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김연아의 밀당
사실 강준은 김연아의 과감한 터치에 넋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도 않았다.
솔직히 요염한 김연아에 비하면 정다은은 발끝에도 못 미쳤고 분위기든 몸매든 어느 하나 뛰어난 게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마치 농익은 복숭아 같았고, 온천에 같이 있는 지금은 고개만 살짝 숙여도 풍만한 가슴골이 눈에 들어왔다.
또한 몸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향수 냄새와 온천을 가득 메운 장미꽃잎 향기의 유혹에 혈기 왕성한 사내는 물론 설령 스님일지언정 견뎌내기 힘들지 모른다.
강준은 아랫배가 타오르는 듯 화끈거렸고 머리가 윙윙 울렸다. 김연아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지만 이미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 한창 황홀경에 빠져있던 순간 데이지룸의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이 열리자 강준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김연아가 갑자기 그를 덥석 껴안고 돌아섰다.
말캉한 촉감에 저도 모르게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고, 아랫배의 후끈거리는 열기가 극한으로 치달았다.
그와 동시에 김연아는 가볍게 뛰어올라 온천에서 빠져나왔고, 어느새 손에 날카로운 단도 한 자루를 잡고 있었다.
아직 온천에 웅크리고 앉은 강준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리조트 웨이터가 김연아를 죽이려고 하다니?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코피를 쓱 닦은 다음 양손으로 풀장 바닥을 더듬거렸다.
강준도 김연아가 들고 있는 날카로운 단도를 찾고 싶었다.
왜냐하면 적이 갑자기 들이닥친 상황에서 비록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지만 피해자는 김연아이며, 악당은 상대방이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창 더듬거리는 와중에 흰색 셔츠를 입은 웨이터 두 명이 이미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김연아는 역시나 고수였다.
특히 칼을 다루는데 능했고, 속도가 빠른 건 물론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다시 말해서 두 웨이터는 죽음을 자초한 꼴이었다.
“응?”
이때, 수영복 차림에 등 전체를 수놓은 문신을 훤히 드러낸 김연아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온몸에서 살기를 뿜어냈다.
“뭐 하는 거야?”
김연아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연아 누나를 도와주려고 칼을 찾고 있었어요.”
강준이 대답했다.
“이제 칼 없어. 너한테 총이 있지 않아? 총으로 도와줘도 돼.”
김연아의 표정이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네? 저한테 무슨 총이 있어요?”
강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김연아는 곧바로 박장대소했다.
‘귀여운 자식.’
웃음소리가 커질 수록 가슴이 들썩이며 위아래로 흔들거렸다.
팽팽하게 당겨진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온천탕으로 사뿐사뿐 걸어가 강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무슨 소리야? 분명 있잖아.”
“네...?”
그제야 강준은 김연아의 장난을 눈치챘다. 총이 그런 의미라니...
조금 전 추태를 보인 순간을 떠올리자 쑥스러운 나머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렇게 아름답고 매혹적인 미인을 상대로 어찌 아무 반응이 없겠는가?
한편, 밖에 웨이터 차림의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왔고 하나같이 장검과 쇠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흘긋 쳐다본 강준의 머릿속은 물음표로 가득 찼다. 김연아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상대방은 누가 봐도 나쁜 녀석들이지 않은가?
“연아 누나, 괜찮아요?”
아까 봤던 민머리 남자가 분노와 원망이 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김연아는 손만 휘휘 저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태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웨이터들이 죽은 사람의 시체를 끌고 나가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자 김연아는 라운지로 걸어가 목욕 타월을 걸쳤다.
강준은 여전히 물속에 쪼그린 채 앉아 있었다. 아까만 해도 불끈하던 아랫배는 일찌감치 잠잠해졌고, 어쨌거나 살인 현장에서 아무리 활기 왕성할지언정 겁에 질리기 마련이었다.
“여기서 며칠 더 묵어야 할 것 같아.”
라운지로 걸어간 김연아는 와인 한 잔을 들고 홀짝 마시며 말했다.
“이따가 다른 사람한테 널 데려다주라고 할게. 아무튼 고마웠어.”
“아닙니다. 천만에요.”
강준이 손을 내저었다.
