜디오 손실을 보상하기 위해 가격을 올릴 수 있다며 아예 전액을 송금하기도 했다. 그녀는 놀라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유아를 바라보았다. “고선호가 한 짓이야?” 나유아의 마음은 얼굴만큼이나 차가웠다. “맞아.” "한 끼에 40억이면 수지가 맞는 것 같아.” 일곱 시. 고선호는 제시간에 그녀를 데리러 왔고, 두 사람은 가는 내내 말이 없었다. 정원 앞에 이르자 고선호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차가운 표정을 보며 매우 불만스러워했다. “너 이 표정은 할아버지의 의심을 사려는 게 분명해.” 나유아는 프로다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 연기 잘할 거야.” 고선호는 눈빛이 굳어진 채 갑자기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연기까지 한다는 건 정말 이혼하고 싶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그녀를 도와 스튜디오의 문제를 해결했는데, 왜 아직도 기분이 안 좋은 걸까? 고선호는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라 빈정거리며 말했다. “이미 다음 결혼을 준비 중인가?” 나유아는 순간 미소를 거두고 도발적으로 물었다. “무슨 상관이야?” ‘내로남불인가?’ 고선호가 미간을 찌푸리고 뭔가 말하려던 순간 문이 활짝 열리며 장선댁이 웃으며 말했다. “도련님, 작은 사모님, 돌아오셨어요!” 고선호는 말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 각자 신발을 갈아신고 난 두 사람은 하나는 위층으로 아빠를 찾아갔고, 다른 하나는 곧장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찾아 거실로 갔다. 김순자는 나유아를 옆으로 이끌고 가서 그녀의 몸매부터 살폈다. “아직 임신 안 했어?” 한마디 묻던 할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돌렸다. “괜찮아, 다음 달에 더 열심히 하면 돼.” 뒤의 그 한마디는 책망의 뜻은 아니었지만 올가미처럼 그녀의 목을 조여왔다. 그녀는 잔뜩 긴장한 채 이 결혼은 결코 대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 같았다. 예전에 임신 준비를 적극적으로 할 때 할머니가 정말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한 번은 무심코 할머니가 집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었는데 할머니가 시큰둥한 어조로 얘기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대를 잇게 하려고 유아를 들여보냈어. 유아의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빚진 것은 목숨이니 당연히 목숨으로 갚아야지, 아이를 낳고 나서야 이 빚을 다 갚을 수 있어. 그렇지 않으면 나씨 집안이 은혜를 협박으로 갚을지 누가 알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