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창밖에서는 광풍이 휘몰아쳤다. 하채원은 가늘고 긴 손을 아랫배에 놓은 채로 눈빛이 흐려졌다.
차지욱은 그녀에게 임신했다는 의사의 진단을 알려줬다.
‘이 아이는 때를 잘못 맞춰왔어.’
장옥자는 눈빛이 흐려진 채 살려는 의지가 없는 하채원을 보고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
“채원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채원은 고개를 돌려 장옥자를 바라보았다.
“아줌마.”
눈시울이 붉어진 장옥자는 쭈글쭈글한 손으로 하채원의 귀밑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채원아, 아줌마는 아이가 없어서 항상 너를 친딸처럼 여겼어. 아줌마는 부자가 되는 걸 바라지 않아. 다만 네가 건장하게 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유일한 딸이 죽겠다고 하니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어?”
하채원은 눈빛이 굳어진 채로 과일칼을 집어 든 장옥자를 바라보았다.
“너를 열 살까지만 키우고 그 후로 함께 있지 못한 건 내 잘못이야. 지금 바로 어르신께 사과하러 갈게...”
장옥자는 칼로 손목을 베려 했다.
떨리는 마음을 추스르며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썼어도 움직임을 수 없었던 하채원은 흐느끼며 눈물만 흘렸다.
“아줌마, 안 돼요...”
장옥자는 멈추지 않았다.
하채원은 빨갛게 된 그녀의 손목을 보며 눈물을 왈칵 쏟았다.
“저 바보짓 하지 않을게요. 안 할게요... 아줌마, 제발...”
하채원의 보증을 듣고서야 장옥자는 동작을 멈췄다.
그녀의 두 눈은 빨갛게 충혈되었다.
“채원아, 넌 낳아준 은혜를 다 갚았어. 우리는 이제 최미영에게도, 육태준에게 빚진 것도 없어. 이제부터 너는 너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나를 위해, 또 배 속의 아이를 위해 잘 살아야 해..”
하채원은 장옥자의 말을 듣고 그녀와 아이를 위해 잘 살기로 했다.
이제부터 하채원에게는 엄마도 동생도 없다. 가족은 장옥자와 배 속의 아이뿐이다.
장옥자는 이런 방식으로 하채원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으나 하채원을 살리고 싶었다.
하채원은 자기의 출생을 좌우 지할 수 없지만 낳아준 은혜를 짊어져야 했다.
엄마가 되어서 어떻게 딸에게 목숨을 대가로 은혜를 갚으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입원했을 때 차지욱은 하채원에게 최미영이 이미 외국으로 도망갔다고 알려줬지만 그녀는 섭섭하지 않았다.
육태준을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채원은 최미영에게 진 은혜를 다 갚으면 앞으로 서로 빚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채원은 아직 육태준에게 실수로 생긴 이 아이에 대해 알리고 싶지 않았다,
육태준이 자신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기 때문에 만약 그가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다른 마음을 먹게 될가 걱정되었다.
하채원은 병원에 3일간 입원한 후 퇴원하며 장옥자에게 먼저 돌아가라고 했다. 하채원은 육태준과의 일을 정리하고 난 후 그녀와 함께 시골로 돌아가서 살려고 했다.
퇴원하는 날 김수환에게 억지로 끌려와 병원에 관한 일을 알아보던 김도영은 마침 하채원과 차지욱을 보았다.
“채원 씨, 실종된 거 아니에요?”
사흘 전, 즉 15일은 하채원과 육태준이 이혼 절차를 마감하는 날이다.
하지만 15일 후 하채원은 실종된 것처럼 사흘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떻게 병원에 있을 수 있죠?”
김도영이 모처럼 관심을 보이자 원장은 바로 조사했다.
반 시간 후 하채원의 모든 입원 자료를 받은 김도영은 깜짝 놀랐다,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고? 하채원이 임신했어? 태준이와 이혼하겠다고 난리를 피우더니만 어떻게 임신했어?’
“이 진단서가 하채원의 것이 맞아요?”
김도영의 물음에 자료를 보내온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하채원이 퇴원할 때 그녀의 곁에 있던 남자가 떠오른 김도영은 온몸에 차가운 기운을 내뿜었다.
‘하채원, 내가 널 얕잡아 봤어.’
김도영은 이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 몰라 육태준에게 알려줘야 할지 망설였다.
결국 김도영은 배다은에게 전화를 걸어 이 일을 알려줬다.
그에게 은혜가 있고 또 의지할 곳이 없는 배다은에게 있어 오직 자신만이 그녀를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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