김연아는 피식 웃더니 잠깐 고민하다가 말을 이어갔다.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궁금하지? 어제는 집에 납치범이 들이닥쳐 해치려고 하지 않겠는가, 오늘은 또 칼까지 들고 와서 공격하는 적이 나타나고...”
강준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김연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난 전남편이 생전에 남긴 재산과 회사를 대신 운영하고 있는데, 누군가 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가려고 하거든. 게다가 우연한 기회에 상대방을 철저하게 짓밟는 중요한 정보를 확보했는데 이제 이판사판 하는 심정으로 앞뒤 가릴 것 없이 날 죽이려 하는 거야.”
“그렇군요.”
강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가 과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속으로 몰래 탄식했다.
과부치고 너무 젊지 않은가? 겉보기에 기껏해야 25살 정도였는데 어린 나이에 남편을 여의다니 너무 안타까웠다.
“넌 착한 아이니까 괜히 이런 진흙탕 싸움에 연루되지 않았으면...”
“전 애가 아니에요!”
첨벙.
강준이 물속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하고 다시 쪼그리고 앉았다.
“하하하, 뭐가 아니야? 그렇게 부끄러워하면서.”
김연아는 배를 끌어안고 박장대소했다. 이내 웃음이 잦아들자 아이를 타이르듯 말했다.
“그래, 알았어. 넌 애가 아니라 어엿한 남자야. 이제 됐지? 일단 집에 돌아가 있어. 누나가 일 다 보고 나서 나중에 데리러 갈 테니까 그때 같이 기분 전환하러 가자.”
“전...”
강준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면 저도 남아서 도와줄게요. 이래 봬도 싸움은 꽤 잘하거든요?”
김연아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돌아가서 출근도 해야 하잖아. 아니면 직장에서 잘릴 텐데, 안 그래?”
“하지만...”
강준은 초조한 마음에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누나 말 듣고 돌아가서 출근해. 어차피 네가 도울 만한 일은 없으니까.”
김연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온천으로 걸어가더니 손을 뻗었다.
“자, 올라와.”
강준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고, 거의 무의식중에 김연아의 손을 잡았다.
김연아가 살짝 끌어당기자 강준은 물속에서 빠져나와 풀장을 벗어났다.
그녀는 정면에서 강준을 마주 보고 몸에 걸친 타월을 벗어 얼굴의 물기를 닦아주었다.
“우리 준이 착하지? 아무튼 고마워. 어젯밤에 네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난... 진짜 고맙게 생각해.”
말을 마치고 나서 강준을 살포시 안아주며 탄탄한 등을 토닥였다.
하지만 곧바로 얼굴에 어이없는 미소가 떠오르더니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았다.
강준은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상대방이 진지하게 작별 인사를 하는데 대체 무슨 추태를 부리는 건지 모르겠다.
김연아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몰래 혀를 찼다.
‘이 자식이 혈기가 이렇게 왕성해서야 원.’
심지어 여자 친구도 있는 놈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라니.
“자, 그만! 앞으로 누나가 새 여자 친구를 물색해줄 테니까 아무 데서나 흥분하지 마.”
강준은 황급히 목욕 타월로 몸을 감싼 뒤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이내 허둥지둥 밖으로 뛰어갔다.
김연아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강준이 문을 나서는 순간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고, 새로운 타월을 찾아 몸에 걸쳤다.
“들어와.”
벌컥.
밖에서 경호하고 있던 현태는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즉시 안으로 들어섰다.
아까만 해도 부드럽던 김연아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고, 마치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했다.
현태의 이마에 땀이 흥건했다. 웨이터 차림의 두 남자는 분명 부하였는데 김연아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는가?
어쨌거나 본인의 불찰이니 그녀가 죄를 묻는다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그러나 김연아는 조금 전의 암살자는 언급하지도 않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저녁에 움직인다. 전에 계획했던 건 그냥 패스해. 그리고 엄철수한테 연락해서 이따가 18시에 보자고 해. 장소는 네가 알아서 정하고.”
“네, 알겠습니다.”
현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일 봐. 그리고 바닥 청소할 사람을 보내.”
“네, 하지만...”
현태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연아 누나, 엄철수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만약 딸아이의 생사에 관심이 없으면 어떡해요?”
“그럴 때는 또 방법이 있지.”
김연아는 손을 휘휘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