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육태준은 잠자코 듣고 있다가 눈빛이 어두워졌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친구 김도영이든 어머니 고설희, 심지어 개인 비서 허우진과 저택의 고용인조차 하채원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데 이건 그가 방임했기 때문이다.
김도영은 전화 한 통을 받고 황급히 떠났다.
그가 떠난 후, 육태준은 자기도 모르게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지만 하채원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보지 못했다.
육태준이 전화를 걸었지만 맞은편에는 여전히 차가운 시스템 목소리만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연결이 되지 않으니 잠시 후에 다시 걸어 주십시오...”
답답한 마음에 휴대전화를 한쪽으로 내팽개친 육태준은 일어나 통유리 창문 앞에 가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새벽녘에 한 하채원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그녀는 후회한다고 말했다...
육태준은 왠지 목이 막혀오는 것 같아 크게 기침을 두어 번 하였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준 오빠, 담배 좀 작작 피워요. 건강에 안 좋아요.”
육태준은 눈빛이 움찔하며 순간 하채원이 돌아온 줄 알았지만 돌아보니 현모양처인 듯 차려입은 배다은이 눈에 들어왔다.
그윽한 눈빛이 사라진 육태준은 다시 차가운 어투로 물었다.
“네가 어떻게 왔어?”
그를 바라보는 배다은의 눈빛은 매우 부드러웠다.
“아줌마가 오라고 했어요. 하채원이 이렇게 빨리 재혼하는 것에 관해 딴생각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녀가 말하는 아줌마는 육태준의 어머니였다.
4년 전.
고설희와 김도영은 한 차에 함께 탔다가 라이벌 회사로부터 음해를 당했다.
고설희의 출혈이 너무 많은 상황에서 당시 병원에 O형 혈액이 부족했는데 마침 하채원도 O형 혈액이었다.
그녀는 김도영을 안정시킨 후 또 수혈하러 갔지만 수혈 후 체력이 떨어져 기절했다.
그때 하씨 가문이 자신을 후원한다는 이유로 배다은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하채원의 비위를 맞추곤 했다.
하채원이 병원에 있다는 것을 알고 두말없이 병원에 가서 돌보다가 하채원이 사람을 구한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배다은이 하채원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우연히’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 되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배다은은 원래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봐서라도 육태준이 반드시 자신을 아내로 맞이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고설희는 아들의 사업과 권세를 위해 하씨 집안과 혼인을 요구했는데 상대가 난청을 앓고 있는 하채원이라도 상관없었다.
육태준은 하채원과의 관계를 거부했고, 그래서 결혼 3년 동안 아이가 없었다.
고설희는 요구를 낮추기 시작했는데 배다은이 육태준과 함께 있는 것을 지지하며 아이만 있으면 배다은이 육씨 가문으로 시집올 수 있다고 했다.
“재혼 상대가 누구야?”
육태준은 배다은을 바라보며 물었다.
전화에서 하채원은 600억 때문에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 육태준도 자신을 향한 하채원의 오랜 사랑이 연기라고 믿지 않았다.
배다은은 망설이다 대답했다.
“저도 잘 몰라요.”
육태준에게 하채원이 늙은이에게 시집가도록 강요당했다고 말하면 마음이 약해지리라 판단한 그녀는 시치미 떼기로 했다.
“모르면 앞으로 이 일을 언급하지 마.”
배다은은 어리둥절해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날 육태준은 종일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
단현시 병원.
늦은 밤, 중환자실 안.
하채원은 인공호흡기를 달고 어렵게 숨을 쉬고 있었다.
그녀는 죽지 않았다. 차지욱이 병원으로 옮긴 후 저승사자의 손에서 다시 돌아왔다. 옆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장옥자를 바라보며 그녀는 힘겹게 위로했다.
“저... 아프지 않아요. 울지 말아요...”
그녀는 나약하고 비겁한 사람이라 죽음조차도 수면제를 복용하는 걸 택했다...
하채원은 밤새 백발이 된 장옥자를 바라보며 더욱 괴로워졌고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장옥자는 목이 메어 하채원의 손을 꼭 잡았다.
“채원이, 아줌마 말 잘 들어. 우리 병을 잘 치료하고 앞으로 잘 살자. 응?”
하채원은 그녀에게 약속할 수 없었다.
병원의 복도.
“선생님, 수술 후 또 검사해 보았는데 임신 2주 차라는 것을 발견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